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최초 100승-100패 투수…‘부엉이’ 정삼흠 떠나던 날

[이재국의 엘팬알백] ㊻KS 2회 우승의 주역 정삼흠의 조기은퇴

1996년 9월 15일 정삼흠이 은퇴식에서 마이크를 잡고 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LG트윈스
“아쉽지만 더 이상 미련없이 선수의 길을 마감하고 지도자의 길을 걷겠습니다.”

1996년 9월 15일. ‘부엉이’ 정삼흠은 LG 트윈스 구단 역사상 최초로 은퇴경기를 치른 뒤 잠실구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1985년 MBC 청룡에 입단한 뒤 1996년 쌍둥이 유니폼을 벗기까지 12년. 아직 현역 선수로 뛰어도 팔팔한 35세의 나이였지만, 그는 구단의 은퇴 권유에 특유의 속전속결 투구처럼 화끈하게 유니폼을 벗었다.

LG 역사상 최초의 100승 투수였고, 트윈스 역사상 최초의 100패 투수였다. 100승과 100패를 모두 달성한 투수는 LG 트윈스 역사에서 지금까지 정삼흠 외에는 아무도 없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46번째 주제는 LG 트윈스 구단 역사상 유일한 100승-100패 투수 정삼흠의 은퇴 이야기다. 청룡과 쌍둥이 군단의 역사를 관통하며 1990년대 ‘신바람 야구’가 두 차례 우승하는 데 핵심멤버로 활약했던 주인공. 트윈스 팬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기도 하다.

LG 트윈스는 1996년 전반기를 마친 뒤 이광환 감독(오른쪽)을 해임하고 천보성 감독대행(왼쪽) 체제를 가동했다. ⓒ스포츠서울

◆이광환 감독이 물러난 뒤 몰려온 격랑…정삼흠 은퇴 권유

1996년 전반기를 마치고 이광환 감독이 성적 부진(35승42패5무·승률 0.457) 속에 경질되면서 LG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천보성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고 수습을 노렸지만 후반기 성적은 15승29패(승률 0.341). 팀 순위는 6위에서 7위로 한 계단 더 내려앉았다.

1990년대 중반을 강타했던 ‘신바람 야구’의 꽃이 지고, 꿈만 같았던 LG 야구의 봄도 아지랑이처럼 흩어져갔다.

자칫 암흑기로 흘러갈 수도 위기. LG 구단으로선 빠르게 팀 분위기를 쇄신하고 새로운 도약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세대교체도 그중 하나였다.

1996년 LG 정삼흠이 은퇴 결심을 하자 이를 보도한 스포츠서울 기사.
“후반기 페넌트레이스 도중에 최종준 단장께서 은퇴를 권유하시더라고요. 저는 처음엔 ‘은퇴 안 하겠다’ 그랬죠. 그때 나이도 30대 중반이었고, 전반기에만 8승을 했는데 은퇴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정삼흠의 얘기다. 선수 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영리했던 그는 지금도 당시 상황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LG 트윈스 역사상 최초로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고, 1993년과 1994년엔 구단 최초로 2년 연속 15승을 올렸다. 그러다 1995년 8승9패, 3.81의 평균자책점으로 이런 연속 기록들이 모두 깨졌다.

하지만 정삼흠은 1996년 전반기에만 8승5패, 평균자책점 3.34를 기록하며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었다. 다승 부문 공동 7위에 평균자책점 15위. LG 팀 내로 한정하면 다승은 구원승을 많이 챙긴 김용수(10승5패9세이브)에 이어 2위였고, 평균자책점 역시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 중 이상훈(1.92)에 이어 2위였다.

1961년생이니 35세 되던 해였다. 후반기에 2승만 추가해도 10승이었고, 이듬해에도 충분히 10승을 기대할 수 있는 나이. 하지만 당시엔 노장이라고 했다.

