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람, 정혜윤 [인터뷰]

지금의 정혜윤은 그가 읽어온 책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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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 CBS 라디오 PD
·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PD대상 수상
·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불안] 등으로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수상

CBS 라디오 PD 정혜윤은 애독가다. 그러나 책을 ‘좋아한다’고만 말하기에는 어딘지 설명되지 않는 여백이 남는다. 그에게 책은 좋아함의 범주를 넘어선다. 삶의 일부이자, 곧 그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책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자신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변화와 사유를 [침대와 책], [삶을 바꾸는 책 읽기], [뜻밖의 좋은 일] 등 여러 독서 에세이를 통해 꾸준히 전해 왔다. 지난 10월 출간한 [책을 덮고 삶을 열다] 또한 그 연장선에 놓여 있다.
왜 그토록 책을 사랑하는지, 또 책 읽기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궁금해 연남동 북 살롱 ‘얼굴들’에서 열린 [책을 덮고 삶을 열다] 북 토크 현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정혜윤 PD는 책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환하고 빛나는 얼굴이었다.

‘책을 덮고 삶을 열다’라는 제목이 인상적이다.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나?
‘책을 덮고 삶을 열다’는 내 가슴속에 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 간직할 문장이기도 하다. 특히 ‘열다’라는 말이 참 좋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책을 덮고 자신의 삶을 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다. 나아가 하나의 문, 즉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어떤 가능성을 말하는 것인가?
변화할 가능성이다. 좋은 책은 읽는 이를 변화시킨다. 좋은 책과의 만남을 ‘사건’이라 칭하는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 여기서 사건이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질 만큼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산림 화재에 관한 책을 읽기 전에는 산불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사람이, 책을 읽고 나면 ‘어떻게 하면 숲을 지킬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즉 책을 읽기 전과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내가 읽어온 책과 뒤섞여 형성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대부분 말은 그동안 읽어온 많은 책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읽어온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정혜윤 PD가 [책을 덮고 삶을 열다] 독자에게 건네는 말. ©Den

언제부터 책을 좋아했나?
이런 질문을 받으면 여러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중 하나를 꼽자면, 대학 시절 수업이 없는 어느 평일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약속이 있어 혼자 남게 되었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 꺼내 든 책이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었다. 그러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생 문장이라 할 만한 글귀 하나를 만났다.
“거기에서는 슬픔이 가볍지 않고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고 사랑이 우습지 않으며 증오심이 맥없지 않고 사람들을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며 행복은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고 절망은 다뉴브 강으로 뛰어들게 만들며 그곳에서는 그러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고 아직 가치들이 유린되지 않았다.”
이 문장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전까지 나는 부, 출세, 성공 같은 것을 원했다. 정확히 말하면 원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책 속에는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질문을 던지고, 다른 것을 열렬히 원하는 사람이 있더라. 그게 좋았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나도 다른 걸 원하고 싶어졌다. 그 이후로 ‘이 작가가 지금 무슨 질문을 던지고 있지?’, ‘이 작가는 무엇을 원하지?’ 이런 물음을 가지고 책을 읽게 되었다.

끊임없이 질문하며 책을 읽는 것 같다
‘발 걸려 넘어지기’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문장은 곧바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 문장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럴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밑바닥부터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 그 충만함은 자연스레 질문으로 변한다. 거창한 질문은 아니다. ‘나한테는 뭐가 중요하지?’, ‘나는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무엇을 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이렇게 옆길로 새는 독서를 주로 한다. 다시 말해 일탈하는 독서다. 그러다 보니 절대 빨리 읽지 않는다. 한 문장 한 문장 오래 음미하고, 질문이 피어오르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한다. 책은 내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책을 읽는 동안 끼어드는 생각, 여기에 독서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걸리는 문장을 만났을 때, 기억하기 위해 특별히 하는 일이 있나?
주로 밑줄을 긋는다. 메모를 덧붙일 때도 있지만, 필사는 거의 하지 않는다. 메모할 때도 문장 전체를 옮겨 적기보다는 ‘내가 이 문장을 왜 좋아했지’,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참 좋다’ 이런 식으로 감상이나 떠오르는 생각을 간단히 적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문장을 자꾸 생각한다. 기록만 하고 다시 안 보는 게 아니라, 그 문장을 붙들고 계속 곱씹는다.

