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싶으면 크리스마스 연휴에 자소서를 쓰라고?
서울시에는 취약 노동자 지원 기능을 수행하는 시 민간위탁기관 서울노동권익센터가 있습니다. 이 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섭니다. 오세훈 서울시가 들어선 뒤 일어난 센터 예산 삭감, 수탁기관 변경 이후 발생한 노동조건 후퇴, 단체협약 해지 등이 원인입니다. '약자와의 동행'을 내건 오세훈 서울시에서 취약 노동자를 지원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겪은 일과 그들이 싸움에 나서는 이유를 당사자들의 글을 통해 전합니다. 편집자
나는 지금은 사라진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권리보호센터(감정노동센터)에 2021년 2월 입사했다. 약 3년간 일한 감정센터는 만족스러운 일터였다. 효율적인 업무체계와 선진적인 조직문화가 좋았고, 사회적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업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 배울 점 많고 열정 넘치는 구성원과 일하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지난해 말 서울시 방침에 따라 우리 센터는 운영을 종료하게 되었고, 이후 서울노동권익센터로 통폐합되었다. 정든 일터가 사라지는 허망함, 의지하던 동료들을 떠나보내는 상실감을 미처 털어내기도 전에 또 다른 시련을 맞았다.
비효율, 불투명, 불합리, 불공평의 연속
서울시는 지난해 감정노동센터를 비롯해 동북권·서남권노동자종합지원센터 등 민간위탁으로 운영된 서울시 산하 3개 노동자 지원센터를 서울노동권익센터로 통폐합했다. 그리고 올해부터 그 운영권을 한국노총 서울본부에 주었다. 새 환경에서 적응해야 해 걱정이 됐지만, 사용자가 노동단체이니 근로조건은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기대가 절망과 분노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노총이 운영하는 서울노동권익센터에서는 근로조건 향상은 물론이고 합리적 의사결정, 효율적 조직운영, 체계적 업무방식 그 어떤 기대도 사치였다. 복지 차원의 자기계발비를 서울시에서는 근속에 따른 추가금까지 반영해 예산을 책정했는데 왜 기본 금액으로 주는지, 과반 노동조합이 있는데도 운영규정과 취업규칙은 왜 마음대로 정해서 공지하는지, 궁금한 것은 많지만 그 어떤 질의에도 사용자들은 답을 해주지 않는다. 사내 게시판에는 직원들의 질문이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아있다. 조직의 중요 현안을 사측끼리 속닥속닥 정하고, 팀장 회의에서 빙빙 돌려 애매하게 공지하는 것, 그리고 덧붙이는 입단속 하라는 말, 이것이 이들의 소통방식이다.
휴가 적용할 땐 "신규 입사자", 실적 요구할 땐 "장기근속 전문가"
서울시와 한국노총은 센터 통폐합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기존 근속기간 등 근로관계를 승계하지 않았다. 사용자들은 이를 근거로 복리후생비나 휴가를 산정할 땐 노동자들을 '신규 입사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서울노동권익센터에서 길게는 9년간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하는 직원도 마치 신입 직원처럼 한 달에 달랑 하루의 연차휴가를 받는다. 또한 자기계발비는 근속기간에 따라 오르게 되어 있는데도 노동자들은 모두 신규 입사자와 마찬가지로 기본 금액을 받는다.
그런데 서울시에서 부서별 중장기 성과지표 제출을 요구할 때는, 작년 감정노동센터 실적을 기준으로 작성하라고 한다. 서울시 방침에 따라 지난해 운영이 종료된 감정노동센터 인원은 13명이었다. 지난해 13명이 하던 일을 지금은 남은 6명이 소화해야 한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실적을 작년 수준으로 맞추라고 한다. 이럴 땐 노동자들을 감정노동 업무를 수년 간 수행해 온 전문인력으로 처우한다.
올해 6월 사측이 새로 만든 사내 운영규정에 따르면 채용 시 동종의 직무 경력이 있는 경우, 경력 기간을 100% 인정해 호봉을 책정해야 한다. 서울시와 사측 논리대로라면 서울노동권익센터 노동자들은 모두 신규 입사자이니 운영규정에 따라 새 호봉산정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호봉 산정에 있어선 기존 방식을 그대로 유지해 사기업 경력은 40%만 인정했다. 이럴 땐 또 노동자들을 '신규 입사자'가 아닌 과거부터 계속 근무 중인 직원으로 규정한다.
나는 올해 2월이 입사 만 3년 차라 연차도 하루 더 생기고, 자기계발비도 올라야 했지만 앞에 서술했듯 모든 것은 수포가 되었다. 서울노동권익센터와 같은 민간위탁기관은 운영 주체가 3년마다 변경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곳 서울노동권익센터에 아무리 오래 재직해도 3년 단위로 경력이 리셋되며 연차휴가도, 자기계발비 인상분도 받을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 배틀'과 '가족' 같은 회사
이처럼 서울시와 한국노총은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노동자들을 때론 '신규 입사자'로, 어떨 때는 '장기근속자'로 처우한다. 일관성 없는 사용자들의 조직 운영에 서울노동권익센터 대다수 노동자가 반발하고 있다. 통합 후 첫 전 직원 워크숍 자리에서 많은 직원이 조직 개선을 요구했다. 그때 센터장은 말했다. 본인들도 "힘들어 죽겠다"고, 4개 센터가 합쳐져서 "골치아파 죽겠다"고. 한 기관의 장으로서 할 이야기가 맞나 싶었다. 직원들이 이런저런 점이 힘들다고 고쳐 달라고 하는데 솔루션 제시는커녕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라는 식의 불행 배틀을 걸어오는 책임자라니.
배추 한 포기가 2만 원인 고물가 시대에 통상시급이 작년보다 낮아진 노동자들과 호봉을 3단계나 올린 사용자 중 누가 더 힘들까? "힘들어 죽겠다"라는 말은 형식적 하청사용자의 변경으로 재직기간이 인정되지 않아 은행에서 전세 대출을 거절당한 직원, 작년에 입사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지만 근속기간을 승계해 주지 않아 작년분 퇴직금이 날아간 직원, 유급 휴일이 1/3로 줄어든 직원, 아직 근로계약서도 체결하지 못한 직원들의 대사여야 하지 않을까?
한국노총 출신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을 향해 '우리는 가족'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란 것은 차치하고) 나는 천장에서 빗물이 새 콘센트 쪽으로 흘러내리는 상황에서 재택근무도 시켜주지 않고, 그 위험한 곳에서 일하게 하는 가족을 둔 적 없다. 나는 '네가 지금 일하는 회사에서 계속 일하고 싶으면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자기소개서 써서 제출하라'는 가족을 둔 적 없다.
나는 따뜻한 밥과 국을 주던 곳을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메뉴가 찬밥과 맹물로 바뀌었다. 서울노동권익센터 노동자들의 요구는 5성급 호텔 셰프의 코스 요리를 대령하라는 게 아니다, 그저 그간 내가 먹어온 식단을 유지해 달라는 것이다. 서울노동권익센터 사용자인 한국노총에 요구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서울노동권익센터 기존 임금체계와 단체협약 등 근로조건을 그대로만 유지하라. 진정 노동자들을 '가족'이라 여긴다면, '한국노총'이란 이름에 맞게 노동자의 편에서 다시 한번 성찰해 보길 권한다.
[윤승희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서울노동권익센터분회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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