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1901년에 출범한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아메리칸리그 창단 멤버다. 그 해 83승53패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1906년에는 라이벌 시카고 컵스를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도 달성했다.
1917년 화이트삭스는 정규시즌 100승과 함께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해냈다. 그 해 메이저리그 평균 최다 관중 8,665명을 동원하면서 리그를 대표하는 팀이 됐다.

화이트삭스의 명예가 실추된 건 1919년이었다. 팀을 이끄는 주축 선수들이 도박사와 공모해 월드시리즈를 고의적으로 패배했다. 석연치 않은 부분들로 리그 내 감사가 이뤄지자, 결국 선수들은 금전 수수를 인정했다. 승부 조작에 연루된 8명이 리그에서 즉시 추방됐고, 이를 '블랙삭스 스캔들'로 불렀다.
이 흑역사는 오랜 시간 화이트삭스를 괴롭혔다. '블랙삭스의 저주'로 명명되면서 염소의 저주(컵스) 밤비노의 저주(보스턴)와 더불어 메이저리그 3대 저주로 묶였다. 화이트삭스는 2005년이 돼서야 88년 만에 이 저주를 풀었다.
숙원 사업은 해결했지만, 황금기는 오지 않았다. 화이트삭스는 방향성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 매번 컨텐더와 리빌딩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2020년(단축 시즌)과 2021년에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올라갔지만,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했다. 정점에 가지 못한 채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했다.
교체
화이트삭스는 구단 기조가 맥락에 맞지 않았다. 쿠바 선수들을 지나치게 우대하고, 현장 감각이 떨어진 토니 라루사 감독을 선임한 건 많은 이들이 진작에 우려한 일이었다. 2022년 11월 페드로 그리폴을 감독으로 임명할 때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캔자스시티 벤치 코치 시절에도 딱히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리폴 감독은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2023년 부임 첫 해부터 101패를 당했다.
그 해 8월 화이트삭스는 체질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켄 윌리엄스 부사장과 릭 한 단장을 해고했다. 윌리엄스는 화이트삭스에서 30년 넘게 몸담은 인물이었다. 현장에서 일어난 문제를 수뇌부에게만 책임을 물은 것이다.
시카고 매체 <시카고 선타임즈>는 "놀라운 행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번 시즌 현장에서 끔찍한 성적을 남겼음에도(despite the Sox’ awful performance on the field this season)"라는 전제를 달았다. 이는 수뇌부 교체가 그만큼 파격적이라는 뜻이지만, 칼을 겨눈 방향이 잘못됐다는 중의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고인물은 걸러내야 한다. 그런데 후임으로 크리스 게츠가 부사장 겸 단장으로 승진했다. 게츠는 선수 육성 부문 총책임자였다.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는 외부에서 명망 높은 인물을 데려오지 않은 이유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브랜치 리키(팜 시스템을 고안한 명예의 전당 단장)가 와도 구단 사정을 파악하는 데 1년은 걸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게츠가 그동안 보여준 게 없다는 점이다. 메이저리그 선수 출신 게츠는 화이트삭스(2008-09년)와 캔자스시티(2010-13년) 토론토(2014년)를 거쳤다. 은퇴 후 캔자스시티와 화이트삭스 프런트에서 유망주 팜을 다듬었는데, 여기서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했다. 루이스 로버트 주니어와 딜런 시즈가 게츠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성공작보다 실패작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 게츠가 총괄하던 시절 화이트삭스 팜 랭킹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화이트삭스 팜 랭킹 순위
2021 - 20위
2022 - 30위
2023 - 28위
2024 - 18위
게츠는 단장으로 올라선 뒤 가장 먼저 그리폴 감독의 자리를 보장했다. 2023시즌 바닥을 친 것에 관해서는 "부상자들이 많아서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옹호했다. 참고로 그리폴 감독은 게츠와 캔자스시티에서 코치와 선수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추락
올해 화이트삭스는 떨어질 곳이 없어 보였다. 이미 101패를 당한 상태에서 설마 더 떨어지겠냐는 예상이었다. 겨우내 알찬 보강을 하지 않았어도, 기존 전력만 정상 가동되면 적어도 작년보다 나빠지진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지나친 희망'이었다.
올해 화이트삭스는 냉정히 말해서 메이저리그 수준이 아니다. 월간 승수에서 두 자리를 넘긴 적이 없다. 시즌 첫 4경기를 4연패로 시작하더니 첫 승 후 다시 5연패에 빠졌다. 그리고 시즌 두 번째 승리 후 6연패, 세 번째 승리 후에는 7연패를 당했다. 첫 25경기 성적이 3승22패에 불과했다. 1988년 볼티모어만이 시즌 첫 25경기 구간에서 화이트삭스보다 성적이 더 나빴다(2승23패).
화이트삭스의 고난은 계속 됐다. 잠시 연승을 달릴 때도 있었지만, 5월말과 6월초에 14연패로 주저앉았다. 14연패 시점에서 승률 0.238(15승48패)는 메이저리그 전체 압도적인 꼴찌였다. 29위 마이애미도 승률 3할은 넘겼다(21승41패 .339).

