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쇠라고 소문났는데 500억이상 재산 기부한 탑배우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짜다’고 소문이 났더라고요. 짜장면만 산다고. 하하. 제가 짜장면을 좋아해서 산 건데 그렇게들 말하더라고요. 오해예요. 오래전부터 돈은 죽기 전에 좋은 데다 다 쓰고 가자는 생각을 했어요. 제 기부는 이제 시작입니다.”

1928년 황해도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신영균은 서울대 출신 치과의사, 사업가, 배우로 다양하게 활동했습니다. 영화 '과부'를 통해 데뷔한 후, 영화 '연산군' '5인의 해병', '대원군' 등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이후 1978년 영화 ‘화조’를 끝으로 충무로에서 은퇴했습니다.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3회 수상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금주, 금연, 여색, 도박 평생 멀리하고 살아/ 서울대 출신 치과의사서 영화배우 데뷔하며 '연극 열정 끊질 못해'/치과의사, 톱스타, 사업가, 국회의원까지 '영화 같은 삶'”

사업에도 수완이 있어 1963년 서울 금호동에 금호극장을 인수해 새로 개관했습니다. 198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명보소극장을 차렸습니다. 명보소극장 옆 명보제과를 인수해 부인 김선희 여사와 함께 뉴욕제과, 태극당, 풍년제과 등 당대 4대 제과업체로 키워냈습니다. 1973년 빌딩관리업체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해 부동산 입대산업, 1992년 맥도널드사와 합작회사 '맥신산업'을 설립했습니다.

본격적인 기부는 2006년 즈음 시작했습니다. 당시 50년 뒷바라지해 준 아내를 위해 자녀들과 함께 금혼식을 성대하게 준비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텔에서 하고 어쩌고 하면 억대가 들겠더라고요.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나누자고 마음을 먹었죠. 가족들도 다 좋다고 해서 금혼식을 취소하고 불우이웃 돕기에 1억 원을 기부했죠.”

이전에도 어려운 동료 배우를 위해 몰래 지갑을 자주 열었습니다. 하지만 ‘신영균은 구두쇠’란 소문이 충무로에 쫙 퍼졌습니다. 아들 신언식 씨는 “검소하고 낭비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통 큰 기부가 이어졌습니다. 2010년 500억 원 상당의 명보극장과 사재 100억 원이 들어간 제주의 영화박물관을 기증했습니다. 모교인 서울대, 명예박사 학위를 준 서강대에도 수십억 원을 기부했습니다. 각종 구호 성금, 탈북 학생 장학금 등에도 수십억 원을 내놨습니다.

현역 당시 한국영화인협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 각종 단체 대표를 맡았던 그는 은퇴 이후 정계에도 진출해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2004년 정계 은퇴 및 불출마를 공식선언하며 문화예술계 사업에 힘을 쏟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2010년 제3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공로영화인상, 2011년 대한민국 대중문화 예술상 은관문화훈장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신영균은 재산 기부 소식을 들은 가족의 반응이 어땠냐는 질문에 "명보극장을 사회에 환원하고 나서 굉장히 행복해했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손녀가 미국에서 전화를 했는데 '할아버지 정말 멋쟁이'라고 하더라. 그 소리를 듣고 행복했다"고 밝혔습니다.

“혼자서는 못 해요. 가족도 동의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기부한다고 하면 자식들이 찬성해 주고, 또 아들이 기부하자고 먼저 말 꺼내면 제가 호응해 주고 그래서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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