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4천억 플랫폼이 배구단을 산 이유

V리그 여자부의 구단주 교체는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례는 결이 다르다. 인수자가 제조업체도, 금융사도 아니다. 실시간 스트리밍 플랫폼이다.

SOOP(구 아프리카TV)이 5월 15일 한국배구연맹(KOVO)에 페퍼저축은행 AI페퍼스 인수 의사를 공식 전달했다. 연맹은 임시 이사회와 총회를 거쳐 인수를 최종 승인할 예정이다. 절차가 완료되면 V리그 여자부 7구단 체제가 유지된다. 외형적으로는 단순한 구원투수처럼 읽힌다. 하지만 이 인수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구단 존속의 문제가 아니다.

SOOP은 2025년 기준 연매출 4,038억 원, 영업이익 1,137억 원을 기록한 수익성 높은 플랫폼 기업이다. 월간 활성 이용자 수는 200만 명을 넘는다. 콘텐츠 사업 측면에서도 이미 e스포츠 구단 'DN SOOPers'를 운영 중이며, LCK·배틀그라운드 등 주요 리그의 중계 노하우를 축적해 왔다.

문제는 이 회사가 현재 시장에서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네이버 치지직이 e스포츠 월드컵(EWC) 3년 한국어 단독 중계권을 가져가면서 SOOP의 핵심 콘텐츠 영역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e스포츠 중심의 성장 전략이 흔들릴 수 있다는 신호다. 이 맥락에서 AI페퍼스 인수는 단순한 스포츠 투자가 아니라 플랫폼 다각화 전략의 일환으로 읽힌다. e스포츠 이외의 스포츠 콘텐츠 생태계를 직접 소유함으로써 중계권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구조다.

SOOP 측도 이를 명확히 했다. 회사는 "스포츠 중계·콘텐츠 제작 역량을 구단 운영과 연결해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구단 운영을 자회사인 숲티비가 맡는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콘텐츠 제작 주체와 구단 운영 주체를 분리함으로써 수익화 경로를 다양하게 가져가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V리그 여자부는 배구 종목 가운데 팬 커뮤니티가 가장 활성화된 리그 중 하나다. 선수 개인에 대한 팬덤이 뚜렷하게 형성돼 있고, 온라인 반응 속도도 빠르다. 이 구조는 SOOP의 채팅·후원·동시 시청 참여 기능과 결합했을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조건이다.

AI페퍼스 자체도 콘텐츠 소재로서 흥미로운 팀이다. 창단 5시즌 만에 처음으로 탈꼴찌(16승 20패, 2025-26시즌)에 성공한 팀이고, 광주 염주체육관을 거점으로 5년간 누적 관람객 17만 명을 모은 지역 기반도 있다. 리빌딩 과정의 서사, 연고지 밀착 팬덤, 창단 이래 꾸준히 쌓아온 지역 정체성은 콘텐츠 플랫폼 입장에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소재들이다.

그러나 인수 협상 과정 자체는 순탄하지 않았다. KOVO 규약상 신규 회원 가입에는 가입비와 배구발전기금 납부가 요구된다. 배구계에서는 당초 약 20억 원 수준의 가입비를 제시했고, SOOP은 이를 낮춰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연간 구단 운영비가 70억~80억 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첫 시즌만 100억 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하는 구조다. 수익성 지표가 탄탄한 기업이라 하더라도 첫해 부담은 분명히 크다.

SOOP이 가진 콘텐츠화 전략은 명확하다. 선수의 일상과 훈련, 팬 실시간 소통을 플랫폼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e스포츠 구단 운영 경험이 있는 만큼 선수 브랜딩과 온라인 팬덤 운영에서 기존 배구 구단보다 앞설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배구는 e스포츠가 아니다.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 참가조차 못한 상태로 시즌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고, 장소연 감독을 포함한 코칭스태프와의 계약도 모두 만료된 상태다. 콘텐츠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코트 위에서 경쟁력이 없다면 팬을 붙잡을 수 없다. 외국인 선수 운용 전략, 코칭스태프 재구성, 국내 유망주 육성 체계가 빠르게 갖춰지지 않으면 리빌딩은 또 한 번 장기전이 된다.

연고지 광주 유지가 유력하다는 점은 긍정적인 신호다. AI페퍼스가 5년간 광주에 만들어낸 150억~200억 원 규모의 경제 효과와 지역 팬 기반은, 새 구단주 입장에서도 허물고 새로 쌓기보다 활용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이번 인수가 성사되면,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플랫폼 기업이 직접 구단주로 나선 드문 선례가 된다. 중계권을 사서 콘텐츠를 유통하던 회사가, 콘텐츠의 원천 자체를 소유하는 구조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모델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증명돼야 한다. 플랫폼의 콘텐츠화 전략이 배구 팬의 소비 방식을 실제로 바꿀 수 있는지, 그리고 콘텐츠 기업이 전통적인 구단 운영 역량을 충분히 갖출 수 있는지다.

SOOP이 AI페퍼스를 통해 만들어낼 답이 어떤 모습일지는 2026-27 시즌이 시작되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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