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LG와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 마운드 앞에서 투수 김용수와 얼싸안으며 우승의 기쁨을 나눈 이가 포수 김동수였다. 그 둘은 올해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시구와 시포를 맡았고(시타는 유지현 전 감독), LG는 1994년 이래 29년 만에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LG가 1994년에 우승한 후 다음 우승이 이렇게 오래 걸릴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 한국시리즈에서도 고비는 있었는데 그걸 잘 넘기니까 29년 만에 우승했고, 팬들이 진짜 좋아하는 걸 보면서 애틋하고 짠한 마음이 들었죠.”
지난 11월에 모교인 서울고 사령탑에 오른 김동수 감독의 말이다. 김동수 감독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한 시대를 대표하는 포수’로 명성을 떨쳤다. 서울고 2학년 때부터 청소년대표에 선정됐고, 3학년 때도 청소년대표에 뽑혔다. 이후로도 태극마크의 단골손님이 돼, 많은 국제대회 경험을 쌓았다.
“서울고 1학년 때, 3학년에 고정식 선배님(현 중앙대 감독)이 있어서 경기에 뛰지 못하다가, 선배님이 청소년대표에 뽑혀 제가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을 겸한 서울시장기에서 마스크를 썼어요. 그러면서 최우수선수상이랑 타점상 등 4관왕을 받았을 거예요. 그런 활약을 펼쳐 2학년 때부터 주전 포수가 됐고, 대통령배랑 봉황대기에서 우승했어요. 또 3학년 때도 2관왕(대통령배·청룡기)에 올랐죠. 공교롭게도 저보다 더 잘한 형이나 동료가 있었는데, 제가 4개 대회 모두 최우수선수상을 받았어요. 그게 제가 선수 생활하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됐어요. 자신감으로 이어졌으니까요.”
“2, 3학년 때 청소년대표를 했고, 서울고를 졸업하기 전에는 팀동료인 이용호랑 부산고 박동희랑 함께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하는 국가대표 상비군에도 고교 선수로 뽑혔어요. 한양대에서도 1학년 때는 간간히 경기에 출장하다가, 2학년 때부터 거의 주전으로 뛰면서 국가대표에 자주 선발됐죠. 국제대회 경험, 즉 외국의 빠른 공 투수를 상대해 본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아무래도 당시 우리나라 투수 가운데 공이 빠른 투수가 드물었는데, 국제대회에서 그런 투수를 자주 상대해 보니까, 예를 들면 (박)동희의 빠른 공에도 대처할 수 있더라고요. 또 프로에 가서도 빠른 공 적응은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출전하는 등 아마 최고 포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1990년 LG에 1차 지명돼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첫 해부터 주전 마스크를 썼고 LG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왕과 골든글러브까지 받아 신인으로 더할 나위 없는 시즌을 보냈다. 이후로도 삼성과 SK(현 SSG), 그리고 현대-히어로즈에서 20시즌을 뛰며 통산 2,039경기에 출장해, 타율 0.263, 1,556안타, 202홈런, 871타점, OPS(출루율+장타율) 0.769 등을 남겼다. 우승반지도 4차례(1990·1994·2003·2004) 수집했고, 골든글러브도 7차례나 수상했다.
“제가 자기 관리에 신경을 좀 많이 썼어요. 지금도 담배는 피우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개인 연습하고, 그런 생활을 루틴처럼 반복했어요. 그리고 크게 다친 적이 없는 것은 부모님에게 진짜 감사하게 생각하죠. 작은 부상은 있어도, 제가 크게 다친 게 1991년에 왼쪽 무릎을 다친 거랑 SK 시절에 종아리 근육을 다친 것 외에는 없어요. 큰 부상 없이 꾸준히 경기에 출장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튼튼한 몸을 물려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은퇴 후로는 넥센과 LG에서 퓨처스 감독을 비롯해 수석·배터리 코치, 스카우트 총괄 등 다양한 보직을 경험했고, 국가대표 코치도 여러 차례 선정됐다. 또 2022년부터 올해까지 SBS스포츠 해설 위원으로 활약하며 필드 밖에서 야구를 차분히 고찰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모교인 서울고 감독을 맡아 첫 사령탑에 올랐다. 이에 ‘머니피치’에서는 김동수 감독을 만나 그의 야구철학을 들어봤다.

