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노포기행] 장충동 족발 노포 뚱뚱이할머니족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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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된 거예요.”
귀를 의심하게 만든다. 족발 끓이는 양념의 역사다. 이를 보통 ‘씨육수’라고 한다. 육수에 족발을 넣어 삶고 끓이면 육수가 족발에 배게 된다. 점차 그 양이 줄어든다. 다시 육수 양념을 만들어 넣는다. 이런 식으로 매일 여러 번, 수십 년이 흐르면서 가장 농축된 육수가 일부는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이것이 장충동 뚱뚱이할머니족발 맛을 이끌어간다.
무얼 넣는가 곰곰이 주방을 살펴보는데도 별 게(!) 없다. 간장, 마늘, 파 등속의 기본적인, 누구나 알고 있을 그런 양념이다. 결국 씨육수가 큰 힘을 낸다. 오죽하면 만화 〈식객〉에서는 장충동족발골목을 무대로 씨육수를 몰래 빼돌리는 장면을 에피소드로 만들어 넣었다.
“좋은 족발이 중요해요. 비싸게 주고 좋은 놈만 받아요. 많은 양을 사니까, 오래된 거래처니까 좋은 걸 줍니다. 서로 믿고 하는 거죠. 질이 안 좋으면 바로 알아요. 족발은 별다른 양념이나 부재료가 없으니 맛이 그대로 노출되지요.”
주인 김제연 씨(69세)의 말이다. 보통 한약재니 된장이니 오향이니 하는 걸 넣는다고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 건 넣을 필요 없어요. 가게마다 자기 방식이 있는데 우린 넣지 않습니다. 족발 자체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뚱뚱이할머니족발은 선대인 할머니 전숙열 씨(2021년 작고)가 문을 열었다. 현 사장인 김제연 씨가 함께 할머니와 가게를 일구었고, 현재는 3대에 이르고 있다.
족발 한 접시를 청했다. 쫄깃한 껍질과 야들야들한 젤라틴과 지방층, 그 아래 고소한 고기가 씹힌다. 족이란 것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체중을 지탱하며 이동하는 부위라 뼈, 인대, 지방, 근육 등이 얽혀 있다. 그걸 가장 맛있게 삶는 법을 개발한 인간은 위대하다. 썰어놓으면 부위마다 맛이 다르다. 그게 족발의 매력이다.
“문제는 맛이 잘 변해요. 그래서 삶아서 한 김 빠진 걸 최고로 칩니다.”
다른 고기도 마찬가지이지만, 삶아서 오래 두면 맛이 나빠지는 게 보통이다. 족발도 삶아서 가급적 빠른 시간에 먹는 게 좋다고 한다. 이 집은 하루에 서너 번 이상 삶는다. 가장 좋을 때 손님에게 내기 위해서다. 주방의 솥은 아주 작은 게 여러 개다. 애초부터 자주 삶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반영한 구조다. 한창 경기가 좋을 때는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삶았다고 한다.
서울은 유명한 음식 골목이 많지만, 역사성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 장충동족발골목이다. 지금은 도시 가로 정비가 되고, 가게들 숫자도 줄어든 데다가 새로 건물을 단장해서 ‘골목’ 느낌이 덜하지만 월드컵 하던 무렵까지만 해도 왁자한 뒷골목의 느낌이 있었다. 장충동은 배후에 넓은 주거지를 끼고 있으며 동대문과 강남, 충무로를 연결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교통 요지이거나 오피스 밀집 지역이 아니어서 음식 골목이 들어설 조건은 아니었다.
“원래는 대폿잔 기울이는 근처 사람들이 많았지요. 나중에 유명해지면서 인근 회사원들, 멀리서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골목에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다녔어요.”
장충동 족발집의 탄생은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대폿집이었다. 이북에서 온 아주머니들이 생존하기 위해 철판 놓고 빈대떡을 부쳐 판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뚱뚱이할머니족발집은 당시 메뉴가 남아 있다. 넉넉한 덩치와 인심으로 뚱뚱이할머니로 불리던 고 전숙열 할머니는 해방 전에 월남하여 서울에 자리 잡았다. 나중에 서울과 한국의 전설이 된 족발은 우연한 계기로 탄생했다고 한다.
“저희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만들던 족발을 기억해서 요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맛을 찾아서 간장 넣고 파, 양파 넣고 해서 족이 나온 거죠.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족발 안주가 팔리기 시작했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처음에는 일반 안주를 팔다가 시작한 것이니까. 그러다가 이게 큰 히트를 친 거죠.”
지금 신세계건설 빌딩이 있는 자리에 족발집이 있었고, 현재 족발집이 몰려 있는 지역으로 족발집 거리가 형성되었다. 이 일대는 80년대 본격적으로 각광받았고, 가까운 장충체육관에서 농구 경기가 벌어지면 손님으로 미어졌다.
90년대 경제 호황기를 타고 24시간 영업하던 시대가 족발집에도 황금기였다. 심야에 동호대교를 타고 강남에서 사람들이 넘어왔다. 가까운 동대문 패션타운의 불야성도 도움이 됐다. 1990년대 시작된 국제통화기금 위기 사태로 국가 경제가 대혼란에 빠졌을 때, 족발 골목은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렸다. 이 일대 가게들이 매출 신기록을 연일 경신했다고 한다. 족발 하나 놓고 서너 명이 2만 원이면 배를 불릴 수 있었으니, 주머니 가벼운 시대에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족발의 시대는 이제 더 확장되었다. 젊은 요리사들은 불족발이나 마라족발도 만든다. 우리는 정말 족발의 민족이다. 그 덕(?)에 세계에서 족발 원육 가격이 제일 비싼 나라이기도 하다. 뼈 무게가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부위인데, 돼지 엉덩잇살 같은 살코기보다 더 비싸다. 한국인의 미각은 정말 흥미롭다.
글ꞏ인터뷰 박찬일
사진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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