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나는요, 완전 붕괴됐어요"..'헤어질 결심'이 낳은 기현상

김지혜 2022. 7. 2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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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해준(박해일)은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떠났다. 홀로 남겨진 서래(탕웨이)는 멍하게 서있다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든다. '붕괴'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두드린다.

'무너지고 깨어짐.'

서래는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해준이 남긴 정확한 워딩은 이랬다.

"나는요, 완전 '붕괴'됐어요"

명백히 부정적 뉘앙스의 말이었지만 남녀 관계에서는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너로 인해 붕괴됐다'는 말은 상대로부터 받은 어마 무시한 영향력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붕괴'는 해준이 서래에게 한 "나는 너의 포로가 되고야 말았다"는 감정의 항복 선언 같은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개봉 24일 차, 100만여 명의 관객들도 '헤어질 결심'에 붕괴돼 버리고 말았다.

◆ 보고 또 보고…'헤친자'들이 만든 장기 상영

'헤어질 결심'은 6월 19일 개봉해 지난 18일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총 135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작품의 손익분기점은 300만 명이었으나 개봉 전 전 세계 193개국에 선판매돼 본전 수치를 120만 명으로 낮출 수 있었다.

개봉 초반 '탑건:매버릭', '토르:러브 앤 썬더'의 흥행 기세에 눌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흥행 부진'에 이어 '흥행 참패'라는 부정적 워딩의 기사도 나왔으나 이 영화의 생명력은 남달랐다. 개봉 5주 차까지 장기 상영을 이어가며 마침내 손익분기점을 달성했다. '헤친자'의 열광적인 지지에 힘입은 결과였다.

이른바 ''헤어질 결심'에 미친 자'를 지칭하는 이 팬덤은 재관람을 통해 영화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냈다. CGV에 따르면, 개봉 후 일주일간 '헤어진 결심'을 2회 이상 관람한 n차 관람객 비중은 전체 관객 중 3.3%에 달했다. 일반 영화의 개봉 첫 주 n차 관람객 평균 비율인 2.4%를 크게 웃돌았다. 메가박스가 멤버십 가입 관람객으로 산출한 자료에 따르면 '헤어질 결심'의 2회 이상 재관람률은 8%다. 롯데시네마는 개봉 시점부터 현재까지 다회 관람객 비중을 추산한 결과 '헤어질 결심'은 4.1%(평균 관람 횟수 2.3회)로 집계(멤버십 가입 유료관객 기준)됐다. '헤어질 결심'은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서 재관람률 1위였으며, 전체로 놓고 봐도 600만 흥행작 '탑건:매버릭'에 이은 2위를 기록했다.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의 개봉 전 가진 인터뷰에서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곱씹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못 알아 들어서 여러 번 봐야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다만 관객에게 영화의 시간은 똑같은 흘러가는데 다른 레이어가 이중 삼중으로 있다면 두 번 볼 때는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관객이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물론 '헤친자'들은 후자였다.

일주일 사이에 흥행 여부가 판가름 나고, 웬만한 흥행작도 상영 기간이 한 달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신작 회전율이 빨라진 환경에서 100만 언저리의 영화가 한 달 이상 장기 상영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헤친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등에서 활약하며 영화의 입소문 확산에 두 팔을 걷어붙였다. 하나같이 영업 부장을 자처했다. 영화의 명대사를 활용한 밈(meme·인터넷 유행어), 촬영지 투어, 예약 발매 하루만에 베스트셀러 등극을 알린 각본집 등 영화의 여운을 곱씹고 되새기는 행위는 온,오프라인에서 이어지고 있다.

◆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느끼게 하는 영화

'멜로 영화는 장사가 안 된다'

2010년대 이후 더욱 확고해진 이 속설은 멜로 영화의 기획과 제작 자체가 전무해지면서 정설로 굳혀졌다. TV에 OTT까지 가세해 드라마를 소비할 수 있는 플랫폼은 다양해졌다. '극장 영화=블록버스터'라는 공식이 굳어지면서 멜로 장르는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다. 소소한 감정 놀음을 소비하기에 1만 4천 원이라는 돈은 아깝다는 인식이었다.

'헤어진 결심'은 '거장' 박찬욱이기에 가능한 시도처럼 보였다. 또한 박찬욱스럽게 완성된 멜로 영화기도 하다. 로맨스와 수사물을 엮고 관심과 의심을 교차시키며 전개되는 두 남녀의 사랑과 파국을 보여줬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나누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대로 이 영화는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언어의 장벽과 소통의 시차는 관객의 호기심과 집중력을 발동시키고, 바다를 향해 내달리는 2부에서는 '마침내'와 같은 반전의 묘미도 선사한다.

멜로 영화가 팔리지 않는 것은 감정적 동화가 쉽지 않은 시나리오의 문제이기도 하기만, 체험적 영화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헤어질 결심'은 달랐을까.

'공동경비구역 JSA'(2000) 이후 박찬욱의 영화는 해석의 영역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박쥐'(2009)는 그 정점에 있는 영화였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은 여느 영화보다 친절하다. 이런 그의 변화는 '아가씨'(2016)때부터 시작됐고, '헤어질 결심'에서 두드러진다. 이 영화는 해석을 요하는 작품이 아니라 감정의 파고를 경험하는 영화이며 곱씹을수록 우러나는 영화다.

사실상의 2부 구조를 통해 수사 미스터리는 영화 안에서 말끔히 해결된다. 남은 건 두 남녀의 감정이 전달되는 시간차의 안타까움과 여운이다.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은 시작됐죠"라는 서래의 말은 읊조림은 한국어로 그에게 가닿지 않는다. 마침내 붕괴되지 않을 사랑이 되기 위해 미결 사건이 되기로 결심한 여자와 그런 그녀를 하염없이 찾아 헤매는 남자의 메아리가 슬픔의 파도 속에서 속절없이 울려 퍼진다.

그렇다고 해서 '박찬욱스러움'을 내려놓은 영화는 아니다. 시나리오의 개성과 장르를 다루는 능수능란한 솜씨, 스토리텔링의 요소로 작동하는 정교한 미장센까지 여전히 그답다. 영화를 보았으나 명화 한 편을 보고 나온 예술적 감성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일부에서는 이 심미주의를 스노비즘(snobbism: 고상한 체하는 속물근성)으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박찬욱 월드의 언어다. 이 고유성이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며 동시에 관객의 호불호도 유발한다.

분명한 건,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열렬하게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향한 관객의 애정은 120만 명이라는 수치로는 그 절대적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이 강렬한 감정적 체험을 기꺼이 권할 수밖에.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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