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피해자 만나는 쌤들이 PC에 붙인 ‘이 말’ [따만사]

정봉오 동아닷컴 기자 2023. 3. 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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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에 붙은 푸른나무인의 자세. 정봉오 동아닷컴 기자 bong087@donga.com
<푸른나무인의 자세>
1. 상대에게 진정과 최선을 다하는가?
2. 작고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가?
3. 미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4. 합리적이고 투명한가?
5. 준비와 마무리는 잘하고 있는가?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인 푸른나무재단 직원들의 PC에는 ‘학교폭력 근절’이라는 활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근무 자세가 담긴 메모가 붙어 있다. 학교폭력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이자 재단 설립자인 김종기 명예이사장이 업무 실수를 줄이고 일 잘하는 직원들로 키우고자 만든 지표다. 피해 학생과 학부모, 선생님 등 주변인들을 상담하는 김석민 상담본부 팀장은 특히 첫 번째 자세인 ‘진정성’을 염두에 두고 대화한다.

“피해 학생들이 가해 학생들로부터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하잖아요. 저희도 진정성 있게 대하지 않으면 학생이 마음을 열지 않아요. 경계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저에게 다가오지 않더라도 제 쪽으로 방향만이라도 틀 수 있도록 피해 학생의 침묵까지 의미를 두고 대화하고 있어요. 아마 다른 상담 선생님들도 진정성을 강조하시면서 업무를 보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피해 학생이 있다면 전국 어디로든

푸른나무재단으로 걸려온 상담 전화는 설립일인 1995년부터 지금까지 10만 통이 넘는다. 최근에는 매월 200통 이상이 끊임 없이 오고 있다. 하루 6~7통의 전화가 오는 셈인데, 하루 10통 이상인 날도 있다. 상담본부 직원과 자원봉사자 15명이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다.

“피해 학생이나 학부모와 상담하는 경우에는 ‘이분들이 잘못해서 피해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특히 피해 학생들은 ‘내가 어떤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피해를 받고 있구나’라고 스스로에게 책임 전가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담자가 이런 부분들을 은연중에 주입하듯이 이야기하면 피해 학생이 ‘결국은 이 사람도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는구나, 그럼 내 잘못이네?’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푸른나무재단은 학교폭력 전화상담이 건당 30분 이내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1시간 이상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주변의 환경, 학교폭력 유형 등이 천차만별이어서 상담은 학생이 겪고 있는 현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특히 피해 학생에게 신뢰를 주고 상처받지 않도록 단어 하나하나도 조심해서 꺼내야 한다고.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잖아요. 상담사의 신뢰가 떨어질 수 있는 말을 최대한 지양해야 해요. 예를 들어 피해 학생은 가해 학생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상담사가 피해 학생에게 사안을 물어볼 때 ‘가해 학생이 어떻게 행동을 했니?’라고 해야 하는데, 상담사가 잘못해서 ‘그 친구는 너에게 어떤 피해를 줬어?’라고 하면 상담사가 가해 학생을 친구로 인정하는 게 돼요. 그러면 피해 학생이 상담자의 말을 ‘너희 관계는 친구 관계인데, 왜 그것도 이해를 못 해주느냐’는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친구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도 신경 쓰고 있어요.”

푸른나무재단 상담실. 하루 10통 이상 학교폭력 상담 전화가 걸려오는 날도 있다. 정봉오 동아닷컴 기자 bong087@donga.com
재단은 사안이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피해 학생의 동의를 받아 사후 관리를 한다. 또 직원들은 위기개입 통합지원의 일환으로 전국 어디든 출동해 피해 학생과 학부모를 만나 상담지원, 생활지원, 의료지원, 법률자문, 장학지원 등 여러 맞춤형 지원을 통해 피해 학생 및 가정의 일상 회복을 돕고 있다.

한번은 피해 학생이 학교 과제라며 김 팀장에게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무기력하고 웃지 않던 아이가 마음을 열고 웃으면서 마이크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 김 팀장은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는 학생에게 “네가 이렇게 웃고 있는 걸 보니까 보람을 느껴서 계속 이곳에 다니고 있나 봐”라고 대답했다.