“당시 선수로서 연봉 9000만 원을 받았는데 코치가 되면 초임으로 4000만 원밖에 못 받으니까 당연히 선수생활을 더 하고 싶었죠. 천보성 감독대행이나 구단에서는 이상훈 등등 다루기 힘든 젊은 투수 몇몇을 휘어잡을 투수코치가 필요하다고 봤나 봐요. 제가 이상훈 고대 선배이기도 하고 평소 선수들을 잡을 땐 잡고 그러니까 저를 빨리 코치 시키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마음이 싱숭생숭해서였을까. 정삼흠은 후반기에 등판했지만 패전만 쌓아갔다. 2승만 추가하면 10승인데 승수는 제자리걸음. 평균자책점만 높아졌다.

어느 순간 그도 지인들과 은퇴에 대해 심각하게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후반기에 사실 어깨도 좀 아팠고 야구공부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구단에 ‘일본과 미국으로 코치연수를 보내주면 은퇴하겠다’는 조건을 걸었죠. 구단에서 ‘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연봉도 표면적으로는 코치 초임연봉으로 발표해야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선수 마지막해 연봉 9000만 원을 1년간 지급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LG 정삼흠(오른쪽)이 1996년 은퇴식에서 자신의 등번호 1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LG 최종준 단장에게 반납하고 있다. ⓒLG트윈스

LG 구단으로서도 고민이 많았다. 당시 정삼흠에 대해 최종준 전 단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정삼흠 선수는 연봉협상을 하면 가장 까다로운 선수 중 한 명이었어요. 하지만 일단 연봉 계약을 하고 나면 뒷말이 없던 선수였죠. 한마디로 ‘뒤끝’이 없었습니다. 불같은 성격에 당시 선수단에 쓴소리를 해야할 땐 직설적으로 하는 등 이미 반 코치 역할도 하고 있었어요. 선수단 권익을 위해 구단에도 할 말은 하는 선수이기도 했고요. 또한 영리해서 컴퓨터 전력분석 시스템을 팀 내에서 가장 잘 활용하고 있었고, 상대 투수의 버릇이라든지 그런 것도 잘 잡아 내 코치를 해도 잘 할 스타일이었어요.”

정삼흠은 후반기 막바지에 접어든 9월 초, 은퇴를 최종 결심하게 된다. 이때까지 시즌 8승7패, 평균자책점 4.39를 기록 중이었다. 후반기에 승리 없이 패전만 2개를 추가했고, 평균자책점은 4.39로 그해 규정이닝에 포함된 투수 중 최하위(24위)였다.

1990년 페넌트레이스 최종전에 앞서 백인천 감독이 은퇴식을 하고 있다. LG 선수들이 마련한 지각 은퇴식이었다.ⓒ스포츠서울

◆LG 구단 최초 은퇴경기와 은퇴식

LG는 9월 15일 잠실 롯데전 때 정삼흠의 은퇴경기와 은퇴식을 성대하게 열어주기로 했다. 요즘이야 웬만한 커리어를 가진 선수도 은퇴식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됐지만, 당시엔 은퇴식이 그야말로 특별한 이벤트였다.

실제로 그때까지 LG 트윈스에서 은퇴식을 한 사례는 손에 꼽을 만했다.

최초의 은퇴식은 1990년 페넌트레이스 최종일인 9월 29일 경기에 앞서 백인천 감독이 ‘지각 은퇴식’을 한 것이었다. 사실 김재박 이광은 등 고참선수들이 주축이 돼 레전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열어준 행사였다.

1992년 홈 개막전에 앞서 LG 프랜차이즈 스타 이광은이 자신의 등번호 33번이 달린 깃발을 들고 은퇴식 행사를 하고 있다. ⓒLG트윈스

그리고 1991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은 이광은이 이듬해 홈 개막전 때 사실상 프랜차이즈 스타 최초의 은퇴식을 했다.

그리고 1995년 4월 16일 ‘비운의 선수’ 김건우의 은퇴식이 열렸다(김건우는 코치를 하다 1997년 다시 투수로 등록돼 현역선수로 한 시즌을 뛰었다).

그러니까 정삼흠의 은퇴식은 구단 역사상 4번째. 하지만 은퇴경기는 전신 MBC 청룡 시절을 포함해 구단 최초의 일이었다.

LG 강정환 사장(오른쪽)이 1995년 김건우 은퇴식에서 공로패를 전달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스포츠서울

KBO 역사로 살펴봐도 당시 은퇴경기는 더더욱 드물었다.

