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KSPO돔의 인공암벽 앞에서, 한국 스포츠클라이밍이 새 역사를 썼다. 남자 대표 이도현이 세계선수권 리드 종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여자 간판 서채현이 동메달을 보태며 하루에 메달 2개를 수확했다. “클라이밍 제왕”이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은 이유가 이 하루에 다 들어 있었다.

스포츠클라이밍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간단히 풀어보자. 스포츠클라이밍은 크게 세 종목으로 나뉜다. 리드는 15m 안팎의 높은 벽을 제한 시간(보통 6분) 안에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로 승부를 가린다. 잡고 올라가는 손잡이(홀드)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더 높은 홀드를 잡을수록 점수가 오른다. ‘+’ 기호는 다음 홀드를 향해 몸을 컨트롤하며 움직였다는 뜻이다. 볼더링은 4~5m 낮은 벽에서 짧고 까다로운 문제(루트)를 여러 개 해결하는 종목이고, 스피드는 말 그대로 같은 코스를 누가 더 빨리 오르느냐의 기록 경쟁이다. 이번에 이도현과 서채현이 메달을 딴 종목이 바로 리드다.
이도현의 금빛 등반은 디테일에서 완성됐다. 결승에서 그는 43+ 지점까지 올라 일본의 요시다 사토네와 동점을 이뤘다. 여기서 규정이 작동한다. 결승 기록이 같으면 준결승 성적이 높은 선수가 앞선다. 이도현은 준결승 2위, 요시다는 5위였다. 묵직한 한 끗 차이가 금메달을 불러온 셈이다. 숫자 뒤에 숨은 내용은 더 인상적이다. 이도현은 원래 볼더링이 주 종목이다. 2023년 베른 세계선수권에서도 볼더링으로 동메달을 땄다. 그런데 이번에는 ‘높이’를 겨루는 리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이름을 새겼다. 한 종목의 기술을 다른 종목에 옮겨 심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속도 조절, 그립 선택, 움직임의 리듬이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이도현은 훈련으로 메웠고, 결승에서 흔들리는 다리를 다독이며 한 칸, 또 한 칸 위로 밀어 올렸다. 완등(톱)에는 닿지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보여줬다.

서채현의 동메달은 꾸준함의 가치다. 44+라는 기록은 당일 루트가 얼마나 촘촘했는지 잘 말해준다. 금메달리스트 얀야 간브렛이 완등을 했고, 은메달 로사 레카르는 45까지 닿았다. 그 바로 뒤에 ‘44+’라는 숫자가 선명히 박혔다. 2021년 모스크바 금메달, 2023년 베른 동메달에 이어 세계선수권 3회 연속 포디움이다. 매 시즌 높이가 바뀌고, 루트 스타일이 바뀌고, 컨디션이 달라져도 결과를 내는 선수는 많지 않다. 서채현은 그 어려운 일을 한결같이 해내고 있다.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여자 리드 강국”으로 불릴 수 있는 근거가 이 흐름 속에 쌓였다.
이번 메달의 의미는 성적표 너머에 있다. 세계선수권은 말 그대로 ‘최고 권위’ 대회다. 톱랭커들이 총집결하고, 루트세터들이 가장 도전적인 코스를 걸어 둔다. 그런 무대를 서울이 품었다. 관중은 루트 한 칸을 올릴 때마다 숨을 삼키고, 떨어져도 다시 일어나 홀드를 잡는 손에 박수를 보냈다. 선수 입장에선 이보다 큰 힘이 없다. 무엇보다 안방에서 만든 성과는 선수층 확대와 저변에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에서도, 한국 방식으로, 세계 최고가 나올 수 있다.” 어린 클라이머들이 그 장면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유산이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이도현의 강점은 리듬과 끈기다. 크럭스(가장 어려운 구간) 앞에서 서두르지 않고, 몸의 중심을 홀드 가까이에 붙이는 습관이 있다. 체중 이동을 작은 단위로 쪼개다 보니, 미끄러질 수 있는 구간도 ‘한 번 더’ 버틴다. 서채현은 가벼운 하체와 정확한 발치기가 강점이다. 작은 풋홀드에 정확히 딛고 올라설 때 상체 힘을 최소화할 수 있는데, 그 덕에 후반까지 팔이 남는다. 이 작은 기술들이 모여 마지막 ‘+’를 만든다.
물론 과제도 뚜렷하다. 리드 결승은 체력과 집중의 싸움이다. 마지막 1~2홀드에서 결정되는 일이 많다. 한국 선수들이 안정적으로 상위권을 지키려면, 톱에 가까울수록 심박을 낮추는 루틴과 마지막 동작의 ‘폭발’을 더 다듬을 필요가 있다. 볼더·리드 복합 운영에서도 시즌 중 피크 시점을 똑똑히 나눠야 한다. 이도현처럼 멀티를 소화하는 선수는 더더욱 그렇다.

이번 성과는 팀의 힘이기도 하다. 루트 해석을 돕는 코치진, 회복을 챙기는 지원 스태프, 그리고 현장에서 분위기를 끌어올린 팬들이 함께 만든 메달이다. 메달 뒤에서 종종 잊히는 장면들,테이핑을 다시 감고, 마그네슘을 털고, 대기존에서 심호흡을 맞추는 이 장면들이 쌓여 ‘43+’와 ‘44+’가 된다.
이제 질문은 자연스럽다. “다음은 무엇을 바꿀 것인가.” 답은 명확하다. 첫째, 국내 대회와 인프라의 수준을 세계선수권 표준에 맞춘다. 국제 루트세터와의 협업을 늘리고, 주니어 대회부터 리드·볼더·스피드 3종의 경험을 넓힌다. 둘째, 선수 개개인의 루틴을 데이터로 관리한다. 구간별 시간, 그립 선택, 낙하 지점까지 기록해 루트 스타일이 바뀌어도 대응력이 유지되게 한다. 셋째, 팬 경험을 확장한다. 오늘 KSPO돔의 응원은 경쟁력이었다. 체험존, 해설형 관람, 학교 연계 프로그램으로 ‘보는 종목’에서 ‘해보는 종목’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 모든 기반 위에서 한국 클라이밍의 새 좌표가 선다. 남자 첫 리드 세계선수권 금메달, 여자 3회 연속 포디움은 출발선에 꽂은 깃발이다. 이도현이 보여준 “떨어지지 않는 법”, 서채현이 증명한 “꾸준히 오르는 법”이 다음 세대의 기술이 되고 문화가 될 때, 서울의 밤을 물들인 박수 소리는 더 자주, 더 크게 울릴 것이다. 오늘의 금빛 등반은 그래서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우리 스포츠가 더 높이, 더 오래 오를 수 있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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