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소련 수용소보다 끔찍한 북한 완전통제구역의 충격적인 실태
북한에는 8개의 수용소가 있고 20만명이나 수감되어 있다.
이곳의 수감자들은 가족의 죄로 인한 연좌제 형식으로 온 가족이 다같이 끌려오거나
김씨 일가를 욕했다는 이유만으로 수감되기도 한다.
그리고 김일성의 사진이 실린 신문지를 벽에 도배한 자, 대한민국의 문화를 좋아하는 자, 종교를 믿는 자, 북한의 우상화 선전의 내용에 대해 반감을 가지거나 의문을 제기한 자, 유학을 갔는데 통금시간을 어긴 자가 수감되어 있다.
심지어는 김일성의 목 뒤에 혹이 있다고 말해서 끌려간다거나, 국영상점에 물품이 없어서 "이게 사회주의 나라 가 맞냐?"라고 말했다가 끌려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북한의 보안원들은 정치범수용소에 가고 싶지 않다면 뇌물을 내놔야 한다고 종용하기도 한다. 탈북하다 북송되거나 남한 영상을 시청하다 체포되었는데 뇌물을 주어 풀려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치범수용소에는 북한 인구의 1%가 수감되어 있으며 온갖 끔찍한 고문이 가해지는, 인간의 잔학성의 끝을 보여주는 살인 공장이며 매일 24시간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다.
수감자들은 하루 12~15시간 고된 노동을 한다.
그리고 수용소를 관리하는 보위원이 여성 수감자를 강간하다가 적발 되었을 경우 수간으로 처벌한다.
이는 수감자들을 모양만 사람인 짐승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이들 중 혁명화 구역에 수감된 이들은 수년이 걸릴지언정 나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 안에서 갖은 노동에 시달리고 김일성가의 우상화 교육으로 세뇌되지만 그 어떤 부당한 대우에도 전부 참고 견딜 수 밖에 없다. 바로 죽어서도 나가지 못한다는 지구상의 존재하는 최악의 인권 말소지대인 완전통제구역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완전통제구역에서는 김일성가의 우상화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는데 교화가 불가능한 인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완전통제구역은 극심한 노동과 고문, 굶주림으로 이루어진 현세에 재현된 지옥도와도 같다.
보위원들 또한 수감자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완전통제구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비인륜적 행위들은 너무나 잔혹하다.
어린 시절 나치 수용소를 경험해본 적 있는 법학자 토마스 부어겐탈이 정치범수용소는 나치 수용소보다 더 끔찍하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다음은 혁명화 구역의 구류실에서 일어나는 고문 중 하나다.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식사 시간·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양 무릎을 붙이고 무릎 꿇고 발을 가지런히 모은 뒤에 발등을 바닥에 붙여 뒤꿈치에 엉덩이를 밀착 시키고 허리를 곧게 펴고 각을 잡으며 계속 꿇어앉아 있어야 한다. 이때 보위원들이 수감자들의 가지런히 모은 두 발이나 무릎을 간지럽히기도 하며, 0.5평의 좁은 구류장은 햇볕이 들지 않고 습기가 많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온몸의 이가 스멀거리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나 고통에 못 이겨 신음소리를 내거나, 울거나, 졸거나, 말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바로 매질이 가해지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다.
달궈진 철판 위에 무릎을 꿇게 하기도 한다.
구류실에 갔다 오면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1주일 후부터는 다리의 살이 썩어가고, 3개월 후에는 폐인이 되며, 들것에 실려 나와도 5개월 후에는 병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까지 정치범수용소의 유일한 탈출자인 '김용'의 수기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1993년 8월부터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운영하는 제14호 정치범관리소에서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끔찍한 일들을 겪었다. 얼굴도 모르는 부친 때문에 연좌제로 잡혀왔다. 세 달 간의 모진 고문을 겪고 호송차에 실려 평양에서 5시간 가량을 달려 5개나 되는 경비초소를 통과했다. 차가 멈추자 호송원이 나를 내리게 하고 옷 하나만 입게 하고선 꿇어 앉게 시켰다. 입소한 첫해 10월 강제노역을 하게 된 곳은 밤나무골이었다. 밤을 주워먹으면 즉석에서 죽임당했다.
하루는 석탄을 실어 나르는 전차 운전공 김철민이 광차길에 밤알 몇 알이 굴러 내려와 있는 것을 보고 광차를 세우고 그 밤알을 주우려 했다. 그러자 고함소리와 함께 보위원이 달려와 사정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구두발로 내려 밟은 채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장전을 하더니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김용'의 수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곳이 완전한 무법지대라는 것이다.
회령 수용소의 경비병이었던 탈북자 안명철은 보위원 기분 내키는 대로 쏴죽인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들은 흙벽에 볏짚으로 엮은 지붕집에서 모여 살았는데 비가 오는 날에는 온 집안에 물에 샜으며 겨울에는 어떠한 보온 장치도 없이 온 몸으로 추위를 견뎌야 했다. 옷은 넝마같은 천쪼가리가 전부이며 이마저도 귀하여 죽은 사람이 생기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옷을 찢어 가져갈 정도였다. 수용소에는 수도시설이 없어 몸을 씻거나 옷을 세척하지 못하며 질병에 걸려도 소독만 받을 수 있다. 상주하는 의사들이 있긴 하지만 의료 장비와 약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보위원들이 수시로 폭행하기 때문에 온몸이 흉터와 멍투성이가 된다.
이들은 마음 놓고 대화를 할 수 없었는데 밀고자들 때문이다. 그래서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의심과 불신이 전제로 깔려있다.
이러한 밀고와 감시가 성행하는 이유는 그것이 합당한 제보일 시 조금 더 편한 작업장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3명 이상이 대화할 수는 없다.
수감자들을 가장 많이 죽음에 내몬 것은 식량 부족이다. 이는 의도적이다.
'김용'의 수기에 따르면 10일분의 식량이 공급되는데 그것으로 무려 30일을 버텨야 하며 그마저도 풀죽에 강냉이 한 두 알을 넣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 때문에 지렁이, 개구리, 쥐, 뱀, 돼지 먹이를 먹기도 한다.
하루하루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셀 수도 없다고 한다.
수감자들은 인간의 형체만 남았을 뿐 온몸에서 살점을 찾아볼 수 없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산책 시간에는 경비 몰래 풀을 뜯어먹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풀을 뜯어먹다 들키면 죽어야 했다.
탈옥하기도 쉽지 않은데 수많은 경비대를 뚫고 가시 수풀림을 지나 지뢰를 피하고 전기 철조망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핵기지 내부에도 수용소가 설치되었으며 핵 노역을 시키고 있다고 한다.
방사선 피폭이 인체에 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자들을 수감한다.
서양인 수감자를 봤다는 증언도 있는데 소문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잡힌 미군 장교 포로들이라고 한다.
만약 대한민국과의 전면전이 일어나거나 북한의 체제 붕괴로 통일이 이루어진다 해도 자기들이 저지른 만행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수감자들은 몰살시킨다는 매뉴얼이 있다. 이것은 김정은 집권 후 공식화되었다. 일본 제국의 731부대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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