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대신 늙은 남성 작가만 주목"...그가 깬 겹겹의 벽, '여성·호남·한국어·나이'
세계 문학의 최고봉에 우뚝 선 작가 한강
"남성이었다면 진작 노벨상 후보 올랐다"
#.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맥널리 잭슨 서점 록펠러센터 지점. 점원에게 ‘작가 한강의 책이 있나’를 묻자, 그는 두 권의 책을 책장에서 꺼내 왔다. ‘채식주의자’와 ‘희랍어 시간’의 번역본을 든 직원은 “원래는 더 많은 한강 책이 있었다. 알고 있겠지만 그가 노벨문학상을 탔다. 책을 주문해 뒀는데 언제 올지는 모르겠다”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날 미국 전자상거래 플랫폼 아마존에서도 한강의 소설은 문학 분야 1위에 단숨에 올랐다.
한국 문학은 영화나 가요만큼은 아니더라도 세계를 향해 점차 영역을 넓혀왔지만, 여전히 변방에 있다. 서양 문학에 밀리고, 일본·중국 문학보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한강(53)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을 세계의 중심으로 단번에 밀어 올렸다. 주류와 거리가 먼 여성·비영어권·비백인 작가의 성취여서 더욱 극적이다.
그중에서도 한강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노벨문학상이 독자들에게 추천한 그의 책 목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에코 페미니즘 관점에서 가부장 사회 폭압의 상징인 '육식'을 거부하는 중년 여성을 그린 ’채식주의자’, 말을 상실해가는 여성과 눈을 잃어가는 남성의 이야기인 ’희랍어 시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혐오·차별의 한국사를 다룬 ’소년이 온다’가 추천 대상이다.
언어 비주류, ‘개인의 욕망’으로 돌파하다
세 작품은 폭력과 고통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 개인에게 주목한다. “‘채식주의자’가 시공간을 가로질러 세계문학의 영역에서 현재의 독자들에게 와닿는 것은 삶의 비극성에 맞서는 뜨겁고 강렬한 개인의 욕망을 감각적인 상징들로 구체화한 데 힘입었다”(백지연 문학평론가)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사용 인구가 7,000여 만 명에 그치는 한국어로 쓰인 그의 소설이 세계에 통한 까닭이기도 하다. 또한 주류가 편애하는 굵직한 거대 담론이 아닌 개인의 윤리에 섬세하게 주목했기에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됐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에서 그를 '선지자'로 표현한 배경이다.
언어의 장벽을 넘는 데는 번역의 역할이 컸다. 영국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채식주의자’와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을 받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영어), 최경란(프랑스어) 등 번역가들이 노벨문학상 수상의 조력자들이다. 한강의 작품은 28개 언어로 82권이 번역돼 주목받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최 번역가는 한국일보에 "우리 모두에게 감동적인 소식이다. 나 역시 벅차올랐다"는 소감을 전했다.
한국에 '블랙리스트' 취급 작품으로 인정받아
한국 안에서도 종종 외면받는 역사의 상흔과 사회적 참사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 세계시장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도 인상적인 장면이다. ‘소년이 온다’는 박근혜 정부에서 ‘사상적 편향성’을 이유로 세종도서 사업에서 배제됐고, 한강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렸다.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고향의 민주화운동뿐 아니라 제주 4·3사건, 서울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등 기득권력이 저지르거나 지우려 한 역사를 꾸준히 기억하고 복원하는 글쓰기를 해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라는 ‘소년이 온다’의 문장처럼, 인간 존엄이 힘의 논리로 무시되는 순간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사회적 고통에 손 놓지 않고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만들어야 하는지를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쓴”(양경언 문학평론가) 한강의 작품은 광주와 제주의 비극을 세계인이 조명하게 했다.
여성이란 성별과 많지 않은 나이...겹겹의 차별을 넘어
“한강의 나이는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뿐 아니라 한국에서 후보로 거론된 고은 시인이나 황석영 작가와 비교해도 상당히 젊다”는 오형엽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말은 그를 둘러싼 겹겹의 소수자성을 보여준다. 노벨문학상은 일생의 작업을 통해 문학적 세계관을 완성한, 나이가 지긋한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1970년대생인 53세 한강의 수상은 노벨문학상이 '과거의 감수성'이 아닌 ‘미래의 감수성’에 주목했다는 의미다. 김동춘 성공회대 명예교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제 5·18과 국가폭력을 떠들었던 우리 세대는 가고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세계인의 지평과 반열에 올리는 새 주역이 등장했다"고 썼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문학의 주변부에 머물러온 여성 작가의 수상이라는 점에서도 한강의 수상은 주목받는다. 노벨문학상 수상 시즌마다 한국 문단은 '선생님 권력'의 상징인 고은을 밀어 올렸으나, 누구의 기대도 받지 않은 채로 상을 단숨에 거머쥔 건 한강이다. 아시아권 여성 작가의 첫 수상이기도 하다. 한강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써왔다. 북미에서 한강의 작품을 내는 출판사 호가스의 편집장 패리사 에브라히미는 NYT에서 그의 작품이 “여성의 내면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한강과 시인 김혜순이 최근 잇따라 국제적인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여성 작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나, 두 사람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아직 이르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문학평론가는 “한강과 동일한 이력의 남성 작가가 있다면 진작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기저기서 주목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NYT 역시 "가장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한국 현대문학의 대부분은 여성 소설가들에 의해 쓰이고 있다"며 "하지만 언론과 문학계는 나이 든 남성 작가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여겨왔다"고 전했다.
뉴욕=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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