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쌀로 빚은 한잔”…제주 오메기맑은술과 고소리술 [전원생활 I 명주를 찾아서]

김난 기자 2026. 2. 6. 06:0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화산섬의 자연과 전통이 빚은 향기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2월호 기사입니다.

제주 전통주의 주원료는 쌀이 아닌 좁쌀이다.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비롯한 선택은 ‘신의 한수’가 됐다. 좁쌀로 빚은 술의 독특한 향은 쉽게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제주 오메기맑은술과 고소리술.

제주는 과거 ‘당(堂) 오백 절(寺) 오백’의 섬으로 불렸다. 그만큼 신당과 절이 많은 섬으로 제사나 당굿, 무속신앙이 성행했다는 뜻이다. 이때 신에게 올리던 술이 바로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이다. 지금도 중요한 제나 잔치에 두 가지 술을 꼭 챙기는 집이 적지 않다.

1530년에 편찬된 인문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와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제주에선 봄과 가을에 광양당과 차귀당에 남녀가 무리를 지어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돼 있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에는 오늘날에도 전통 방식으로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의 빚는 이가 있다. 김희숙 제주 술 익는 집 대표(66,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84호)다.

그의 시할머니 고(故) 이성화 씨는 한때 주막을 운영했을 정도로 술 빚는 솜씨가 좋았다. 손맛을 이어받은 시어머니 고(故) 김을정 여사는 제주도 무형문화재 오메기술(3호, 1990년 지정)과 고소리술(11호, 1995년 지정) 기능보유자다. 며느리인 그가 전수자로 나선 것은 당연해 보였다.

김희숙 제주 술익는 집 대표가 오메기술을 빚을 때 사용하는 좁쌀과 누룩을 보여주고 있다.

공무원이던 그는 평일엔 일을 하고 주말이면 시어머니댁을 찾았다. 사명감으로 시작했지만 과정은 생각 이상으로 고됐다. 남 몰래 운 날도 많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21년 시어머니에 이어 그도 고소리술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현재는 이수자인 막내아들 강한샘 씨(37)와함께 ‘제주오메기맑은술(청주, 주세법상 약주)’과 ‘제주고소리술(소주)’을 빚으며 4대째 제주 전통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좁쌀로 빚은 술
화산섬 제주의 토양은 물기가 없고 푸석푸석하다. 제주 사람들은 이를 ‘뜬땅’이라고 하는데, 이런 땅에선 벼농사가 어렵고 대신 생명력 강한 조·보리·메밀 같은 잡곡이 잘 자라는 편이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주로 조밥이나 보리밥을 지어 먹었어요. 찰기를 더하려고 고구마를 섞기도 하고요. 밥해 먹을 쌀도 없으니 당연히 술도 잡곡으로 빚었죠. 제주 전통주인 오메기 탁주와 청주, 고소리술 모두 좁쌀이 바탕이 되는 술이에요.”

오메기탁주는 좁쌀로 오메기떡을 만들어 익힌 다음 누룩·물과 섞어 발효한 술이다. 오메기떡은 좁쌀을 불린 뒤 가루 내 빚은 떡으로 가운데가 뚫린 문고리 모양과 닮은 구멍떡이다.

오메기술의 주원료인 좁쌀과 누룩, 좁쌀가루로 만든 문고리 모양의 오메기떡.

오메기청주는 좁쌀과 쌀을 가루 내 구멍떡을 빚어 밑술을 담그고, 쌀로 고두밥을 지어 덧술을 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청주여서 쌀이 들어간다. 술이 충분히 발효되면 노랗게 농익은 맑은술이 뜨는데 이 부분만 떠내 거른 것이 오메기청주다. 과거엔 제주 밭에서 나는 귀한 ‘산듸쌀’을 활용했기에 지체 높은 양반가나 마실 수 있었다.

고소리술은 좁쌀과 보리쌀로 고두밥을 지어 원주를 만들고, 이를 증류한 술이다. 고소리술의 이름은 증류 도구인 ‘소줏고리’의 제주 방언 고소리에서 따왔다.

고소리술의 역사는 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세기 말~13세기 초 몽골군은 일본 점령을 위해 제주를 병참기지로 삼았고, 이 시기 증류기법이 전파됐다. 고소리술은 이때 시작됐다.

