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 아름다움

아름답되 유혹하지 않는 글꼴의 미학.

이 글은 이야기의 흐름과 결론을 정해 놓고 쓰지 않고, 낱말의 뜻을 하나하나 추적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험적 방식으로 썼다. 잘 읽히면서도 아름다운 한글 글꼴의 세계란 무엇일까. 읽기, 아름다운, 한글, 글꼴 네 가지 키워드의 뜻을 살피며 관계를 따져보았다.

© whisk

읽기와 읽히기
한 번 읽은 문장을 여러 번 되돌려 읽을 때가 많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읽기의 동선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반복하며 용수철 모양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지친다. 재미있게 읽기보다는 애써 읽을 때가 더 많다. 한글을 떼면서부터 읽기의 스트레스가 따르지만 읽어서 얻을 것이 더 크니 참을 뿐이다. 때론 이런 상상을 한다. 글이 읽히면 얼마나 좋을까. 글에 초점만 맞추면 그다음부터 눈이 저절로 움직여 페이지 가득 메운 글을 면치기하듯 후루룩 흡입해 주는 것 말이다. 물론 그럴 리 없다. 그저 ‘읽힌다’라는 시적 허용으로, 읽기에 지친 마음을 은유할 뿐이다.
유럽에서는 15세기 중엽부터 읽기를 돕는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한다. 읽기 좋은 활자(Type)와 그것을 다루는 기술인 활판 인쇄술이다. 이후 이 기술은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라고 불리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나라에서 모든 국민이 읽고 쓰게 된 것은 길어야 100년이다. 우리나라도 훈민정음 창제 후 582년이나 지났으나 모두가 읽고 쓰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글자의 역사는 수천 년이지만 그것을 다 같이 쓰며 조율한 역사는 이제 시작이다.

‘아름다운’과 다정함
자주 쓰지만 막상 물어보면 답하기 어려운 말이 ‘아름다운’이다. 어원을 따져보면 흥미롭다. 한국어 ‘아름’은 두 팔로 안을 수 있는 둘레나 부피에서 유래한 말로, 관계 지향적인 사회적 맥락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가설 단계의 주장이며, 아직 학계의 합의가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언어에서 ‘아름다운’을 뜻하는 낱말의 어원은 무얼까.
영어나 일본어의 어원을 보면 ‘작고 귀여운’, ‘가여운’이 있다. 호기심이 발동한다. 최근 과학계에는 ‘귀여운’과 생존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호모사피엔스가 친화력 선택의 결과로 세로토닌 분비가 증가하고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감소해 우락부락한 얼굴에서 귀여운 얼굴로 진화했다고 한다. 한국인이 말하는 ‘아름다운’ 속에는 다정함이 이끄는 협력과 생존의 연결고리가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정이 두텁다는 다정(多情)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대충 떠올려 봐도 애정(愛情), 우정(友情), 인정(人情), 동정(同情) 등 종류도 많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개체 간 끈끈함’을 뜻한다는 점이다.

어여쁜-사랑스러운-아름다운
‘아름다운 한글’은 낯익지만 ‘예쁜 한글’은 낯설다. 하지만 ‘예쁜’과 한글의 인연은 깊다. [훈민정음 언해본]의 “내 이를 어여삐 녀겨 새로 스믈여덟 자를 맹가노니…”를 떠올려 보자. 여기서 ‘어여쁜’은 ‘예쁜’의 옛말로, 당시에는 ‘가엾은’을 뜻했다.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에 의하면, 그러다 점차 ‘사랑스러운’, ‘아름다운’으로 뜻이 바뀌었다고 한다. 과학적 측면뿐 아니라 언어적 측면에도 다정함과 아름다움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인류가 지난 30만 년간의 혹독함을 이겨낸 비결이 다정함이라면 ‘아름다운’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감정일지 모른다. 모난 마음을 누그러뜨려 여럿을 하나로 엮는 끈끈하고 달달한 감정이 약탈보다 연대의 경제성을 드높여 다수의 생존을 이끌었는지 모른다. 훈민정음에서 묻어나는 녹진한 애민의 정서도 작고 귀여운 백성에 반응한 왕의 본능적 다정함이었는지 모른다. 한글날도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협력의 스펙트럼을 기리는 날일지 모른다.
글꼴, 특히 본문용 글꼴의 디자이너에게는 어려움, 지루함, 피로함 등 능동적 읽기의 스트레스를 줄여야 한다는 직업윤리가 있다. 타이포그래피의 목적도 쾌적한 읽기의 디자인이다. 이 글도 여럿이 협력하는 능동적 읽기 과정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찾는다.

