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 삼성전자는 다시 1등이 될 수 있을까

반도체 사업 50주년에 메모리까지 1등 뺏겨

위기극복 말하지만 바라볼 건 반도체 경기뿐

연말연초 수뇌부 개편도 난망…후임자 안보여

생존 위해 경비절감 등 다운사이징 전략 선회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을 총괄하는 전영현 부회장은 삼성전자가 시장 예상치를 크게 밑도는 3분기 실적을 발표한 지난 8일 이례적으로 사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걱정을 끼쳤고, 지금 처한 엄중한 상황을 재도약의 계기로 삼아 위기 극복을 위해 경영진이 앞장서겠다”고 말했습니다. 삼성전자 최고 수뇌부가 ‘삼성전자의 위기’를 인정하고 위기 극복을 공식 선언한 것입니다. 전영현 부회장은 이날 사과문에서 ‘위기’라는 단어를 네 번 언급했습니다.

삼성전자가 스스로 위기를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삼성전자의 위기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일부지만 언론에서 ‘삼성전자 위기론’ 또는 ‘삼성 위기론’을 거론하기 시작한 게 지난해 상반기쯤이었습니다. 삼성 내부적으로는 2~3년 전부터 쉬쉬하면서도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는 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이제야 수뇌부가 위기를 인정하고 위기 극복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성의 진짜 위기일지도 모릅니다. 이재용 회장이 ‘철의 장막’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삼성은 언제부터인가 고(故) 이건희 회장이 그렇게 강조했던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이나 초격차 기술력 확보 같은 문제보다는 오너의 사법 리스크만 얘기하고 여기에 모든 걸 쏟아부었습니다. 조직도 미래 먹거리보다 현상 유지에 방점을 찍는 사업지원 TF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당연히 기술 인력과 기술 조직보다는 관리‧재무 인력이 득세했습니다.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재용 회장은 2017년 2월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2021년 8월 가석방되기까지 5년 동안 수감과 석방을 반복했습니다. 비록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긴 했지만 지금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2심 재판이 진행입니다. 이런 오너의 사법 리스크가 지금의 삼성전자 위기를 불러온 주요 원인 중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이런 오너의 사법 리스크를 글로벌 경쟁자들이나 시장은 봐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해는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 했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을 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2024년 올해는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지 50년이 되고, 서울 용산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어 이재용 회장이 그룹 경영을 총괄한 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시기에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은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았습니다.

전영현 부회장이 삼성전자의 위기를 공식 인정했지만 위기를 보여주는 징후와 사실들은 그야말로 차고 넘칩니다. 외국계 증권사는 삼성전자를 ‘병약한 반도체 거인’이라고 비아냥댑니다. 국내 증권사 리서치 센터장은 AI 반도체 수요 증가로 내년에도 글로벌 반도체 업황이 좋겠지만 유독 삼성전자만 겨울이 지속될 것으로 진단합니다.

애플이나 중국 업체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바일 부문과 TSMC와 시장 점유율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는 파운드리를 논외로 하면 세계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확실하게 우위에 선 부문은 메모리 반도체입니다. 그러나 이제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도 더 이상 1등이 아닙니다.

최근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PC와 스마트폰 시장을 중심으로 수요를 끌어가는 ‘전통 시장’과 AI 관련 인프라 확대로 생긴 HBM(고대역폭메모리) 중심의 ‘AI 메모리 시장’으로 양분돼 있습니다. 당연히 돈이 되는 것은 AI 메모리 관련 시장입니다. 문제는 전통 시장과 AI 메모리 시장 모두에서 삼성전자가 지위를 위협받고 1위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모건스탠리는 이런 보고서를 냈습니다. “중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올해 처음 글로벌 D램 생산량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현재 추세라면 26년에는 미국 마이크론마저 추월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공습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삼성 반도체도 중국 기업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줬던 석유화학 등의 전철을 밟을지 모릅니다.

삼성전자가 부문별 실적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3분기 삼성전자의 메모리 부문 영업이익은 D램 4조원, 낸드플래시가 1조원 등 합계 5조원 정도로 추산됩니다. 이에 비해 메모리반도체 사업만 하는 SK하이닉스는 아직 실적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3분기 6조원대의 영업이익이 예상됩니다. 영업이익만 보면 상반기까지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 부문이 SK하이닉스를 1조원 정도 앞섰는데 3분기를 기점으로 SK가 삼성을 앞지르고 시간이 흐를수록 격차는 확대될 것입니다. 이제 삼성전자는 모바일과 파운드리는 물론 초격차를 자랑했던 메모리 부문에서도 더 이상 1등 기업이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된 것은 알려진 대로 돈이 되는 HBM 시장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지난 3월 HBM 5세대인 HBM3E 8단을 업계 최초로 납품했고 최근에는 12단 양산에도 성공해 연내 공급할 예정입니다. 이에 비해 삼성전자는 아직도 엔비디아 품질 테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여전히 수율이나 발열 등 문제가 많아 언제 테스트를 통과할지 알 수 없습니다. HBM 덕분에 메모리 반도체 전체 시장에서 1등 기업으로 올라선 SK하이닉스는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TSMC가 주최한 포럼에서 자사의 생산효율이 삼성전자나 마이크론에 비해 8.8배 높다는 자신감 넘치는 리포트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HBM 시장 대응에 실기하고 AI 메모리 사이클에 제대로 올라타지 못한 것은 삼성전자 역사에서 큰 치욕입니다.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에 기록해 두고 오래오래 곱씹고 반성해야 합니다. 두고 봐야겠지만 어쩌면 삼성과 SK의 그룹 운명이 엇갈리는 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대한민국에 이건희 회장이 있다면 대만의 TSMC에는 모리스 창 회장이 있습니다. 그는 2018년 퇴임하면서 어떤 직함도 받지 않았고 지금 야인으로 삽니다. 모리스 창 회장은 2005년 물러났다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2009년 구원투수로 복귀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금융위기로 해고됐던 연구개발 인력들을 복귀시킨 것입니다.