1989년 8월 17일 OB 베어스 윤동균(3타수 1안타 1타점)이 최초의 주인공이었고, 그로부터 6년 뒤인 1995년 9월 24일 해태 '오리궁둥이' 김성한이 2호 은퇴경기를 펼쳤다.

정삼흠의 은퇴식이 열리기 일주일 전인 1996년 9월 8일 롯데 김민호와 한영준이 같은 날 나란히 은퇴식과 은퇴경기를 치른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니까 정삼흠 이전에 4명밖에 없었다.

1989년 KBO 역대 최초 은퇴경기 및 은퇴식을 치른 OB 베어스 윤동균. ⓒ두산베어스

◆‘부엉이’ 정삼흠의 마지막 현역 경기

9월 15일. 일요일 오후 2시 잠실 롯데전. 정삼흠은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이날 경기 전까지 개인통산 106승120패, 47세이브를 기록 중이었다. 마지막 경기였기에 승리투수로 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상대 선발투수는 하필이면 좌완 주형광. 그해 16승을 기록하며 한화 구대성과 치열하게 다승왕 싸움을 하고 있는 투수였다.

고졸 3년생 주형광은 그 시절 속된 말로 ‘긁히는 날’이면 언터처블 투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따라 더 싱싱한 공을 던졌다.

LG 정삼흠은 1995년 9월 15일 은퇴경기와 은퇴식을 치렀다. 스포츠서울이 이튿날 신문에 은퇴식과 경기 상황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정삼흠 역시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이기에 있는 힘을 모두 짜냈다.

3회까지는 0-0의 팽팽한 접전. 4회초 균형이 깨졌다.

선두타자 김종헌에게 중전안타를 맞은 뒤 도루를 허용했다. 이어 김응국에게 1루수 쪽 내야안타를 내줘 무사 1·3루. 여기서 임수혁을 유격수 앞 병살타로 유도했지만 3루주자 김종헌이 홈을 밟았다.

정삼흠은 5회까지 66구로 4안타 무4사구 1탈삼진 1실점을 기록한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결과를 떠나 성공적인 마지막 투구였다.

5회초 롯데 공격이 끝난 뒤 은퇴식이 진행됐다.

사회자의 은퇴식 통고에 이어 정삼흠의 약력 소개, LG 강정환 사장의 공로패와 화환 증정, 은퇴사, 유니폼 반납 순으로 행사가 22분간 펼쳐졌다.

마당발답게 이날 은퇴식에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대거 참가해 축하를 건넸다.

상대팀 롯데의 간판투수인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과 고려대 선배인 양상문 롯데 투수코치도 꽃다발을 전했고, 고려대 야구선수들도 잠실구장에 와서 박수를 보냈다.

인기 절정의 탤런트 최수종-하희라 부부도 자리를 함께해 은퇴식을 빛냈다. 정삼흠은 "평소 가수 조하문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조하문을 통해 LG 열혈팬인 최수종과 인연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정삼흠의 은퇴식에 평소 친분이 두터운 LG 열혈팬 최수종-하희라 부부가 잠실구장을 찾아 축하를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고려대 81학번 동기 선동열의 영상 메시지였다.

그해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한 선동열은 “아따, 니가 은퇴를 해버리믄 어쩐다냐. 니가 은퇴를 한다는디 나가 축하를 해야할지 아쉬워 해야할지 모르겄다. 코치가 되더라도 열심히 해라”라며 잠실구장 전광판을 통해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메시지를 전해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정삼흠은 은퇴식을 한 뒤 취재진을 만나 “눈물을 흘려야 할 타이밍에 웃음이 나와 혼났다”며 “은퇴식이 완전히 개그가 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삼흠(오른쪽)과 선동열(가운데)은 고려대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다. 선배 최동원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모습. ⓒ스포츠서울

◆정삼흠-선동열의 전설…술로 완투대결한 다음 선발 맞대결

정삼흠과 선동열은 학창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프로 진출 후 둘이서 밤새 술을 마신 뒤 선발 맞대결을 펼쳤던 일화는 지금도 전설로 전해진다.

MBC 청룡 시절이던 1987년 9월 1일. 다음날 잠실 해태전에 선발등판할 예정이던 정삼흠은 상대 선발투수가 선동열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밥이나 먹자”며 불러냈다.