“상처받고 힘들었던 아이에게 관심과 정을 주고 훗날 학교로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줬을 때 보람을 느껴요. 아이들이 가끔 놀러 오는 경우도 있는데요, 나중에 찾아와서 ‘잘 지내고 있었어요?’,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라고 오히려 안부를 묻고 응원해주곤 해요. 그러면 내가 여기서 피해 학생에게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기 때문에 친구들이 관심을 가져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보람을 느껴요.”

푸른나무재단에 도착한 감사 편지. 정봉오 동아닷컴 기자 bong087@donga.com
푸른나무재단은 학교폭력 예방, 피해자 치유와 사회 변화를 기본 가치로 활동 중이다. 김 팀장은 학교폭력 피해율을 줄이고 학생들에게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재단 설립자이신 명예이사장님은 학교폭력 피해율을 제로로 만드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꿈꿔 오셔요. 제로로 만든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지만, 노력해서 우리 재단이 그 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학교폭력을 근절하는 데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재단 미션이 청소년이 희망을 꿈꾸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학교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문화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사업을 다양하게 추진 중이고 앞으로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 지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예요.”

김석민 푸른나무재단 상담본부 팀장. 직업 군인이었던 김 팀장은 병사들과 한솥밥을 먹었던 군부대에서의 경험이 학생 상담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피해 사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건 굉장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예요. 상대가 저한테 조금이라도 표현하거나 신호를 보내면 알아듣고 다가가는 게 중요한데, 그 부분은 병사나 피해 학생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군부대에서의 위치와 역할들이 도움이 되고 있어요.”


당신은 자녀에 대해 안다고 100% 확신할 수 있나요?

3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22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학생 10명 중 1명은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그 이유를 보면 14.4%는 “부모나 선생님이 걱정할까 봐”였고, 14%는 “더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아서”였다. 여행 유튜버 곽튜브도 최근 한 방송에서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설명했다. 이렇게 자녀가 피해를 감추는 상황에서 학부모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관심’이라고 김 팀장은 말했다.

“보호자 분은 관심이 많이 있어야 해요. 자녀의 학교폭력을 경험하신 학부모 대부분이 ‘우리 애는 이럴 애가 아닌데’라는 것을 전제로 하셔요. 그런데 역으로 ‘정말 100% 확신할 수 있으세요?’라고 물어봤을 때는 대부분 주저하시더라고요.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와 집안에서의 태도가 다를 수 있어요. 친구들과 있을 때는 쾌활하고 주도적인데, 집에 오면 방문을 닫고 조용히 지내는 아이가 있어요. 그러면 보호자 분들은 집 안에서의 이미지만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가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어떠한 일을 경험하고 있는지에 대해 모르시는 경우가 많아요.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야 ‘아이가 친구들을 대할 때의 행동 패턴은 다를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요. 이 인지에서부터 시작해야 자녀의 피해 사실을 보다 빠르게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김 팀장은 피해 학생의 두발 변화를 사례로 소개했다. 어느 날 중학생 지민이(가명)가 갑자기 삭발한 모습으로 귀가했다. 어머니가 “왜 삭발했냐”고 물어도 지민이는 “그냥 했다”고만 답했다. 알고 보니 학교에서 한 학생이 지민이의 머리카락을 이발기(일명 바리깡)로 일부분만 밀어버려서 삭발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었다. 김 팀장은 “신체적인 부분에서 확연히 나타나는 변화가 있다면,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바로 알아봐 주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자녀의 행동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김 팀장은 말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의 스마트폰 쪽으로 손만 뻗어도 자녀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가해 학생으로부터 오는 연락을 부모에게 숨기고 싶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팀장은 “극도로 공격 성향이 강해진다거나 감정 기복이 심해진 경우에도 알아봐 주셔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자녀의 질문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고등학생 민철이(가명)는 TV를 보다가 갑자기 어머니에게 “나, 이사 가고 싶어”, “우리 집에 돈 많아?”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왜?”라고 반문했더니 민철이는 “아니다”라며 대화를 차단했다. 훗날 민철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재 피해 상황을 알리고 싶진 않지만 돈이 있으면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을 숨기고 물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걱정할까봐서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아무 의미 없는 것을 물어보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안에 내포한 의미들이 생각보다 깊은 것들도 많고, 학생 본인이 ‘대놓고 물어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돌려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경우도 있어요. 초등학생들도 이런 고민을 해요. ‘내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부모가 걱정을 안 하고 내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를요. 학부모들은 이러한 질문을 평소에도 많이 하는 친구더라도 조금 더 아이의 표정을 관찰하고, 자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건지 조금 더 고민해주실 필요가 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요즘 학교폭력은…배달서비스 이용해 괴롭히기도

코로나 팬테믹 이후 학교에서는 사이버폭력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푸른나무재단이 지난해 9월 발표한 ‘학교폭력·사이버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유형 중 31.6%가 사이버폭력이었다. 2021년(16.3%)보다 2배, 2019년(5.3%)보다 6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과거 학교폭력의 전형적 유형이었던 언어폭력(19.2%)과 신체폭력(11.9%)을 크게 상회한 것이기도 하다.