다채로운 글자의 세계
글자는 오랜 역사 덕분에 헷갈리는 개념이 많다. 대표적인 네 가지를 꼽아보았다. 먼저 레터링은 ‘몇몇 글자’의 디자인이고, 글자체 디자인은 ‘모든 글자’의 디자인이다. 레터링은 해당 글자만 그리면 끝이지만, 글자체 디자인은 한 벌의 글꼴에 들어가는 모든 글자를 빠짐없이 그려야 한다. 캘리그라피와 타이포그래피의 관계도 비슷하다. 전자는 몇몇 글자만 손으로 쓰지만 후자는 대량의 글자를 기계로 쓴다. 예를 들어 책을 디자인하는 데 표지에 들어갈 제목 몇 자를 ‘그려’ 넣었다면 레터링이고, 펜으로 ‘써’ 넣었다면 캘리그라피이며, 본문 전체의 글꼴 종류와 크기, 위치를 지정했다면 타이포그래피다. 참고로 단행본 한 권의 본문은 20만 자 안팎이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말하는 ‘글꼴’은 무슨 뜻일까. 예를 들어 ‘내가 산 글꼴’이라고 하면 폰트라는 상품을 뜻하고, ‘본문용 글꼴’이라고 하면 폰트를 구성하는 모든 글자에 공통적으로 적용된 스타일을 뜻하며, ‘글꼴 디자인’이라고 하면 레터링과 글자체 디자인 모두를 뜻한다. 하나의 뜻만 가진 낱말은 없으니 맥락상 제대로 뜻이 통하면 그만이지만, 말 나온 김에 ‘글꼴’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공개된 문서를 중심으로 조사해 보면 ‘글꼴’은 ‘글꼴모임’이라는 조직에서 비롯되었다.

한글 레터링의 대부, 김진평 디자이너가 작업한 레터링 작업들. © [한글공감]

글꼴의 시작
1970년대는 한국의 정체성을 갈구하던 시기였다. 글꼴모임은 이런 흐름 속에서 한글의 글자 표현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1979년 3월에 만든 모임으로 이상철, 김진평, 안상수, 석금호, 손진성 총 다섯 명으로 시작한다. 한국어로 한글을 말하자는 취지였다. 그들의 첫 번째 용어 연구 결과는 먼저 김진평의 저서 [한글의 글자표현]의 저술에 사용됐고, 뒤이어 넉 달 후에 발간된 [꾸밈42호]에 ‘한글 글자 표현의 용어 연구’라는 이름으로 발표됐다.
그런데 정작 글꼴모임이 1983년 발표한 1차 용어 목록에 ‘글꼴’은 없다. 2차 연구를 고려한 것으로 보아 아직 모두가 깔끔하게 합의하지 못한 용어가 적잖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글꼴’이란 용어도 ‘글자꼴(Letter Form)’과 비슷해 구분해서 쓰기가 마땅치 않았던 것일지 모른다. 이후 석금호는 글꼴모임의 용어 연구 최종안인 ‘글자꼴 관련 용어 정리와 해설’을 [출판연구총서7 한글 글자꼴 기초연구]에 기고한다. 이 글의 말미에 드디어 글꼴이 짧게 나온다. 글자꼴과 같은 말이라고.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1년이 걸렸다. 글꼴 용어 연구는 이후 안상수, 박병천, 이용제 등 여러 연구자에 의해 다양한 관점으로 확장된다. 글자의 모양뿐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글에 대한 연구까지 함께한 지난 반세기 협업의 역사가 아름답다.

글꼴 연구의 선구자, 김진평
이제 막 글자나 타이포그래피에 흥미를 가진 분에게 책 한 권 소개해 달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한글 글꼴 디자인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책을 꼽자면 김진평의 [한글의 글자표현]이다. 글꼴의 역사, 분류, 예시, 개념까지 기본을 충실히 설명한다. 글꼴모임에서 정리한 글꼴 용어를 이 책에 두루 적용하면서 사용성을 시험한 것이다. 책 제목의 ‘글자 표현’은 레터링을 번역한 것으로, 그가 남긴 다수의 레터링 작업도 소개되어 있다.
김진평은 ‘한글 활자체 변천의 사적 연구’에서 한글꼴의 변천을 옛활자 시대(1443~1863), 새활자 시대(1864~1949), 원도활자 시대(1950~)로 구분했다. 시대 구분의 기준은 활자 제작 기술을 따른다. 옛활자는 나무 각자와 금속 주조술을, 새 활자는 전기 도금 기술을, 원도활자는 금속 조각 기술이나 사진 인화술을 활용했다. 현재는 모든 공정을 디지털로 진행하는 디지털 활자 시대로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글꼴도 소프트웨어로 진화했다. 이처럼 글꼴 디자인은 당대의 기술적 한계 속에서 고안해 낸 디자이너의 최선책으로 클라이언트의 인내, 안목, 제작비와 시장 반응까지 연결되는 복합적인 시대적 산물이다. 그렇기에 당대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돌기와 맺음의 여러 가지 표현. 이후 안상수는 ‘돌기’ 대신 ‘부리’(Serif, 명조체)와 ‘민부리’(Sans Serif, 고딕체)를 썼다. © [한글의 글자표현]