하지만 이 14연패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화이트삭스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트레이드 마감시한을 통해 선수들이 떠나자 전력은 더 약화됐다. 급기야 7월11일 미네소타와 더블헤더 2차전부터 8월6일 오클랜드 시리즈 1차전까지 21경기, 21연패로 주저앉았다. 1988년 볼티모어와 더불어 아메리칸리그 최장 연패 타이 기록이었다. <ESPN>에 따르면 화이트삭스가 21연패와 사투하는 동안 다른 팀들은 최소 4승 이상 올렸다고 한다.
메이저리그 최장 연패 기록
24 -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1899)
23 - 필라델피아 필리스(1961)
21 - 볼티모어 오리올스(1988)
21 - 시카고 화이트삭스(2024)
천신만고 끝에 21연패를 끊었지만, 화이트삭스의 남은 시즌은 암울하다. 화이트삭스는 다시 연패에 접어들면서 벌써 시즌 90패가 됐다. 아직 44경기가 남은 가운데 이대로면 단일 시즌 최다패 경신이 유력하다. 현재 승률 .237에 기반한 예상 성적은 124패다.
1900년 이후 단일 시즌 최다패
120 - 뉴욕 메츠(1962)
119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2003)
117 -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1916)
115 - 보스턴 브레이브스(1935)
115 - 볼티모어 오리올스(2018)
심지어 화이트삭스는 5월22일 이후 69경기에서 승률이 .188(13승56패)로 더 떨어진다. 같은 기간 아메리칸리그 14위 오클랜드 승률은 .418, 메이저리그 29위 콜로라도 승률도 .400은 된다. 화이트삭스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
21연패 동안 팀을 방치하던 화이트삭스는 지난 금요일 그리폴 감독을 경질했다. 당초 그리폴 감독을 고수한다고 밝혔지만, 여론이 악화되자 서둘러 입장을 번복했다. 그리폴 감독은 통산 89승191패(.318)의 초라한 성적으로 첫 감독직을 물러났다. 준비되지 않은 감독이, 준비되지 않은 팀을 맡으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물음표
그와중에 화이트삭스는 후임 감독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그래디 사이즈모어를 임시 감독으로 영입했다. 감독이 경질되면 벤치 코치가 임시 감독직을 맡는 것이 일반적인데, 벤치 코치 찰리 몬토요도 동시에 해고되면서 또 한 번 초보 감독이 팀을 지휘하게 됐다.
사이즈모어는 익숙한 인물이다. 2004년부터 10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고, 클리블랜드 시절 추신수와 한솥밥을 먹었다. 호타준족 파이브툴 플레이어로, 2006-08년은 올스타에 선정되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2008년에는 30홈런 30도루 시즌도 선보였다(33홈런 38도루).
사이즈모어는 부상으로 커리어가 단절됐다. 유니폼을 벗은 뒤에는 마이너리그 인스트럭터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지난해에는 애리조나에서 시간 당 15달러를 받는 인턴으로 마이너리그 코치직을 수행했다. 감독까지 올라오려면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그럼 사이즈모어는 어떻게 화이트삭스 감독이 될 수 있었을까.
사이즈모어가 애리조나 인턴직으로 들어온 건 당시 애리조나 선수 육성 부서를 이끈 조시 바필드 덕분이었다(두 번째 사진에서 게츠가 바라보는 인물). 사이즈모어와 바필드는 1982년 동갑내기로, 둘은 클리블랜드 선수 시절 절친한 사이였다. 바필드가 2023년 9월에 화이트삭스 게츠 단장 보좌역으로 이동했고, 바필드의 추천으로 사이즈모어도 화이트삭스 외야/주루 코치로 합류할 수 있었다.
이번 인사도 이러한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물론 유능한 인물이라면 별다른 경력 없어도 바로 감독직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작년까지 구단 인턴직에 머물렀던 인물이 현장의 총책임자가 되는 상황은 매우 생소하다. 화이트삭스의 일처리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인지 보여준다.
임시 감독이라고 해도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패배주의에 젖은 선수들에게 새로운 동기부여를 심어줘야 하며, 내년 시즌을 위한 새로운 토대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감독은커녕 메이저리그 코치 경력도 없는 사이즈모어가 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화이트삭스가 남은 시즌 1962년 메츠의 120패를 피한다면 기적이다. 남은 일정이 험난하다. 당장 다음 주부터 양키스와 휴스턴, 샌프란시스코를 상대한다. 세 팀 모두 포스트시즌을 노리는 팀들이다. 이 세 팀을 넘어가도 메츠와 볼티모어, 보스턴, 클리블랜드 등 만만치 않은 팀들이 대기 중이다. 무엇보다 지금부터는 '화이트삭스에게는 절대 지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상대 팀들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시즌 후 화이트삭스는 또 한 번의 대대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충격을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면 중요한 보직을 쉬운 방법으로 채우려는 관습부터 근절돼야 한다.
-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