이에 비해 삼성전자는 2019년 ‘성실함의 대명사’ 김기남 부회장 시절 HBM이 당장 돈이 안 되고 향후 성장 가능성도 높지 않다고 판단해 관련 조직을 사실상 해체하고 전문 인력들을 푸대접했다는 게 내부 전언입니다. HBM 전문 인력들이 경쟁사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는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이익을 내던 시절이어서 누구도 미래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자나 깨나 미래 먹거리와 기술력, 인재 제일을 외쳤던 고 이건희 회장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야말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 이후 삼성의 문제점 중 하나는 늘 비용 절감만 외치고 눈앞의 이익만 챙긴다는 것입니다. 인사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중용됩니다. HBM의 실패는 결코 김기남 전 부회장 탓만이 아닙니다. 이재용 회장 정현호 사업지원 TF 부회장 등 그룹 수뇌부의 책임이 더 큽니다. 인텔이 모바일 시대의 도래를 못 읽어 무너진 것처럼 삼성은 AI 반도체 시장을 간파하지 못해 큰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전영현 부회장은 사과문 말미에서 지금의 위기는 반드시 새로운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과연 삼성전자는 다시 초일류기업, 글로벌 1등 기업이 될 수 있을까요.

요즘 제일 힘든 사람은 아마 이재용 회장일 것입니다. 선대 회장들이 이룬 엄청난 성과를 본인이 무너트린다고 생각하면 밤잠을 못 이룰 것입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이재용 회장은 성과가 부진한 계열사 사장들을 개별적으로 승지원으로 불러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독려한다고 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습니까.

위기가 왔을 때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당연히 내부 구성원들입니다. 삼성 위기론이 제일 먼저 나온 곳은 학계도 언론계도 정부당국도 아닌 삼성 내부입니다. 기업이 위기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인재들, 특히 관리직이 아닌 전문 기술 인력들이 계속 영입되는지 아니면 조직을 떠나는지 보면 됩니다. 삼성은 전문 기술 인력들이 떠나기 시작한 게 이미 오래됐고 지금도 계속 떠납니다. 전영현 부회장이 구원 등판한 이후에도 인재 유출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메모리 사업부를 책임지는 사장이 주위에 떠나려는 인력들을 잡아달라고 간곡하게 당부할 정도입니다.

전영현 부회장이 사과문에서 위기 극복을 위해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법을 다시 들여다보고 고치겠다고 선언한 이후 연말 연초 대규모 인사를 통한 조직 분위기 쇄신이 많이 거론됩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위기를 초래한 그룹 상층부는 그대로 두고 임원 감축같이 실무자들만 건드려서는 조직의 피로감만 가중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최근 몇 년 동안 삼성의 혁신작업은 늘 이런 식이어서 구성원들의 인심만 잃었습니다.

이재용 회장이 어렵게 결단을 내려 정현호 부회장 등 그룹 상층부를 혁신하려 해도 대안이 없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삼성은 이재용 회장이 2017년 60세 이상 CEO 15명을 대거 정리한 이후 인재 공백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현재로서는 정현호 전영현 두 부회장을 대체할 자원이 없습니다. 지난 5월 반도체 부문 수장이었던 경계현 사장 후임으로 ‘올드보이’ 전영현 부회장이 취임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게다가 내년 1월 말에는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관련 항소심 선고가 예정돼 그룹 수뇌부를 바꾸기도 쉽지 않다는 관측이 팽배합니다.

논란이 분분하지만 결국 삼성전자와 그룹의 혁신은 적어도 인사 측면에서는 크게 바뀔 게 없다고 보는 게 상식입니다. 햄릿형에 가까운 이재용 회장의 스타일상 이런 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것 같지도 않습니다. 또 떠난 인재들이 다시 돌아올 리도 없어 지금까지 그랬듯이 삼성전자는 앞으로도 반도체 사이클만 계속 쳐다볼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반도체 경기 말고는 삼성전자가 위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입니다.

기업이 성장 절벽에 맞닥뜨리거나 근원적 위기에 몰렸을 때 살아남는 길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적으로 매출과 수익 감소를 받아들여 다운사이징 경영을 하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말은 않지만 삼성전자가 비용 절감과 인력 감축 등에 사활을 거는 것은 바로 이런 전략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현호 부회장이나 박학규 경영지원실 사장 같은 재무‧관리 통이 절대 필요합니다. 삼성 내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업지원 TF 체제의 혁파를 주장하지만 가능성은 굉장히 낮아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과거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던 것처럼 새로운 성장 곡선을 만드는 것입니다. 기존에 없던 혁신적 방법으로 신사업에 빠르게 올라타는 것인데 이를 위해선 최고경영자의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건희 회장이나 모리스 창 같은 거인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경영학자들은 기업이 대략 5년 정도 정체기를 거치면 70~80%는 재기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안타깝지만 삼성전자도 이미 최소 2~3년 정체기를 거친 데다 확실한 돌파구도 보이지 않아 이 길로 접어든 것으로 봐야 합니다. 노키아가 그랬고 소니가 그랬던 것처럼 삼성전자도 글로벌시장에서 존재감 없는 기업으로 주저앉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삼성에 대한 의존도가 20%쯤 되는 한국경제 전체 입장에서도 대비가 필요합니다. 삼성전자도, 한국경제도 기회는 생각 보다 늦게 오고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박종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