정혜윤 PD는 이날 북 토크에서 다섯 권의 책을 큐레이션했다. 맨 아랫줄 왼쪽부터 차례로 [바베트의 만찬], [그러나 아름다운],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아트풀], [작은 미덕들]. ©Den

읽을 책은 어떤 기준으로 고르나?
좋아하는 작가와 장르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고른다. 이탈로 칼비노, 배리 로페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 해외 현대문학 작가의 작품을 주로 읽는다. 나로선 생각지 못한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사물이나 현상을 통찰하는 능력과 이를 표현하는 문장의 힘에 감탄하며 읽는다.
그중에서도 배리 로페즈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을 읽는 데 능숙한 작가다.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랑할 대상을 마음속에 하나씩 더 품는 일과도 같다. 특히 그의 유작 [호라이즌]은 태평양, 갈라파고스, 남극, 호주,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여정을 바탕으로 자연의 경이와 생명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이다. 이러한 자연주의 문학을 읽고 나면, 책에 나온 수많은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좋아하는 작가나 장르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관심이 가는 주제를 먼저 찾고, 그에 대한 책 읽기를 권한다. 내가 무엇에 마음이 가 있는 상태인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내 경우엔 그것이 자연이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이 온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내가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어떤 유의 이야기를 좋아하나?
영국 작가 제프 다이어의 책 가운데 [그러나 아름다운]이라는 작품이 있다. 내용도 너무 좋지만, 무엇보다 제목 덕분에 이 책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처럼 나는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상처받을 수 있고, 슬플 수 있고, 또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나오는 순간이 있다. 바로 그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을 담은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는 나를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하게 할 힘이 있다.

한 번에 한 권의 책만 읽는 편인가, 아니면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편인가?
후자다. 그러다 보니 책 한 권을 완독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느리지만 꾸준히, 그리고 틈틈이 읽는다.

여러 권을 동시에 읽다 보면 내용을 기억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게 바로 좋은 점이다.(웃음) 그래서 다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읽고 또 읽는다.
다시 읽는 것이 왜 좋은가?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은 이야기를 접할 때 본능적으로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궁금해한다. 그래서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내용을 파악하는 데 집중해 자꾸만 책장을 빠르게 넘기게 된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진정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피는 것이다. 이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다시 읽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두 번째 읽기부터는 천천히 공들여 읽는다.
내가 몇 번이고 다시 읽는 책은 그저 한때 좋아했던 책에 그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며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존재들이다. 나는 그 책들과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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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갖는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하루에 한 번쯤은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거나, 깨끗이 샤워를 하곤 하지 않나. 내게 책 읽기는 ‘영혼의 샤워’와 같다. 하루의 많은 시간 동안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고, 하지 않았던 질문을 하고, 가보지 않았던 다른 세계로 가는 경험이다.
살다 보면 참 많은 일을 겪고 많은 감정을 느낀다. 수치심일 때도 있고, 상실감일 때도 있고, 실패에 대한 감정일 때도 있다. 이런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책은 언제나 말을 하고 있다. 인간이 겪는 온갖 일에 대해 계속 말하고 있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책 속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디오 PD로서 느낀, 라디오와 책의 공통점이 있다면?
라디오 PD로서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 사람과 함께 방송할 날이 있을지’를 자주 상상한다. 이는 곧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지?’와 같은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디오와 책은 맞닿아 있다. 책도 사실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해 열렬히 말하고 싶어 해서 탄생한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열렬히 살아 있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고, 사람을 살릴 수 있고,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바로 말이다. 우리 인생은 살아 있는 말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책을 읽고, 대화를 하고, 글을 쓰는 이유도 결국 살아 있는 말을 찾기 위해서인 것 같다.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영상 매체와 무엇이 다르다고 보나?
영상은 거의 보지 않는다. 아무런 노력 없이 가만히 있어도 교훈이나 웃음을 떠먹여 주는 콘텐츠에 대한 믿음이 없다. 개인적으로 그런 콘텐츠를 선호하지 않는다.
반면 책 읽기는 수고로운 일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상하게 만든다. 구름이 낀 하늘,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이런 장면을 마음속으로 그려야 한다. 나아가 ‘저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며 다른 사람의 감정에 이입하게 되고, ‘나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된다. 독서에 수반되는 모든 행위가 소중하다.

그러나 지금 책 읽기는 대중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텍스트를 읽는 것이 ‘힙’해진 시대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텍스트 힙’이라는 표현을 기사에서 많이 봤다. 그러나 그런 기사에 등장하는 ‘독서 인구의 증가’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다.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인류의 기원부터 이어져온, 너무나 오래되고 고전적인 행위다. 다만 지금은 책 읽는 사람이 워낙 적다 보니, 읽는 사람이 힙해진 것이다.
수 세기 전 사람들이 노을에 감동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글을 남겼다는 사실은 왠지 마음을 애틋하게 한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인간은 결국 인간이고, 불멸하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 안에 우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독서를 힙한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서는 인간성의 본질에 흠뻑 적셔지는 경험에 가깝다.
유행처럼 책을 읽는 분위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책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으려 하거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마음을 내는 일이다. 내게는 그런 순간이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온다.

ㅣ 덴 매거진 2025년 12월호
에디터 조윤주(yunjj@mcircle.biz)
사진 김동오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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