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참 바람 잘 날이 없네요. 급변하는 자동차 시장 속에서 야심작이었던 'C300 (신형 코란도)'가 말 그대로 폭망해버렸고 G4 렉스턴의 경쟁력마저 점점 떨어진 데다 설상가상 모기업 마힌드라마저 경영 위기로 휘청이면서 쌍용차의 앞날에 또다시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툭하면 비상이 걸리는 쌍용차를 향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상황. 쌍용차는 자신들의 가치를 제품으로 증명해야 했고 급한 대로 자산을 팔아가며 개발을 진행한 끝에 2020년 말 법정관리와 함께 G4 렉스턴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출시했습니다.
그렇게 등장한 '올 뉴 렉스턴'에서는 결사항전의 의지가 엿보였습니다. 'All New'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듯 풀체인지 수준의 파격적인 변경을 이뤄낸 것이 특징이었는데요. 기아차 출신 디자이너를 총괄로 영입한 덕분인지 많은 부분에서 크게 달라졌습니다.
유행에 민감한 국내 소비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최신 트렌드를 적극 반영, 과감하게 수정한 범퍼와 확 커진 싱글 프레임 라디에이터 그릴로 차급에 걸맞은 한층 더 과격한 인상으로 거듭났어요.
여기에 풀 LED 헤드램프와 볼보의 토르의 망치나 더 뉴 싼타페를 연상시키는 T자형 그래픽의 리어램프, 새로운 디자인의 휠을 더해 존재감을 강화했죠.
또 어감이 영 별로였던 서브네임 G4와 함께 의미 없는 날개 엠블럼을 떼버리면서 후면부가 더욱 깔끔해졌습니다.
다행히 실내에서도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는데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새로운 4 스포크 D컷 스티어링 휠과 12.3인치 풀 디지털 계기판, 방향 지시등을 비롯한 차량 내 경고음 변경 기능, 계기판에 내비게이션을 띄우거나 아예 인포테인먼트 화면을 그대로 옮길 수 있는 등 경쟁사에는 없는 여러 재치 있는 기능도 지원했죠.
또 고리타분한 느낌을 줬던 스텝 게이트 기어레버를 전자식 기어레버로 수정해 불필요한 공간 낭비를 줄인 것은 물론, 각종 버튼과 컵홀더를 깔끔하게 배치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화면 크기는 그대로였지만 뒷좌석 가족을 위한 후석 취침 모드, 차량 관리 시스템과 함께 현대차의 블루링크, 기아 UVO에 대응해 코란도에서 처음 선보인 최신 텔레매틱스 '인포콘'을 탑재해 스마트폰으로 원격시동, 공조장치 조작 등을 할 수 있게 하면서 내실을 다진 것도 좋았죠.
헤드업 디스플레이 같이 경쟁차는 갖추고 있는 몇몇 고급 옵션이 추가되지 않는 등 약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부분 변경이라는 한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개선을 통해 소비자들이 체감할 수 있을 만한 변화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실내와 실외 모두 국내에는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지만, 매력적인 스타일을 뽐내는 시트로엥의 프리미엄 크로스오버 'DS7'을 참고한 듯한 느낌이 있었죠.
파워트레인에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2.2L 디젤 단일 사양을 제공하긴 했지만 출력과 토크를 한 번 더 끌어올려 좀 더 쾌적한 주행감을 선사했고, 줄곧 수입해 오던 벤츠 7단 자동 변속기 대신 현대 파워텍의 8단 자동 변속기로 변경해 전작 대비 약 10%가량 효율도 개선했어요. 여러모로 경쟁사의 구성과 상당히 비슷해졌네요.
수출형에 올라간 2.0L 직분사 가솔린 터보 사양이 추가되길 내심 기대했는데 이변은 없었습니다. 디젤 파워트렌의 인기가 급격하게 식어가면서 모하비에는 없는 가솔린 엔진이 투입됐다면 좋은 시너지를 일으켰을 것 같은데 여러모로 아쉬운 구성이었죠.
