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반도체 승패 좌우할 AI 패러다임] ‘113조’ AI 반도체 춘추전국시대…빅테크 뛰어들며 가열

#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엔비디아가 3월 1일(이하 현지시각) 시총 2조달러(약 2634조원)를 돌파했다. 세계 시총 3위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과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 시총까지 제쳤다. 그 배경엔 인공지능(AI) 열풍이 있다.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가 AI 개발에 사용되고 있어서다. 게다가 엔비디아 GPU를 대체할 만한 제품도 없어 AI 반도체 시장 80% 이상을 독차지하고 있다. 자연스레 작년 4분기 영업이익은 136억달러(약 18조원)로 전년 동기 대비 10배 가까이 치솟았다.

# 2월 27일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10년 만에 방한(訪韓)한 목적에는 엔비디아 의존도를 줄이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 깔려있다. 메타는 거대 언어 모델(LLM) ‘라마3’ 를 개발 중인데, 구동에 필요한 AI 반도체 자체 개발을 모색하고 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경계현 반도체(DS) 부문 사장을 만난 이유다. 앞서 올해 1월 26일 한국을 찾은 샘 올트먼 오픈AI CEO도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방문하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났다. AI 반도체 확보를 통해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전략이다.
AI 시대가 문을 열면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반도체 업계 주 고객이었던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까지 AI 반도체 개발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현대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추론’한 결과를 도출한다. 이때 필요한 게 대규모 연산을 초고속, 초전력으로 실행하는 ‘AI 반도체’다. 시장조사 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2022년 444억달러(약 58조원)였던 AI 반도체 시장은 2026년 861억달러(약 113조원)로 두 배 가까이 성장할 전망이다.
지금은 AI의 두뇌 역할을 사실상 GPU가 도맡고 있다. 다만 GPU는 AI 전용으로 개발된 반도체가 아니다. 효율성이 떨어진다. 투자자본수익률(ROI)로만 보면 낙제점이다. 그래서 전 세계 빅테크부터 스타트업까지 앞다퉈 신경망처리장치(NPU)라고 통칭하는 AI 반도체 개발에 나섰다. 최근엔 각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면서 국가 간대항전 양상까지 띠고 있다. ‘이코노미조선’ 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국내외 반도체 선두 기업들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전문가가 전망한 AI 반도체 시장의 미래는 무엇인지 다각도로 짚어봤다.
영원한 승자 없는 반도체 산업
역사적으로 반도체 산업 패러다임은 전방 산업 트렌드가 바뀔 때마다 변해왔다. 이때 승자와 패자도 갈렸다. SK하이닉스 연구원 출신 정인성씨의 책 ‘반도체 제국의 미래’에 따르면, 스마트폰 태동기 때 그랬다. 인텔은 당시에도 컴퓨터 CPU 시장 최강자였다. 그러나 정작 스마트폰에 탑재할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는 없었다. 인텔이 만든 프로세서는 크기가 컸고, 전력 소모량도 많았다. 애플이 초창기 아이폰에 삼성전자 ‘S5L8900’ 칩을 선택한 이유다. 이 칩은 ARM의 ‘명령어 집합 구조(ISA)’라는 기초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향후 ARM이 모바일 반도체 설계 90% 이상을 장악하는 발판이 됐다. 인텔은 2016년 4월 11%의 인력 감원 계획을 발표하고 스마트폰 AP 사업부를 해체했다.
메모리 반도체(메모리) 시장, 특히 D램(DRAM) 시장에서도 영원한 승자는 없었다. 지금은 한국이 메모리 강국이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D램 종주국은 미국이었다. 1971년 D램을 처음 만든 기업이 인텔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일본에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내줬다. 당시 메인프레임(대형 컴퓨터)에는 고성능·고품질 D램이 필요했는데, 도시바와 히타치 등 일본 기업들이 극한의 성능을 추구하면서 D램 시장을 주름잡게 됐다.
영원할 것 같던 일본의 D램 왕국은 1990년대 ‘PC 시대’가 열리면서 무너졌다. 더 이상 극한의 고성능·고품질 D램이 필요 없어진 것이다. 1983년 ‘도쿄 선언’으로 메모리 사업 진출을 선언한 삼성전자는 이런 변화를 간파했다. 제품 수명과 품질을 낮추는 대신 나머지 자원을 원가 경쟁력 확보에 투입했다. 최고 성능과 품질만 고집했던 일본은 원가 경쟁력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삼성전자는 메모리 신흥 강자로 올라섰다.
