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 저녁 모인 가족 식사 자리에서 모시고 살라는 시누이의 말을 듣고 나는 조용히 서류 한 장을 식탁 위에 올렸다.
“시어머니 모시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라는 내 말에 순간 거실 전체에 정적이 흘렀고 남편도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방적인 희생이나 당연한 봉사를 요구받는 시절은 지났기에 나는 미리 작성해 둔 돌봄 생활 가이드라인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내가 제시한 서류에는 병원 동행과 식사 준비, 간병 수당과 휴무일 지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역할 분담 항목들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매달 들어가는 시어머니의 생활비와 병원비는 모든 자식이 똑같이 분담하고 주말 중 하루는 다른 형제들이 어머니를 모시기로 명시했다.
무조건 모시고 살며 온갖 살림을 홀로 감당하라는 식의 모호한 돌봄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내意志를 단호하게 전했다.

팔짱을 끼고 듣던 시누이는 가족끼리 정없게 무슨 서류냐며 화를 냈지만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정함을 유지했다.
모시는 사람에게 모든 짐을 넘겨두고 입으로만 효도하는 행태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사정을 설명하자 시형도 말문이 막혔다.
남편 역시 항상 중간에서 유야무야 넘어가려 했기에 명확한 규칙 없이는 어떠한 모심도 시작할 수 없음을 강력하게 경고했다.

처음에는 섭섭해하시던 시어머니께서도 오히려 명확하게 경계가 정해지니 마음이 한결 편하시다며 서류에 동의의 뜻을 표시하셨다.
서로의 정당한 권리와 의무를 문서로 작성하자 당연하게 여겨지던 나의 노고가 비로소 가족들에게 정당한 가치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형제들도 자신들이 분담해야 할 책임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억지 고함을 거두고 서명란에 이름을 써 내려갔다.

식사가 끝난 후 서명된 종이를 정리하며 나는 당당하고 합리적인 며느리로서 내 삶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지켜냈음을 느꼈다.
시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우리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의 첫발을 내딛었다.
희생만을 강요받던 가족 모임이 끝난 뒤 식탁 위에 남은 계약서는 우리 집의 건강한 돌봄이 시작되었음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