간단히 한잔을 하다 술자리는 2차, 3차, 4차로 이어졌고, 소주 20여병과 양주 5병이 널부러진 채 먼동이 틀 때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다.

정상적인 맞대결로는 '천하의 선동열'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정삼흠이 술로 먼저 완투대결을 펼친 것이었다.

9월 2일(수요일) 야간경기. 둘 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마운드에 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둘은 호투를 펼쳐나갔다.

정삼흠은 2회초 이순철에게 적시타, 5회초 서정환에게 적시타를 맞았지만 6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2실점으로 버텼다.

해태 시절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의 투구 모습. ⓒ스포츠서울

그런데 화가 나는 건 선동열이 6회까지 단 2안타만 허용한 채 무실점 피칭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정삼흠은 7회초에 마운드에 올랐지만 4연속 안타를 맞으면서 결국 3점을 추가로 내주고 말았다. 7이닝 110구를 던지며 5실점했다.

선동열은 그러거나 말거나 9회까지 123구를 던지며 3안타 1볼넷 5탈삼진 무실점으로 완봉승을 올렸다. 시즌 10승(1패) 고지에 오르는 한편 평균자책점도 0점대(0.96)로 낮췄다.

술 기운이 가라앉지 않은 탓인지 수비 때 세 차례나 다리에 타구를 맞는 불안불안한 수비를 펼치고도 완봉승을 따냈다.

정삼흠을 더 화나게 한 건 경기 후 선동열의 인터뷰였다.

“지금 컨디션이라면 또다시 한 게임을 더 던질 수 있다.”
선동열과 정삼흠의 취중 혈투가 펼쳐진 1987년 9월 2일 잠실 해태-MBC전 기록표. ⓒ스포츠서울
1987년 9월 2일 잠실 해태-MBC 경기 결과를 전한 스포츠서울 상보.

사실 이날 외에도 정삼흠은 선동열과 수많은 음주 대결을 펼쳤지만 별다른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둘의 기억에 의존한 진술에 따르면 음주대결 후 다음날 완투대결을 하기도 했다고는 하지만 기록지 상으로 찾아내기는 난망하다.)

◆은퇴경기에서도 패전투수

정삼흠은 1996년 9월 15일 은퇴경기에서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고도 패전투수가 됐다. 6회부터 등판한 차명석이 1.2이닝 4실점하고, 마지막 투수 이병석이 9회초 추가 1실점하면서 2-6으로 패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롯데 선발투수 주형광은 8회말 2사 2루서 대타 노찬엽에게 적시타를 맞고, 9회말 김선진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했지만 9이닝 5안타 2실점 완투승을 올리는 역투를 펼쳤다. 시즌 17승으로 한화 구대성과 다승 공동 1위가 됐고, 실제로 시즌 종료시까지 18승으로 그해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1985년 데뷔전(3월 30일 광주 해태전)에서 패전투수로 시작한 프로선수 생활. 마지막 경기에서도 패전을 추가하며 통산 388경기, 106승121패47세이브, 평균자책점 3.62의 성적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었다.

KBO 역대 6번째 100승 투수가 되는 훈장을 달기도 했지만, 이날까지 쌓아올린 121패는 당시로선 KBO 최다패 기록이었다.

이뿐만 아니었다. 훗날 깨지게 되지만 은퇴할 당시에는 최다이닝(1894.2이닝), 최다피홈런(148개) 등에서도 맨 위에 이름을 올려놓기도 했다. 프로 12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불꽃처럼 던진 흔적이었다.

1996년 9월 15일 정삼흠의 은퇴경기 기록표. ⓒ스포츠서울

◆KBO 6호, LG 1호 100승 투수

선수생명이 길어지고 있는 요즘엔 100승 투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1990년대에만 해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1987년 김시진이 KBO 1호 100승 투수가 된 뒤 1990년 최동원과 선동열이 나란히 2호와 3호 달성자가 됐다. 이들은 불같은 강속구로 무장한 우완 정통파 투수들이었다.

