배드민턴의 ‘성지’로 불리는 영국 버밍엄의 찬 공기가 벌써부터 심상치 않다. 127년이라는 역사의 무게를 견뎌온 전영 오픈의 대진표에서 한국 여자복식의 기둥인 공희용-김혜정의 이름이 결국 사라졌다.

세계 랭킹 5위, 이름만으로도 든든했던 이들이 코트를 비운다는 소식은 단순한 결장 그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온다. 팬들에게는 아쉬움을, 대표팀에게는 깊은 고민을 안긴 이번 결정 뒤에는 스포츠의 화려함에 가려진 냉혹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세계배드민턴연맹(BWF)의 규정은 상위권 선수들에게 마치 ‘강제 동원령’과도 같다. 세계 10위 안에 드는 복식조는 슈퍼 1000 레벨 대회에 반드시 얼굴을 비춰야 하며, 이를 어기려면 의사의 진단서가 필요할 만큼 조건이 까다롭다.
결국 이들의 불참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비명’에 가깝다. 서류상으로는 부상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작년 한 해 동안 77.8%라는 미친 승률을 기록하며 몸을 갈아 넣은 대가가 이제야 청구서로 돌아온 셈이다.

지난해 공희용과 김혜정은 싱가포르부터 코리아 오픈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셔틀콕을 때려 박았다. 우승 트로피 4개를 들어 올리는 동안 그들의 무릎과 어깨에 쌓인 피로물질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상위 랭커라는 지위는 달콤하지만,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쉼 없이 출전해야 하는 굴레는 선수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올해 초 말레이시아와 인도에서 겪은 충격적인 조기 탈락은 사실 컨디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방전된 배터리가 보내는 마지막 경고였다.

기계도 과부하가 걸리면 퓨즈가 나가듯, 사람의 몸도 한계에 다다르면 멈춰야 살 수 있다. 이번 전영 오픈 불참은 눈앞의 명예보다 선수의 수명을 선택한 고통스러운 결단이며, BWF의 가혹한 일정에 던지는 무언의 항변이기도 하다.
지난 아시아단체선수권에서 우리는 묘한 장면을 목격했다. 철옹성 같던 복식 조합이 흩어지고, 백하나와 김혜정이 짝을 이뤄 코트에 나서는 ‘임시방편’식 경기가 이어졌다.
이소희의 부상이라는 변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세계 최정상을 다투는 조들이 대회 도중 찢어지는 모습은 한국 배드민턴의 뎁스가 두껍다는 증거인 동시에 현재 주전들의 몸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익숙한 파트너의 호흡이 아닌 낯선 손길에 의지해야 했던 김혜정에게 지난 시간은 기술적인 훈련보다 정신적인 소모가 더 컸을 것이다. 파트너가 바뀌고 전략이 꼬이는 혼돈 속에서 선수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위협받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는다.
전영 오픈이라는 큰 무대를 앞두고 전열에서 이탈한 것은 뼈아픈 실책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때로는 요충지를 내주고 후퇴하는 전술이 필요하듯, 지금의 멈춤은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다.

공희용-김혜정이 빠진 자리에 다행히 부상을 털어낸 백하나-이소희 조가 돌아온다. 한국 여자복식의 양대 산맥 중 한 축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들의 복귀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힘이 될 것이다.
여기에 이연우-이서진이라는 젊은 피들이 성인 무대의 매운맛을 보러 나선다. 특정 스타 플레이어에게만 쏠려 있던 시선이 분산되면서, 한국 배드민턴은 강제로 ‘포스트 공-김’ 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다.

위기는 언제나 새로운 영웅을 낳는 법이다. 주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투입된 신예들이 전영 오픈이라는 압박감을 이겨내고 사고를 친다면, 한국 배드민턴은 오히려 더 단단한 방어막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세계 5위의 빈자리가 커 보이고 앞날이 캄캄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태양 아래 그림자가 없는 곳은 없으며, 가장 짙은 어둠은 해가 뜨기 직전에 찾아오는 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팬들에게 있어 ‘불참’ 소식은 배신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주는 단어다. 그러나 우리가 응원하는 것은 선수가 쳐내는 점수가 아니라, 코트 위에서 땀 흘리는 그들의 삶 자체여야 한다.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코트에 서는 것은 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오히려 본인의 커리어와 팀의 미래를 망치는 독단이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의 화살이 아니라, 다시 셔틀콕을 움켜쥘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묵묵한 신뢰다.

곧 다가올 우버컵과 메이저 대회들을 생각하면, 전영 오픈이라는 ‘성지’를 포기한 대가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코트 밖으로 밀려난 세계 5위의 엔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더 뜨겁게 다시 돌아오기 위해 식어가는 중이다.
공희용과 김혜정이 다시 환상적인 호흡으로 스매싱을 날리는 그날, 우리는 지금의 이 인고의 시간이 얼마나 값진 투자였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멈춤은 패배가 아니라, 더 높은 도약을 위해 무릎을 굽히는 과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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