그런데 최근 삼성전자의 아성도 AI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흔들리고 있다. 메모리 업계 만년 2위였던 SK하이닉스가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 먼저 치고 나간 것이다. 엔비디아도 SK하이닉스 제품을 사용할 정도다. 시장조사 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작년 1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D램 시장점유율 차이는 19.5%포인트였지만, 반년 만인 3분기에는 4.6%포인트까지 좁혀졌다. 일본 닛케이는 올해 1월 ‘삼성전자의 1위가 흔들린다’는 기사에서 “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뼈아픈 결과”라고 꼬집었다.
AI 합종연횡 속 한국의 활로는
AI 반도체 시대의 승자는 누가 될까. 당장은 엔비디아가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불확실하다. 엔비디아 주요 고객사인 빅테크들이 자체 AI 반도체 개발에 나서며 ‘반(反)엔비디아’ 생태계를 구축 중이다. 오픈AI는 7조달러(약 9219조원)에 이르는 자금을 조달해 자체 AI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고, 구글은 지난해 자체 AI 반도체 ‘텐서 프로세싱 유닛(TPU)’을 공개했다.
반도체 기업 간 합종연횡도 활발하다. 삼성전자는 ARM과 차세대 시스템온칩(SoC) 설계 자산(IP) 최적화를 위해 손을 잡았고, SK하이닉스는 TSMC와 차세대 HBM 개발에 협력하기로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자체 개발 AI 반도체 ‘마이아’ 생산을 인텔에 맡기기로 했다.
각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면서 양상은 더 복잡해지고 있다. 올해 2월 파운드리 사업 강화 전략을 발표한 인텔의 행사장에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이 등장해 “미국이 글로벌 반도체 생산을 주도해야 한다. 반도체 지원법이 추가로 필요할 수도 있다”고 밝힌 게 대표적이다. 2021년 파운드리에 재진출했지만 실적이 부진한 인텔은 이번 행사에서 AI에 특화한 파운드리를 내세워 2030년까지 세계 2위 파운드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삼성전자를 제치겠다는 것이다.
일본도 정부가 직접 반도체 재부흥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TSMC가 2월 구마모토현에 세운 1공장과 착공 예정인 2공장에 일본 정부는 총 1조2000억엔(약 10조7000억원)을 보조금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반도체 컨소시엄 라피더스는 최근 캐나다 텐스토렌트와 AI 반도체를 공동 개발하고 2028년부터 양산하겠다는 계획이다. 대만은 TSMC를 내세워 2027년까지 1000억대만달러(약 4조2000억원)를 투입해 ‘대만판 실리콘밸리’를 만들 예정이다.
한국도 AI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AI 반도체 산업의 핵심인 팹리스 분야를 강화해 ‘한국형 엔비디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2026년까지 24조원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 도약 프로그램’ 을 마련하기로 했다. 현재 3% 수준인 글로벌 시스템 반도체 점유율을 2030년 10%로 높이겠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시설 투자와 인재 육성을 한국 반도체 산업의 활로로 꼽았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시설 투자가 적절한 타이밍에 이뤄져야 한다” 며 “새로운 반도체 패러다임을 이끌 이공계 인재도 더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GPU(Graphics Processing Unit) 컴퓨터 영상 정보를 처리하거나 화면 출력을 담당하는 그래픽 처리용 반도체. 명령어를 입력 순서대로 처리하는 CPU와 달리, 동시에 여러 작업을 처리할 수 있다. 대규모 연산이 필요한 AI 심층 학습(딥러닝)에 GPU가 강점을 지닌 이유다.
HBM(High Bandwidth Memory)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데이터가 지나가는 통로의 폭(대역폭)을 넓힌 메모리 반도체. 데이터 처리 속도가 빨라 GPU와 맞물려 AI 성능을 높이는 데 쓰인다. SK하이닉스가 2013년 처음 개발했다. 최근엔 HBM에 이어 차세대 메모리 기술로 컴퓨팅익스프레스링크(CXL)가 떠오른다. CPU, GPU 등 여러 장치와 메모리를 연결하는 통합 인터페이스 기술이다.
NPU(Neural Processing Unit) AI 계산을 위해 인간의 뇌 신경망(Neural)을 모방한 시스템 반도체. CPU, GPU처럼 범용성은 떨어지지만, AI 연산에 특화된 게 특징이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반도체(FPGA), 주문형 반도체(ASIC), 인간 뇌에 있는 신경세포와 연결 고리 구조를 모방한 뉴로모픽(Neuromorphic) 등이 차세대 NPU 종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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