'포수 중의 포수' 김동수가 말하는 포수
“제가 포수가 된 이야기는 100번도 더 한 것 같은데(웃음), 제가 화곡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부가 창단했어요. 그러면서 테스트를 받았죠. 이전부터 형이랑 캐치볼 하며 놀려고 일반 글러브랑 포수 미트를 샀거든요. 그래서 일반 글러브랑 포수 미트를 갖고 테스트를 받으러 갔더니, 포수 미트가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포수를 시작하게 됐고, 줄곧 야구를 하면서 다른 포지션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리고 강남중학교에 진학했는데, 강남중학교도 막 창단한 팀이었어요. 제가 1학년으로 들어갔을 때 3학년이 되는 형들이 2학년일 때 창단했고, 때마침 팀에 포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1학년 때부터 ‘강제’ 주전 포수가 된 거죠. 서울고에 가서도, 1학년 때 잠시 경기 출장 경험을 쌓고 2학년 때부터 주전이 됐고, 한양대에서도 2학년 때부터 3년간 주전 마스크를 썼죠.
잘 아시다시피 그때는 포수 출신 지도자가 아마추어에 거의 없었잖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포수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하루 종일 공만 받았죠. 투수들 공 받다가 해가 떨어질 때쯤 집에 가야 하니까 타격 몇 번 하고 끝나거나, 먼저 타격 몇 번하고 해질 때까지 공을 받거나 했어요.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포수가 저 혼자밖에 없으니까요.
결국에는 제가 포수로 갖춰야 할 기술 등을 몸으로 부딪혀가면서 배운 거예요. 제대로 가르쳐 준 지도자가 없으니까요.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겠죠. 그런 과정에서 좌절하거나 실망도 했지만, 항상 포기하지 않고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건지, 운이 좋은 건지 상복도 있었고 태극마크도 달면서 자신감이 생긴 거죠.
국제대회 경험도 컸어요. 국내에서 잘한다는 포수는 물론이고, 미국이나 일본 등의 포수가 어떻게 하는지 눈의 배울 수 있는 기회니까요. 타격도 마찬가지죠. 청소년대표든 국가대표든 동시기에 가장 잘하는 선수들이 모이니까, 알게 모르게 배우는 게 많아요. 그러고 나서 프로에 가서 배터리 코치님들에게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배웠죠.
선수로만 포수를 프로와 아마를 합쳐서 32년이나 했네요. 배터리 코치도 5년 했고, 국가대표 배터리 코치도 5차례 했으니까, 순수하게 보직으로만 봤을 때 포수 관련해서 37년이나 한 게 되네요. 흔히들 40세를 불혹이라고 하잖아요. 공자님이 한 말인데, 심지가 굳어져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포수와 관련해 저만의 견해가 정립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겠죠.

제가 오랫동안 포수를 한 만큼 ‘포수란 무엇이냐?’를 질문을 많이 받아요. 흔히들 ‘그라운드의 사령관’이나 ‘필드의 감독’ 등 여러 표현을 쓰는데, 저는 바다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바다는 모든 걸 포용하죠. 물이 모여 강이 되고, 그 강이 흘러들어 바다가 되는데 그 모든 물을 다 받아요. 이만큼 찼으니까 그만 받겠다고 거부하지 않잖아요. 그처럼 포수는 포용력이 있어야 해요. 투수가 잘 던지지 못해도 그걸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바다는 항상 포용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잔잔하다가도 큰 파도가 칠 때도 있죠. 그처럼 때로는 포수가 투수를 끌고 가야 할 때도 있어요. 투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서는 제 주장을 밀고 나가야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포수는 기본적으로 어머니처럼 포용할 줄 알아야 하지만 때로는 강한 면모도 있어야 하죠.