김 팀장에 따르면 사이버폭력 유형 안에서 제일 많이 나타나는 것은 ‘사이버 언어폭력’이다. 소셜미디어 다이렉트 메시지(DM)나 단체 메신저로 욕설을 하면서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배달 서비스나 위치추적 서비스를 이용해 괴롭히기도 한다.

먼저 배달 서비스의 경우 가해 학생이 피해 학생의 이름, 연락처, 주소를 이용해 ‘만나서 결제’로 피해 학생에게 물건을 보낸다. 그러면 피해 학생은 ‘배달 폭탄’을 맞게 된다. 배달원은 배달원대로, 자영업자는 자영업자대로 피해를 보는 구조이며, 배달을 시킨 것처럼 된 피해 학생이 그들(자영업자, 배달원)에게는 가해자가 되는 형태다.

위치추적 서비스를 이용한 괴롭힘은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의 계정 연동으로 이뤄진다. 가해 학생이 피해 학생의 위치를 파악해 “너 학원 앞에 있구나, 5분 안에 여기로 튀어 와”라고 명령하는 식이다. 공유형 자전거나 킥보드를 이용해 ‘물건 셔틀’을 시키기도 한다. 피해 학생의 중고거래 앱 계정으로 허위 매물을 올려 구매자에게 돈만 받고 연락을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구매자는 피해 학생의 계정을 신고할 수밖에 없고, 피해 학생은 범인 취급을 받게 된다.

“앱을 활용해서 괴롭히는 방법이 굉장히 교묘해졌어요. 가해 학생으로 지목을 받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범위까지만 피해를 주고 빠져요. 사이버폭력이 다양한 유형과 급변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거예요.”

게티이미지뱅크
김 팀장은 학부모가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는 예방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학교폭력예방법)은 제15조에서 ‘학교장은 학교폭력의 예방 및 대책을 위한 교직원 및 학부모에 대한 교육을 학기별로 1회 이상 실시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효과적인 교육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학부모들이 지금 어떻게 학교폭력이 이뤄지는지 직접적인 사례나 유형, 동향에 대해서 안내를 받으셔야 하고, 청소년 문화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피해가 피해인지조차 모르시기도 해요. 물론 예방 교육을 잘하는 학교도 있지만, 예방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한 학교들은 횟수 채우기식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예방 교육이 중요하다고 항상 강조해요.”

정봉오 동아닷컴 기자 bong087@donga.com


알고도 나서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일부 학생들은 피해 사실을 목격하고도 입을 닫곤 한다. 가해 학생의 공격 대상이 자신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김 팀장은 목격자가 조용히 주변에 상황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피해 학생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스로 나설 필요는 없어요. 나섰을 때 본인이 또 다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을 누구나 해요. 이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주변 어른이 도와주든 도와주지 않든 간에 피해 학생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았다는 게 확인이 되면 그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학부모나 선생님에게 이야기만 전해 달라는 거에요.”

알리는 것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김 팀장은 말했다. 일부 학생들은 ‘고자질한다’, ‘이른다’고 생각해 알리는 것을 주저하는데, 이들에게 부당함을 고발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는 게 김 팀장의 설명이다. 그는 “학교폭력을 학생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의존적인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봉오 동아닷컴 기자 bong087@donga.com


피해 학생에게 전하고 싶은 말

푸른나무재단 학교폭력 상담 전화번호는 ☎1588-9128(구원의팔)이다. 피해 학생들이 상담으로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김 팀장은 말했다.

“저도 항상 얘기하는 것이고, 명예이사장님도 방송에서 이야기하셨던 것 같아요. 학교폭력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피해 학생들이 주변 친구나 어른에게 꼭 사실을 알려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항상 강조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과 메시지예요.”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정봉오 동아닷컴 기자 bong08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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