KBO 4호 100승 투수는 OB 장호연. 1983년 프로 무대에 데뷔한 그는 1993년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정확히 100승을 달성했다. 앞선 투수들과 달리 느린 공으로도 완급조절을 하고, 다양한 변화구와 절묘한 제구력, 영리한 두뇌피칭으로도 100승 투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1994년 윤학길이 역대 5번째 100승 투수가 됐다.

정삼흠은 1996년 대망의 100승 고지를 밟는다.

아홉수도 없이 시즌 첫 등판에서 99승을 올렸고, 두 번째 선발등판인 4월 21일 광주 해태전에서 6.2이닝 9안타 1볼넷 5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하며 KBO 역대 6번째 100승 투수가 되는 역사를 썼다.

MBC 청룡 시절을 포함해 LG 투수 중에서는 역대 최초의 100승 기록. 지금까지도 LG에서 100승을 거둔 투수는 김용수(126승)와 정삼흠 2명뿐이다.

현역 선수 중에서는 임찬규가 2011년부터 2025년까지 86승을 기록해 은퇴한 김태원(75승)을 제치고 역대 3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향후 구단 역사상 3번째 100승 투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KBO 최초 100패 투수 OB 장호연. ⓒ두산베어스

◆장호연과 KBO 1호 100패 경쟁

1990년대까지 개인통산 100승도 쉽지 않은 기록이었지만, 100패는 더더욱 희귀한 기록이었다.

앞서 100승 선착 투수로 설명한 김시진(124승73패), 최동원(103승74패), 선동열(146승40패) 등은 압도적 구위를 갖춘 불세출의 투수들. 승률도 높았고, 은퇴할 때까지 100패와는 거리가 멀었다. 윤학길(117승94패)이 100패에 근접했지만 6패가 모자란 상태에서 은퇴했다.

흥미로운 건 잠실 라이벌 OB와 LG의 에이스들이 KBO 최초 100패 선착 경쟁을 한 것이었다. 바로 장호연과 정삼흠이 주인공이었다.

1985년 프로에 데뷔한 정삼흠은 2년 먼저 프로에 들어온 장호연을 통산 패전 부문에서 맹렬한 기세로 뒤쫓았다.

1993년까지 정삼흠은 96패, 장호연은 98패. 1994시즌 둘 중 누가 먼저 100패를 할지 지켜보는 것도 야구팬들에겐 나름대로 쏠쏠한 구경거리였다.

다시 말하자면 100패까지 장호연은 2패가 필요했고, 정삼흠은 4패가 모자랐다.

결국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장호연이 이 대결에서 간발의 차이로 100패에 선착한다.

장호연은 5월 20일 대전 한화전에 선발등판해 5.1이닝 6실점(2자책점)으로 팀의 4-6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즌 2패(1승)째이자 개인통산 100번째 패전에 도달했다. 1994시즌 5번째 등판 만이었다.

이로써 장호연은 개인통산 101승과 100패로 KBO 최초 '100승-100패' 클럽을 개설했다.

정삼흠은 1994년 15승8패, 평균자책점 2.95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다. 전년도(15승11패, 평균자책점 2.99)보다 더 빼어난 성적. 그러다 보니 승수쌓기 페이스는 빨랐지만, 패전투수가 되는 속도가 느렸다.

정삼흠이 역사적인 통산 100패를 기록한 것은 1994년 7월 8일(금요일) 광주 해태전이었다. 시즌 15번째 등판이었다. 이날 ‘LG 킬러’ 조계현과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

초반부터 엎치락뒤치락했다. LG는 조계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는 듯 매섭게 몰아붙였다. 1회초 신인 유지현이 빗맞은 우전안타로 출루한 뒤 2번타자 김재현이 좌월 2점홈런을 날려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자 해태는 3회말 이건열의 좌월 2점홈런으로 응수하며 동점을 만들었다.

LG가 5회초 김재현의 볼넷과 도루 후 서용빈의 적시타로 3-2로 다시 앞서나가자, 해태는 5회말 2사 2,3루서 이건열의 2타점 우전 적시타로 4-3 역전에 성공했다.

정삼흠은 6회말 1사 후 이날 개인통산 1000경기에 출장한 해태 이순철에게 좌측 솔로홈런을 허용하고, 정회열에게 좌익선상 2루타를 맞은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5.1이닝 동안 90구를 던지면서 5실점(3자책점). 3-5로 뒤진 상황에서 강판했다.

