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만 존재하는 말이 있다 [수상한 말수의사]


'말' 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근육질 몸으로 어딘가를 질주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긴 다리로 초원을 달리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말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고, 사람을 태우고 리듬감 있게 뛰는 우아한 승마용 말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소개시켜주고 싶은 친구는 그들과는 다소 다르게 생긴 녀석이다. 그 말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며, 제주도에만 존재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말보다 훨씬 몸체는 작은데 머리는 또 크다. 게다가 다리는 짧은데 털은 포실포실하고 배는 불룩한 게 딱 귀염상이다. 심지어 이들은 무려 천연기념물 347호인 높으신 신분을 가지고 있다. 이름하여 '제주마(Jeju horse, Jeju pony)' 라 불리는 이 녀석을 오늘 한번 소개해볼까 한다.

내친소 : 내 친구 제주마를 소개합니다.

전 세계에서 경주마로 활약하는 말은 더러브렛(Thoroughbred) 품종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우리가 주로 상상하는 말의 이미지일 것이다. 또는 승마장에서 만나는 말들 역시 크기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크기의 거대하고 예쁜 모습이며 대부분 비슷한 몸태와 한정된 털 색깔을 가지고 있다. 긴 다리를 뽐내며 멋지게 달리는 더러브렛 품종을 천편일률적인 '바비 인형' 이라 비유한다면, 제주마는 는 말이 이렇게도 생기나 싶을 정도로 키도, 얼굴 크기도, 다리 길이도, 털색도, 눈 모양도, 갈기의 스타일도, 성격도 제각기인 '핸드메이드 인형'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실제로 제주마는 키가 약 125cm, 체중 약 280kg 정도로,  키(체고) 약 160 cm, 체중 약 480kg 정도의 더러브렛보다는 훨씬 자그마한 체구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요 녀석들끼리 경주도 한다. 이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광경이다. 얼마 전 제주마 경주를 처음 보는 친구가 말했다. "우와 귀여워라. 애기들끼리 달리기를 하네" 라 하며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허허.. 맞아. 귀엽지?" 라고 얼떨결에 동의하긴 했다.

그래. 뭐 외모로 보면 바비 인형보다는 못난이 인형이 귀여운 것은 맞으니, 첫인상이 '귀여움'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귀염상 외모에 숨겨진 이면에 대해 할말이 많은 나는 오늘 제주마에 대해서 낱낱이 공개를 해야겠다.

(위) 더러브렛 어미와 망아지 (아래) 제주마 어미와 망아지

나는 무던해

잘 생기다 못해 몸 선이 아름다운 경주마인 더러브렛(Thoroughbred) 품종은 그 우아한 겉모습과 달리 세상 쫄보다. 펄럭거리는 비닐봉지 하나에도 너무나도 놀라서 날뛰면서 내빼기도 하고, 쉽게 흥분하고 나대다가 몸을 다치기도 한다. 사실 정도는 다르지만 대부분 품종의 말들은 잘 놀라고, 겁이 많은 성질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반면에 제주마는 이들에 비해 잘 놀라지도 않고, 겁도 없는 편이다. 내가 제주마를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게, 몇 시간 동안 그냥 목줄 하나로 말들을 묶어두며 관리하는 모습이었다. 이건 더러브렛 품종만 돌보던 나에게 큰 문화 충격이었다. 만약 더러브렛 이었다면, 저렇게 줄 하나로 혼자 묶어두었을 때 놀랄 경우 혼자 날뛰면서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주마는 제주 토종의 말과 몽골말이 섞이면서 지금의 재래종 제주마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농경 생활에 밭을 갈 거나 수송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제주에서 돌밭을 갈고, 땅을 밟아주며 소 대신 말을 농작에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무던~~한 제주마의 성격 덕분이 아닐까 싶다.

편안한 제주마

명석한 옹고집쟁이

제주마는 머리가 좋고 고집이 세다. 동물의 지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내 경험으로도, 관리하시는 분들의 말씀으로도 제주마는 말 중에서는 꽤 머리가 좋은 품종으로 생각된다. 특히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오랫동안 기억하는 면에서는 다른 품종보다 제주마가 단연 돋보인다. 경주용 제주마는 경주 전후 도핑테스트를 위해서 주사기로 혈액을 채취해야 하는데, 이때 주사 경험이 적은 말은 대부분 저항을 한다.

그 실랑이 와중에서도 제주마는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관철한다. 목을 흔들어대고 몸으로 밀치면서 사람을 이겨내려는 녀석의 고집은 가끔 수의사와 관리사를 지치게 하기도, 위험하게 하기도 한다. 싫은 건 곧 죽어도 싫은 자유로운 영혼 제주마의 옹고집을 한번 보시게 된다면 '귀엽던' 이 녀석을 볼 때 찔끔 뒷걸음질 할 지도 모른다.