물론 배기량의 한계, 2톤이 훌쩍 넘는 몸무게와 보디 온 프레임 구조에서 오는 투박함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이것이 큰 불편으로 느껴지지 않는 소비자들에겐 직전 모델에 비해 눈에 띄게 개선된 부분들이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중간 트림인 프레스티지부터 차동 잠금장치(LD)를 적용해 거친 길에서, 또 견인을 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이런 변화 중에 하나였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드디어 이 모델부터 경쟁 차량과 동일한 수준의 ADAS가 탑재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차 및 재출발이 가능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특히 이전의 유압식 스티어링 시스템을 R-EPS로 변경해 차로 유지 보조, 고속도로 주행 보조 같은 능동적인 주행 편의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어요. 써보신 분들은 이거 없는 차 안 타시죠. 직전 모델도 고속 주행에서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이 점 때문에 구매를 망설이는 분들도 있었는데 가장 환영할 만한 변화였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던 트로트 열풍이 낳은 슈퍼스타 가수 임영웅을 광고 모델로 내세웠던 게 떠오르네요. 앞서 미스터트롯 우승 상품으로 직전 모델의 스페셜 화이트 에디션 1호차로 연을 맺은 적 있죠. 언뜻 보면 렉스턴이라는 차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젊고 곱상한 이미지인데, 쌍용차의 주 구매층인 중장년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그였기에 '가장 비싼 임영웅 굿즈'라는 별명과 함께 마케팅 효과는 확실했다고 하네요.
그 사이 여러 희한한 일을 겪고 난 뒤 쌍용차는 국내 기업 KG그룹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KG는 중화학부터 IT, 요식업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는 인수와 폭넓은 포트폴리오를 갖춘 기업인데, 마지막 인피니티 스톤인 완성차 업체까지 손에 넣었어요. 이번에는 확실한 변화를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면서 앞서 수많은 우여곡절에도 유지해 왔던 '쌍용'이라는 사명까지 과감히 내려놓고 2022년 'KG 모빌리티'로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023년 마이너 체인지 모델 '렉스턴 뉴 아레나'가 출시됐습니다. '뷰티풀', '베리뉴', '쿨맨' 등 높으신 분들 중에서 특이한 작명 센스를 가지신 분이 계시나 봐요. 그나마 정상이던 렉스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외관에서의 큰 변화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실내의 변화가 돋보였습니다. 12.3인치 인포테인먼트 모니터와 함께 송풍구 배치를 심플하게 수정했고, 하단의 공조장치 조작부도 터치패널로 변경해 더욱 세련되었어요.
대시보드의 전체 높이가 낮아지면서 고대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유래된 '아레나'라는 말처럼 더욱 넓고 쾌적한 실내 공간을 강조했습니다만, 이 모델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나마 이목을 끌었던 건 잃어버린 체어맨 SUV의 명성을 되찾고자 내놓은 최상위 모델 '서밋'이었어요.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마지막 체어맨의 최상위 모델에 붙은 차명이 서밋이었죠. SUV에 생뚱맞게 리무진이 뭐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의외로 보통의 플래그십 세단들처럼 SUV를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캐딜락의 플래그십 SUV '에스컬레이드'와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등이 이 분야 대표주자인데요. SUV와 세단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승용차를 선택하는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으면서 SUV임에도 뒷좌석 탑승객을 크게 배려한 모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등장한 '렉스턴 서밋'은 앞서 '2023 서울 모빌리티쇼'에 선보인 렉스턴 리무진을 양산한 모델로 고급 트림 노블레스를 기반으로 뒷좌석 승객을 위한 최고급 독립형 시트와 유튜브, 넷플릭스 등 최신 OTT를 지원하는 14인치 듀얼 모니터, 슈퍼 서라운드 오디오 시스템을 적용하는 등 이 모델만의 전용 사양으로 차별화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추가로 별도의 컴포트 서스펜션, 휠 안쪽에 허브 스페이서를 장착해 바퀴를 좀 더 튀어나오게 만들어 듬직한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액티브 배기 사운드라는 독특한 옵션도 제공해 흔히 '소리박'이라고 불리는 장치로 이걸 켜면 4기통 디젤 엔진의 투박한 음색 대신 실내뿐만 아니라 실외에서도 8기통과 유사한 중후한 배기음을 즐길 수 있었죠.
무엇보다 단종된 플래그십 세단 체어맨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어요. 이제야 항상 아쉬웠던 'KGM'의 플래그십으로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다만 상품성 측면에서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차량 가격은 노블레스에 비해 약 1,500만 원 비싼 6,050만 원. 최고급 모델답게 다양한 옵션이 적용됐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승차감이었습니다. 보통 리무진이라고 하면 뒷좌석 VIP의 승차감에 초점을 맞추는데 조금만 불규칙한 노면을 만나면 차체가 요동치는 바디 온 프레임 특유의 승차감을 간직했다는 건 문제가 있었죠. 앞서 언급한 해외 브랜드 차들은 같은 보디온 프레임 설계를 썼더라도 에어 서스펜션을 갖춰 승차감을 확보했으니까요.
또 2000년대 중국산 MP4에서나 볼법한 조악한 디스플레이 그래픽 등 고급 차에 걸맞은 디테일이 부족해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경쟁차 팰리세이드와 제네시스 GV80 역시 비슷한 4인승 옵션을 제공했기 때문에 이 렉스턴 서밋만의 차별점이 딱히 돋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였어요.