고소리술의 또 다른 이름은 ‘모향주(母香酒)’다. 어머니의 향이 나는 술이라는 의미다. 여기에는 제주 어멍(어머니의 제주 방언)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어멍들은 낮에는 밭일과 물질로 생계를 꾸리고, 저녁에는 고소리술을 내렸어요. 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탰던 거죠. 제 친정 엄마도 늦은 밤에 술을 내리기 시작해 새벽녘이 돼서야 잠자리에 드셨어요. 그때 어머니 품에서 나던 고소리술 향기가 기억에 선해요.”

옛 방식 그대로
제주 술 익는 집에서는 모든 제조 과정이 수제로 이뤄진다. 특히 고소리술을 내리는 증류 과정에는 옛 방식 그대로 고소리(소줏고리)를 이용한다.

증류는 먼저 잘 발효된 원주를 솥에 붓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음으로 솥에 고소리를 얹은 뒤, 맨 위에 움푹한 물그릇인 장태를 올린다. 솥과 고소리, 고소리와 장태 사이 틈새는 밀가루 반죽인 시룻번을 붙여 열기가 새는 것을 막는다.

소줏고리의 고소리와 장태 사이 틈새에는 밀가루 반죽인 시룻번을 붙여 열기가 새는 것을 막는다.

불을 때면 술은 수증기가 되고, 차가운 냉각수가 담긴 장태에 닿으면 다시 액체로 응결된다. 이 액체는 주둥이로 모여 ‘살그랑살그랑’ 소리를 내며 한 방울씩 떨어진다. 이렇게 얻어진 술의 양은 원주의 30% 정도로, 최소 1년 이상 숙성해야 마실 수 있다.

김 대표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혼자서 술을 내린다. 5개의 소줏고리에 시선을 떼지 않고 세심하게 불을 조절하며 오롯이 증류에 집중한다.

“현대화된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소줏고리로 하는 곳은 제주에서 여기가 유일해요. 첨가물도 전혀 사용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방식이 전통이라서 무조건 따르는 게 아니에요. 선조들이 해왔던 방식이 술의 품질을 최고로 끌어 올릴 수 있다는 걸 체득했기 때문이죠.”

최근 그는 제주의 민속주를 연구하고, 직접 빚어보고 있다. 친정어머니가 빚곤 했던 오합주와 강술이 그것이다. 오메기술·참기름·꿀·계란·생강으로 만드는 오합주는 몸을 보양해주는 술이다. 강술은 물기가 적은 술로, 오메기술과 재료는 비슷하지만 농도가 진해 마실 때 물을 부어 먹는다. 부피가 작아서 제주 목동들이 들에 나갈 때 갖고 다니기 편했다.

그가 민속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명확하다. 몸에 이로운 술을 만들어 우리 술의 장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좋은 재료로 건강에 도움이 되고, 맛도 훌륭한 술을 만들고 싶어요. 많은 분들이 우리 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데 보탬이 됐으면 하는데, 그것이 술 빚는 사람으로서 해야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산뜻한 한잔, 묵직한 한잔
김 대표가 빚은 오메기맑은술은 2019년 한·칠레 정상회담에서 만찬주로 활용된 바 있다. 제주의 전통주가 국빈 만찬에 오른 이유는 한 모금 머금는 순간, 곧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숨에 산뜻한 꽃향기가 몰려오고 은은한 단맛이 이어진다. 삼킨 후에는 적당한 산미가 여운을 남긴다. 알코올 도수는 16도로 낮은 편은 아니나 뒷맛이 깔끔해 자꾸만 손이 간다. 식전주로도 좋고, 반주로도 훌륭하다. 잘 숙성된 화이트와인과 비슷해, 큰 잔에 따라 향을 충분히 음미하며 마시면 좋을 듯하다. 김 대표는 나물 또는 해산물과의 조합을 권했다. 

제주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고등어회는 산뜻한 오메기맑은술과 잘 어울린다.

고소리술은 도수가 40도에 이르는 만큼 맛도 묵직하다. 목 넘김은 좋은 위스키처럼 부드럽다. 특유의 짙은 곡향은 기름지거나 풍미가 강한 음식과 만났을 때 충분히 존재감을 발휘한다. 고소리술은 2020년 국제슬로푸드협회가 주관하는 ‘맛의 방주’에도 등재됐다.

이번 설 명절엔 다채로운 음식과 함께 제주의 전통주를 즐겨보면 어떨까. 산뜻한 향은 입맛을 깨우고, 묵직한 향은 다양한 맛의 조화를 이끈다.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