결국 LG가 3-6으로 패하면서 정삼흠은 시즌 4패째이자 통산 100패째를 기록하게 됐다. 장호연에 이어 KBO 역대 두 번째 100패 투수가 됐다.

'LG 킬러' 조계현은 7이닝 3실점으로 LG전 10연승을 달렸고, 해태가 1994시즌 LG전에 거둔 4승(6패)을 홀로 책임졌다. 8회에 등판한 선동열은 2이닝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올리면서 친구 정삼흠의 100패를 제 손으로 확정지었다.

◆LG 유일 100승-100패 투수

앞서 설명한 대로 정삼흠은 1994년 7월에 개인통산 100패를 먼저 당한 뒤 1996년 4월에 100승 고지를 밟았다.

승과 패는 병가지상사. 통산 100승도 빛나는 훈장이지만, 100패 또한 아무나 올릴 수 없는 기록이다.

지난해(2025년)까지 KBO 역사를 통틀어서도 ‘100승-100패 클럽’에 들어간 투수는 14명뿐이다.

LG 트윈스 임찬규는 구단 역사에서 정삼흠만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통산 100승과-100패 투수에 도전한다. 임찬규는 정삼흠의 등번호 1번을 물려받았다. ⓒOSEN

정삼흠은 장호연에게 간발의 차로 뒤져 KBO 2호로 ‘개인통산 100승-100패 클럽’에 가입했다. 하지만 LG 구단 역사에서는 1호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이 기록 역시 LG 현역 선수 중 임찬규가 가장 근접해 있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통산 86승85패를 기록 중이어서 앞으로 승수는 14개, 패수는 15개가 필요한 상황이다.

묘한 것은 정삼흠이 현역 시절 달고 있던 등번호 1번을 현재 임찬규가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 다 프로 데뷔 초기에는 빠른 공이 주무기였지만, 30대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빠르지 않은 공으로도 과감하게 승부를 한다는 게 공통점이다. 제구와 완급조절, 상대 심리를 이용하는 두뇌피칭으로 전성기를 열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임찬규가 정삼흠에 이어 구단 역사상 두 번째 ‘100-100클럽’에 가입할지 지켜볼 만하다.

MBC 청룡 유니폼을 입고 정삼흠이 투구하는 모습. ⓒ스포츠서울

◆‘부엉이’ 정삼흠에 관하여

금테안경을 쓴 외모가 부엉이를 닮고, 야간경기에 강하다고 해서 붙은 별명 ‘부엉이’. 정삼흠을 떠올릴 때 연관검색어처럼 따라붙는 제2의 이름이다.

이름에 공경할 ‘흠(欽)’ 자가 들어가는 것도 흔치 않지만, 야구에서는 생소한 명지고 출신이라는 이력 또한 독특하다.

경남 고성이 본적이지만 태어난 곳은 대구. 대구 영신중학교 2학년 때 서울의 명지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야구를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반대항 야구대회에 나갔다가 투수로 등판해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자 명지중 야구부장이 야구부 입단을 권유했다. 당시 명지중과 명지고가 야구부를 갓 창단한 상황이었다.

공부만 하던 일반학생 정삼흠은 처음엔 거절을 했지만 야구부장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글러브를 끼고 말았다.

하지만 남들보다 한참 늦은 중학교 3학년 때 야구에 입문한 터라 기초부터 배우기 위해 1년을 유급하게 된다. 1961년생인 그가 동기들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이유다. 1963년생인 선동열과 고려대 동기가 된 것도 그가 1년 유급을 하고, 선동열이 1월생이라 한 해 먼저 학교를 들어갔기 때문이다.

명지중 출신이니 명지고에 진학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무명의 야구부에 들어가고도 야구로선 최고 명문대학인 고려대에 진학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타고난 운동능력을 통해 고교 3학년 때 청소년대표 상비군에 선발됐다. 당시엔 자신의 고교가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청소년대표 상비군 경력으로도 대학 진학이 가능했다.