어느 날 제주마와 갓 태어난 망아지가 동물병원에 내원했다. 어미 말 조차도 평소 진료하던 커다란 말들보다 절반 이상 작은 미니 사이즈여서 모두들 귀엽다고 모여들었다. 뒤뚱거리는 듯한 토실한 엉덩이에 촘촘한 털조차 앙증맞게 보였다. 어미 말은 우리 모두의 호들갑에 아무 반응도 없이 그냥 가만히 눈만 꿈뻑일 뿐이였다. 그 모습에 방심한 게 죄라면 죄였다. 목에 위치한 혈관에 주사를 놓으려고 하는 순간 말은 머리를 흔들며 반항했다. 말의 움직임을 제한하려고 틀 안에 넣었더니, 그 틀을 아무렇지 않게 점프해서 넘어버렸다. 순간적인 반항과 점프력에 우리는 이 녀석을 귀여워할 수 없었다. 결국 여러 명이 조그마한 말에 전력을 다해 달라 붙어서야 진료를 마칠 수 있었고, 진료를 마친 후 말은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우아하고 얌전하게 퇴장했다.

어서 빨리 치료를 마치라고!

난 내구성도 좋다구.

제주마는 더러브렛에 비해 잔병치레가 없다. 사실 경주마는 전력 질주를 해야 하는 운동선수이다 보니, 크고 작은 다리의 부상이 직업병으로 따라온다. 하지만 다리 길이가 짧고 뼈대가 굵은 제주마는 경주 전후 생기는 다리 부상의 발생률이 현저히 적다. 또한 작은 체구 때문에 발굽 마모가 덜하여 경주용 제주마에게는 편자 (말발굽의 마모를 줄이기 위해 신기는 쇠 모양의 신발)를 신기지 않는다. 게다가 돌밭을 견디는 튼튼한 발굽을 가진 덕분에 발굽 질환 또한 더러브렛에 비해 매우 적다.

말의 질환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산통(배앓이)인데, 커다란 배 속에서 긴 내장의 일부가 꼬이거나, 가스가 차는 등의 이상이 배가 아픈 통증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말에서 산통은 비교적 발병률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제주마는 다른 품종의 말과 비교했을 때 산통(배앓이)의 발생률이 낮고, 장기가 꼬이는 것 같은 치명적인 응급 상황 또한 비교적 덜 발생한다. 아무래도 배 속의 공간이 큰 말보다는 훨씬 작다 보니, 그 안에서 내장이 꼬이거나 뒤집어지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덜하지 않을까 추정해보기도 한다.

이렇게 잔병치레가 없고 튼튼한 점이야말로, 말을 키우는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이득이 상당히 큰 매력적인 부분이다. 예전에는 산통이 걸려도 수술까지 의뢰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제주마들도 정밀 진단을 위해서 가끔씩 큰 병원에 내원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무래도 더러브렛 품종에 비해서는 병원에 훨씬 덜 오는 튼튼한 품종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산통(배앓이) 진료 후 회복중인 제주마

나를 만나려면?

제주마를 그럼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제주 축산진흥원에서는 순수한 제주마 혈통을 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제주마방목지'라는 장소에서 이들이 풀을 뜯어먹으며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조성해 놓았다. 이곳은 드넓은 초지에 수십 마리의 제주마가 한 곳에 모여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해서, 제주에서 들러야 할 명소로 손꼽힌다. 나 역시 이곳을 참 좋아한다.

제주마 방목지

보통 망아지가 태어나는 번식 철인 2~7월에는 어미 말 옆에 붙어 따라다니는 귀요미 망아지들도 볼 수 있고,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탁 트인 초지의 설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일단 제주를 대표하는 우리 제주마의 무리를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점만 해도 꽤 매력적인 것 같다. 방목 시기가 아닌 경우에는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도 제주 전역을 운전하다 보면 제주마를 한 번 정도는 스쳐 지나가며 볼 수도 있고, 제주 경마공원에서는 제주마끼리 달리는 경주를 직관할 수도 있다. 이렇듯 제주도에 숨겨져 있는 작고 털찐(털이 보송보송한) 제주마를 숨은 그림 찾듯 한번 눈여겨서 찾아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상 근육 미인은 아니지만, 귀엽고 고집 세고 튼튼하고 머리도 좋은 '내구성 최강 귀요미' 내 친구 제주마 소개를 마친다.

날 한번 찾아봐요.

#지식토스트

* 글쓴이 - 김아람

제주도에서 말을 치료하며 느끼는 수의사의 속마음과 재미있는 말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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