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에서 날아온 크로스. 이에 맞춰 그는 날아올랐다. 점프한 채 때린 시저스킥. 그대로 골망에 꽂혔다.
29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 K리그1 FC서울과 대구 FC의 경기. 1-2로 지고 있던 FC서울의 7번 정승원이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다. 정승원은 골을 넣은 후 갑자기 '역주행'했다. 자신의 골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대구 FC를 응원하기 위해 원정온 서포터들을 향해 귀에다 손을 대는 세리머니를 했다. 쉽게 말해 '욕하려면 더 욕해보라'는 도발 세리머니였다.
대구FC는 정승원에게 친정팀이다.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뛰었다. 이후 수원 삼성(2022년, 2023년), 수원FC(2024년)를 거쳐 현재 FC서울에서 뛰고 있다. 정승원은 친정팀을 상대로 골로 첫번째 비수를, 그리고 도발적 세리머니로 두번째 비수를 꽂았다. 대구 FC 선수들은 정승원에게 달려들었다. FC서울 선수들도 이를 막기 위해 대응했다. 이른바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다. 양 팀간 선수들의 몸싸움과 대치는 시간이 지난 후 마무리됐다. 대구 FC 팬들이 모인 원정석에서는 엄청난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다. FC서울 팬들은 이에 대응해 "정승원"을 외쳤다.
이 사건이 있은 후 FC 서울 선수들은 집중력을 발휘했다. 후반 추가시간 문선민이 역전골을 넣었다. FC서울은 3대2로 승리했다.
이 경기는 여러가지 이슈들로 가득했다. FC서울의 대역전극, 제시 린가드가 PK로 한 골을 넣고, 또 다른 PK는 실축한 것. 새로 깐 잔디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정승원의 세리머니를 넘어서지 못했다.

#바티스투타
축구계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친정팀을 상대할 때 골을 넣은 후 세리머니를 최대한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룰은 2000년 10월 26일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때문에 생겼다. 바티스투타는 피오렌티나에서 9시즌을 뛰었다. 그러나 2000~2001시즌 피오렌티나를 떠나 AS로마로 이적했다. 피오렌티나는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바티스투타를 이적시켰다. 바티스투타는 여러 팀을 고민하다 우승을 하기 위해 AS로마로 이적했다.
그리고 그 날 AS로마와 피오렌티나가 격돌했다. 바티스투타는 이 경기에서 유일한 골을 넣었다. 평소 기관총 세리머니를 하던 바티스투타는 골을 넣은 후 멍하니 서 있었다. 기뻐하기는 커녕 눈물을 흘리며 망연자실해했다. AS로마는 1대0으로 승리했다.
경기 후 바티스투타는 "나는 직업적으로 최선을 다해야 했고, 골을 넣었지만... 마음은 무너졌다. 세리머니는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세계 축구팬들과 미디어들은 열광했다.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후 많은 축구 선수들은 친정팀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어도 세리머니를 자제했다. 하나의 매너로 받아들여졌다.

#아데바요르
그로부터 9년 후. 바티스투타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선수가 나왔다.
엠마뉘엘 아데바요르.
2009년 9월 12일 영국 맨체스터 에티하드 스타디움. 맨시티와 아스널이 프리미어리그 5라운드에서 격돌했다. 2-1로 맨시티가 이기고 있던 후반 34분. 아데바요르가 골을 넣었다. 그는 골을 넣자마자 그대로 뒤로 향해 달렸다. 반대편 끝에 있는 코너 플래그 앞까지 달렸다.
그리고 슬라이딩 세리머니.
아데바요르 바로 앞에는 원정 응원을 온 아스널 팬들이 있었다. 아스널 팬들은 아데바요르를 향해 물병을 던지고, 온갖 욕설을 했다. 몇몇은 피치 위로 뛰어들려고 했다. 안전 요원들이 필사의 몸짓으로 이들을 막아섰다.
아데바요르는 2005~2006시즌부터 2008~2009시즌까지 4시즌 동안 아스널에서 뛰며 142경기 출전 62골을 넣었다. 그러나 아데바요르는 아스널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주급 문제로 불만이 많았다. 각종 불화설과 이적설이 불거져나왔다. 결국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은 아데바요르를 이적시키기로 했고, 2009년 여름 맨시티로 이적했다. 아데바요르와 아스널 구단 그리고 팬들의 사이가 좋을리 없었다. 그 결과가 역주행 세리머니였다.
시간이 지난 후 아데바요르는 이 사건에 대해 아스널 팬들이 자신의 부모에 관해 인종차별적인 노래를 부르고 욕설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6년이 지난 지금에도 친정팀 상대 도발 골세리머니의 대표격으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이것이 축구
정승원의 역주행 세러머니는 분명 이례적이다. 그리고 도발적이다.
K리그는 다른 유럽 리그에 비해 체면과 예의를 더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리그 전체의 강렬함은 다소 부족하다.
정승원의 세리머니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박창현 대구FC 감독은 "동점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서포터스석까지 가서 세리머니를 한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대부분의 선수가 친정 팀을 상대로는 세리머니를 자제하지 않나. 물론 선수 본인의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는 옳지 않다고 본다"며 비판했다.
김기동 FC서울 감독은 "(정)승원이가 볼 잡을 때마다 그 쪽에서 대구 팬들에게 야유를 받았다. 감정적으로 골 넣고 싶은 생각이 컸던 거 같다. 마지막까지 집중력 끌어냈다. 그 부분은 승원이와 얘기해봐야겠지만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감정이었던 것 같다"고 옹호했다.
정승원과 대구 FC는 악연으로 얽혀있다. 2020년 시즌 연봉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2021년에는 당시 방역 위반 의혹까지 터졌다. 결국 2022년 수원 삼성으로 이적했다. SNS 조롱성 게시물 사건이 터졌다. 수원 삼성 소속으로 나선 대구 FC전에서도 거친 파울을 주고받는 등 갈등을 겪었다. 정승원과 대구 FC. 서로간 분명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다만.
축구의 본질 그대로이다. 축구는 갈등이다. 서로를 파괴해야 한다. 몸싸움은 필수다. 휘슬이 울리면 서로 반목하고 부딪힌다.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몸싸움이 없는 스포츠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원초적 욕망의 충돌이다.
이 과정에서 스토리가 나온다. 대구FC를 향한 정승원의 도발. K리그 역사에 남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스토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