어쨌든 요즘에는 포수 레슨을 받거나 아마 야구에도 포수 출신 지도자가 꽤 있지만 프로에서 잘 안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본기 부족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경기와 관련한 연습만 하는 경향이 있어서 기본적인 요소가 잘 갖춰진 선수가 드문 것 같아요.
일본 프로야구에선 포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그래서 신인 포수가 들어오면 1년 동안 캐칭만 시키는 팀도 있어요. 공을 잘 받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 캐칭이 되어야 다른 것을 응용할 수 있고요. 송구도 캐칭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틀림없고요. 또 블로킹이나 송구 연습 등 기본적인 걸 튼튼하게 해야 다음 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좀 급한 것 같아요. 기본을 대충 하고 다음 단계,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속성 과외를 하듯이요. 그래서 얼핏 보면 전체적인 그림(형태)이 괜찮은 것처럼 보여도, 실제론 잔실수가 많이 나오죠.
그런 점에서 포수는 참을성과 체력도 필요해요. 프로에서 포수의 수비 연습량은 엄청나거든요. 그걸 거부하지 않고 해내려면 인내와 체력은 필수죠. 타고난 강한 어깨도 필수 조건이고요. 다만 저는 폼을 건드는 것에는 신중해요. 타격도 투구도 선수마다 특성이 있잖아요. 그게 너무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그 선수가 그 폼으로 오랫동안 해오며 거의 완성된 거라서, 그것을 크게 수정하는 것보다 그 선수의 장점을 찾아주고, 살리는 방법을 고민해서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사실 선수 단점은 슬쩍 봐도 쉽게 보여요. 근데 장점은 오랫동안 관찰해야 해요. 게다가, 그 장점이 단점과 연결되어 있을 때도 있어서, 쉽게 단점을 수정하려고 하다가 보면 장점도 잃게 되는 사례가 적지 않아요. 미국은 2개의 단점이 있고 8개의 장점이 있으면 그 8개의 장점을 살려주려고 하죠. 반면, 우리는 2개의 단점도 장점으로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다가 장점마저 잃고 선수 생명이 끊기는 사례도 나오는 거죠.”

감독 김동수가 이야기하는 지도자론
“돌이켜보면, 현역 시절에 지도자를 하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된 시기가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이광환 감독님을 만난 거죠. 이광환 감독님은 무조건 저에게 맡기셨죠. ‘네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해봐라’는 식으로 벤치에서 거의 사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선수를 믿어주는 힘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고요.
또 이광환 감독님은 코치는 선수가 연습하는 데 있어 도와주는 역할이라는 걸 강조하셨어요. 연습 준비를 코치가 다하고 선수는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 거죠. 그걸 프로 코치 때도 그렇고, 서울고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해요.
요즘은 추우니까 실내연습장에서 타격 연습을 하는데, 제가 배팅볼을 던져주고 그러거든요. 사실 프로에서는 당연한 거잖아요. 프로에서는 감독이든 코치든 여유가 있으면 배팅볼을 던져주는데, 아마추어에서는 드문 상황이라서 그런지 선수들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배팅볼 던져주는 게 별것 아닌 것이지만 감독이 손수 해주면 선수도 연습에 조금 더 신경 써서 할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 작은 차이가 쌓여 큰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다른 하나는 삼성과 SK 시절에 벤치 멤버와 퓨처스 생활을 해본 거예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저는 아마추어 때도 그렇고 LG에서도 성적이 부진했을 때는 있지만 항상 주전으로 활약했어요. 그런데 삼성이랑 SK에선 선발로 나서지 못한 채 벤치에 앉아 있거나 퓨처스에서 보냈죠.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 기간이 있어서 주전이 아닌 선수의 마음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됐죠. 그게 지도자가 돼 선수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됐어요.
사실 2002년 시즌이 끝난 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려고 했어요. 근데 김재박 감독님이나 김용달 코치님, 정진호 코치님이 현대에서 다시 한번 해보자고 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마음은 많이 내려놨죠. 그때 현대에 강귀태랑 이택근이 있었으니까, 저는 백업으로 몇 경기 뛰는 역할을 기대했을 것이고, 저 역시도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근데 강귀태가 다치고 이택근도 포수로 쉽지 않은 상황이 되면서, 경기에 나갔는데 너무 잘 되는 거예요. 그해 처음 타율 3할(0.308)을 기록했으니까요. 그러면서 7년을 더 선수로 뛰었고, 우승도 2차례 하게 됐죠.