2세대 렉스턴은 회사와 소비자의 무거운 기대를 짊어질 만큼 정말 단단하게 만들어진 차였습니다. 찬란했던 1세대의 영광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후속 모델로 전작의 아쉬움을 상당 부분 보완해 '렉스턴'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모델로 탄생했어요.
시장의 반응도 좋았죠. 사전계약 일주일 만에 3,500여 대가 계약, 출시 당해와 이듬해 모두 1만 6천 대를 가뿐히 넘기며 자존심을 회복했습니다. 해외 시장의 성적도 전작과 비슷했고 쌍용의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동유럽과 러시아 등에서 듬직한 스타일과 뛰어난 내구성이 호평받으며 적지만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습니다. 모기업의 나라였던 인도에서는 한때 '알투라스 G4'라는 이름으로 배지 엔지니어링 되어 마힌드라의 플래그십으로 활약했죠.
하지만 행복도 잠시, 경쟁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요. 렉스턴을 찍어 누르던 '베라크루즈'가 일찍이 단종된 것은 호재였으나 프레임 바디 '모하비'가 여전히 건재했고, '맥스크루즈' 때까지만 해도 눈에 가시 수준이었던 현대차가 난데없이 공룡 펀치를 날리면서 판이 뒤집혔습니다.
이후 상품성을 크게 끌어올린 '올 뉴 렉스턴'을 출시하면서 다시금 판매량을 회복하는가 싶었지만, 집안 사정이 다시금 발목을 잡았고 아쉽게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사골 모하비에도 밀리는 신세가 됐어요.
또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내부에 있었죠. 픽업트럭 '렉스턴 스포츠'에게 이른바 팀킬도 당했습니다. SUV에 탑재된 각종 고급 사양을 덜어내 차이를 두긴 했습니다만, 우리가 언제 쌍용차를 옵션으로 탔나요? 이쪽도 렉스턴이기는 매한가지, 막상 SUV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 구성에 국산 유일 픽업트럭이라는 독보적인 매력이 돋보였고, 또 노후화된 코란도 스포츠를 대체하는 모델이기도 했기에 꽤나 합리적인 가격으로 출시된 덕분에 우려했던 판매 간섭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쌍용도 백기를 들고 KGM 체제로 들어온 이후에는 이 렉스턴 스포츠에도 고급 옵션을 아낌없이 투입하고 있죠. 그나저나 렉스턴 스포츠가 최근 '무쏘'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렉스턴 스포츠야 예전부터 수출형에는 무쏘라는 이름을 써서 그러려니 하겠는데 납득이 안 되네요. 아무튼 렉스턴 스포츠는 이렇게 SUV와 한편으로 엮인 나름 독자적인 이야기를 많이 쌓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별도의 편으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담으로 2세대 모델 역시 전작을 이어 다양한 환경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오랜 단골인 한국도로공사가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습니다. '고속도로 작업 차량'이라는 임무에 걸맞게 평균 100만 km 이상의 누적 주행거리, 악천후에도 거뜬 없어야 하기 때문에 이곳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렉스턴의 뛰어난 내구성을 대변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또 다른 단골인 국군은 '렉스턴 스포츠'를 선택했습니다. '레토나'에 이어 다목적으로 활약하던 '코란도 스포츠'가 단종되어 이 차량이 투입되는 것인데, 얼떨결에 급이 올라갔네요.
지금까지 쌍용 그리고 KGM의 플래그십 SUV '렉스턴'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대한민국 1%의 소비자를 만족시키겠다는 멋진 포부를 내세웠던 덕분인지 지금도 1%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 게 참 대단한데요. 독보적인 4륜구동과 강철 프레임의 든든함으로 탄탄한 마니아층을 확보했고 캠핑, 차박 등 레저 열풍에 힘입어 가성비 좋은 중고차로 재조명받기도 하면서 지금도 수많은 가족의 든든한 동반자로 도로 위를 누비고 있습니다.
과거 무쏘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면서 여러모로 아쉬움도 많았지만, 회사의 주인이 숱하게 바뀌는 어수선한 분위기, 만성적인 자금난으로 개발비조차 제대로 조달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던 실무진의 노력이 돋보이는 모델이었습니다. 불가사리 같은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르죠.
쌍용차를 다룰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이 위기 때마다 늘 묵직한 한방을 선보이며 경쟁사를 긴장시키는,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브랜드 같습니다. 이 정도면 초필살기를 날리기 위해서 일부러 체력을 깎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예요. KG모빌리티로 새롭게 출범한 지 벌써 3년 차에 접어드는 지금, 더 나은 모습으로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를 제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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