글꼴 디자인의 선구자, 최정호
원도활자 시대는 안타깝게도 사료가 부족해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 밝혀 내지 못한 글꼴이 많다. 그러나 이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최정호를 꼽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김진평은 [한글의 글자표현]에서 최정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40여 종의 현행 활자 및 사진 식자체의 대부분을 설계하였다.”
원도란 실제 크기보다 큼지막하게 그린 글자 그림을 말하며, 원도활자란 이를 축소해 만든 것이다. 크게 그린 후 축소해 퀄리티를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실제 본문 크기인 10포인트 안팎으로 사용할 때를 고려해 디자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최정호는 원도활자 1세대로, 당대 존재하던 한글 본문용 글꼴 스타일을 정교하게 다듬은 장인이었다. 그리고 1956년에 글꼴 디자인 회사인 최정호활자서체연구소를 세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원도로 만든 디지털 글꼴에는 1990년대의 sm신신명조, sm세명조, sm견출명조, sm중고딕, sm견출고딕 등이 있다. 최정호의 글꼴로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만큼 많이 사용됐으며, 특히 sm신신명조와 sm세명조의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최정호 원도의 디지털화에 가장 열심인 곳은 안상수가 2012년 설립한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다. 이곳에서 AG 최정호 초특태고딕, 초특태고딕 좁은 너비, 스크린 패밀리, 민부리 std 패밀리, 순명조 패밀리, 최정호체 std 등 최정호의 글꼴을 다수 만날 수 있다.

최정호와 동시대 디자이너로 최정순이 있다. 그는 국내 최초의 원도활자인 국정교과서체(1954)를 비롯해 많은 신문 활자를 디자인했다. 가장 잘 알려진 작업은 지금도 사용 가능한 문화체육부 바탕체(1991)다. 국립한글박물관은 2016년 최정호와 최정순, 두 디자이너의 글꼴을 비교하는 전시 [원도, 두 글씨장이 이야기]를 열기도 했다. © 국립한글박물관

글꼴 산업의 선구자, 석금호
글꼴모임에서 활동하던 석금호는 디지털 타이포그래피의 태동기인 1984년 산돌(당시 이름은 ‘산돌 룸 타이포그래픽스’)을 설립하고, 1989년 설립된 윤디자인(당시 이름은 ‘윤디자인연구소’)과 함께 불모지였던 한국어 디지털 폰트 산업을 개척했다. 산돌은 꾸준히 자사 폰트를 개발해 라이브러리를 확장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기업의 커스터마이징 폰트 개발을 발판 삼아 더욱 성장했다. 대표적인 글꼴로는 광수체 시리즈(2000~2003), 윈도 비스타(Windows Vista) 이후의 시스템 글꼴 맑은 고딕, 현대카드 유엔아이, 네이버 나눔고딕, 나눔스퀘어 패밀리, 도로명판 전용 서체 한길체, MacOS와 iOS의 시스템 글꼴 Apple SD고딕네오, 구글·어도비와 협업한 노토산스KR, 노토세리프KR, 격동고딕, 격동명조, IBM Plex Sans KR, TC-SC, JP, 배달의민족 글꼴 등이 있다. 이처럼 국내외 다수 글로벌 기업과 협업하며 글꼴 시장의 지평을 넓혀 왔다. 특히 2014년 국내 최초로 론칭한 클라우드 글꼴 서비스인 산돌구름은 수많은 글꼴 디자이너와 유저가 만나는 국내 최대 규모의 글꼴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한글 타이포그래피: 아름답되 눈에 띄지 않는
글꼴모임의 기록은 1980년대에 남아 있고 이후로는 발견되지 않지만, 후속 활동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안상수가 설립한 안그라픽스에서 편집·출간한 [타이포그래피 사전]은 석금호의 연구비 후원으로 2012년에 초판이, 2024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 개정판은 현재 ‘타이포그래피 사전’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저술 모두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이끌었으며, 수십 명의 저자가 참여했다. 매우 길고 고된 프로젝트인 데다 참여자 누구도 금전적 이익을 취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는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씨를 담은 말이 ‘한글 타이포그래피’다. 이 말은 단순히 ‘한글 + 타이포그래피’를 뜻하지 않는다. 15세기, 훈민정음은 현대 디자인의 기본 윤리인 ‘누구를 위하는가’로 시작한다. 만드는 목적과 원리를 뚜렷이 밝히고 사용 매뉴얼까지 친절히 안내해 사용자가 고쳐가며 쓰게 만든 지속 가능한 디자인이다. 한글 타이포그래피에는 한글의 철학과 타이포그래피라는 기술을 조합해 실용을 추구하자는 마음씨가 담겨 있다.
꾸준히 함께 만들어 시냇물처럼 졸졸졸 소소하지만 끊이지 않는 이익을 추구할 때 우리는 아름답다. 글꼴도 워낙 절묘해 함께 꾸준히 만들어야 아름답다. 그 세계관을 드러낸 한마디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 짓겠다. 디지털 타이포그래피의 선구자 크누스가 1982년 ‘메타 폰트의 콘셉트’에서 이렇게 밝혔다. “글꼴은 드러나게 아름다워야 하지만 드러나지 않게 작동해야 한다.” 글꼴은 매우 아름다워야 하지만 유혹해서는 안되며 눈치채지 못하게 읽기를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ㅣ 덴 매거진 2026년 1월호
글 심우진(타이포그래퍼,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회장)
에디터 조윤주(yunjj@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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