고려대 최남수 감독이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런데 특기자 입학 서류가 잘못돼 대입 시험을 쳐서 고려대(정경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학 시절 팔꿈치 부상이 발생해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하던 그는 3학년을 마치고 대학 중퇴를 하고 1984년 실업야구팀 포항제철에 입단을 하기도 했다.

MBC 청룡 시절 20대의 정삼흠 모습. ⓒ스포츠서울

1985년 서울 연고팀 MBC 청룡에 1차지명되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첫해 9승15패5세이브, 평균자책점 3.13의 성적을 올렸다. 신인으로서 가능성을 보여준 그였지만 1989년 MBC 청룡 시절까지 한번도 10승을 하지 못했다.

1990년 LG 트윈스가 청룡을 인수한 뒤 주름졌던 그의 야구인생도 꽃을 피웠다.

백인천 감독의 결단에 따라 시즌 중반 김용수와 보직을 변경해 마무리를 맡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8승9패23세이브, 평균자책점 2.78을 찍었고, LG가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커리어 하이가 아니었다.

1991년 다시 선발로 돌아 생애 처음 두 자리 승수(12승15패8세이브)를 작성한 뒤 1994년까지 4년 연속 10승을 기록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1993년과 1994년 2년 연속 15승을 올린 것도 LG 구단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었다.

LG 트윈스 시절 30대의 정삼흠 모습. ⓒ스포츠서울

◆정삼흠에 관한 기억과 추억

정삼흠은 프로 입단 후 20대의 젊은 나이엔 6년 동안 34승을 거둔 그저 그런 투수였다. 공만 빠르고 거칠었던 투수였다. 그러다 30대의 나이에 6년간 72승을 올렸다. 내공이 쌓이면서 투수로서 경지에 올라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140㎞대 공을 던질 수 있었지만 그는 허허실실 전법으로 130㎞대 느린 공만으로도 타자들을 마음껏 요리했다.

이런 점을 보면 장호연과도 언뜻 흡사하지만, '만만디' 장호연과는 달리 그는 포수로부터 공을 받자마자 인터벌도 없이 속사포처럼 던지는 템포 투구의 대가였다. 그래서 그의 등판 경기는 주로 빨리 끝났다.

오히려 타자들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수싸움의 우위를 점했다. 직구를 기다리면 변화구로, 변화구를 기다리면 과감한 직구 승부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렸다. 몸쪽과 바깥쪽, 낮은 곳과 높은 곳을 폭넓게 활용했고, 기막힌 제구력으로 타자들의 히팅포인트를 빼앗았다.

거침없는 달변가에 막힘없는 만물박사. 여기저기 참견하기를 좋아해 때론 오지랖 넓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지만, '각종문제 전문가'로 팀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독특한 캐릭터였다.

199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마무리투수 정삼흠이 우승을 확정한 뒤 포수 심재원에게 안기고 있다. LG 구단 역사상 첫 '헹가래 투수'가 됐다. ⓒLG트윈스

‘부엉이’ 정삼흠을 추억하자면 올드팬들은 1990년 삼성과 맞붙은 한국시리즈 4차전에 마무리로 나와 구단 역사상 첫 우승을 확정지은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9회말 마지막 타자인 이종두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오른팔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모습. 포수 심재원이 달려오자 가슴팍으로 뛰어올라 안기는 장면. 그리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는 그의 얼굴은 지금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다.

욕심을 내고 우겼다면 1~2년쯤은 더 현역으로 활약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구차하게 선수생명을 연장하지 않았다. 100승과 100패의 추억을 안고 황혼이 오기 전 공을 내려놓았다.

1990년과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 ‘부엉이’ 정삼흠의 은퇴는 ‘신바람 야구’와 ‘이광환 야구’의 막을 내리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1996년 가을, 그는 코치 신분으로 미국 플로리다 교육리그로 떠났다. 구단은 당초 약속과 달리 해외 연수 대신 1997년 곧바로 1군 투수코치를 맡기면서 새판짜기에 돌입했다.

[엘팬알백] ㊼편에서 계속

LG 정삼흠이 1996년 4월 21일 광주 해태전에서 구단 최초로 개인통산 100승을 달성한 뒤 꽃다발을 들고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그는 LG 트윈스 최초 100승과 100패 투수라는 기록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LG트윈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