제가 전체적으로 보면 항상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처럼 보여도 나름 굴곡이 있었어요. 다른 야구인이 보면 그 정도는 굴곡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심적으로 힘들었고,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 아픔도 겪으면서 제 자신이 좀 단단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게 지도자 생활에도 도움이 됐고요.

2년간 해설을 하다가, 모교 감독이 됐는데, 저한테는 너무나도 큰 영광이죠. 모교 감독이란 자리는요. 졸업한 후에도 자주 학교에 왔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좋았어요. 교문에 들어오면 옛날 생각도 나고 후배들을 보는 것도 즐겁고요. 그런데 이제는 단순히 선배가 아니라 감독이 됐으니까, 책임감을 갖고 선수들을 지도하려고 해요.
참, 2018년에 스카우트 총괄을 경험한 것도 지금뿐만이 아니라 지도자 생활에 도움이 됐어요. 아마추어 현실은 물론이고, 고교와 대학 선수의 생각이나 기량 등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프로 선수와 학생 선수는 강조해야 할 점이 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저는 기술적으론 기본기를 중점적으로 가르쳐 몸에 익도록 하려고 해요. 프로에 있을 때 기본기가 안 되어 있어서 ABC부터 가르친 적이 많아, 적어도 서울고 출신 선수는 ABC가 아닌 그다음 단계부터 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또 인성교육에도 힘을 쏟으려고 해요. 기본적인 예의범절처럼 학생 선수다움을 많이 강조하고 있어요.
요즘 선수들은 제가 학교 다닐 때랑은 생각이나 그런 게 많이 다르죠. 제가 올해 초에 KBO가 유소년 선수를 육성하기 위한 넥스트 레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타격 영상을 분석해 맨투맨 맞춤상담을 했어요. 거기서 선수들과 이야기하는데 예전이라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감독이나 코치에게 말을 못 했잖아요. 근데 요즘은 건의사항이 없느냐고 하니까 다 들어주지 않더라도 할 말은 다하더라고요.
제 막내아들이 중학교 3학년이라서 아들이랑 대화하고 그런 것도 선수들을 이해하는데 좀 도움이 되고요. 어쨌든 선수들과의 접점을 제 나름대로 넓혀가려고 해요. 한 번은 학교 급식을 함께 먹은 적도 있거든요. 선수들은 감독이 자기들과 함께 먹으려고 하니까 살짝 놀라면서 긴장하더라고요. 격의 없이 다가가려고 한 거지만 선수들이 불편한 점도 있을 것 같아서 매일 같이는 못해도 종종 함께 밥 먹고 하려고요. 매일 같이 먹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랬다가 체하는 선수가 나와서는 곤란하잖아요(웃음).
그런 것 같아요. 감독이, 코치가 선수에게 소통하자고 말한다고 해서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이야기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노력이 쌓여 신뢰가 형성되면 소통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지도자와 선수 간에는 믿음, 신뢰가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그 신뢰는 시간이 필요하고요. 그리고 선수들이 졸업한 후에 야구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준 선배가 있었다고 생각해 주면 제일 기쁠 것 같아요.
저는 선수들에게 학교 다닐 때는 감독이지만 졸업하면 선배죠. 그런 지도자가 되려고 합니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김)용수 형이랑 함께하니까 기분이 좋더라고요. 근데 사실 1994년에 우승할 때는 긴장이 안 됐어요. 1점 차에 주자가 2루에 있었지만 용수 형이 워낙 잘 던졌으니까요. 그냥 우리가 여기서 우승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시구랑 시포할 때는 긴장이 많이 됐어요. 혹시 용수 형이 잘못 던지면 그걸 잡을 수 있을까, 아니면 던졌는데 공이 보이지 않아서 못 잡으면 어떻게 하지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 짧은 순간에요. 다행히 걱정과 달리 무난하게 끝나서 한숨을 돌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