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

조회수 2024. 4. 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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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러운 아름다움, 품격 있는 여성상.
이 모든 수식어가 오드리 헵번에서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회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도 어딘가 시골 처녀의 순진함이 엿보이는 청초한 눈빛, 도도해 보이면서도 따스한 사랑을 가득 뿜어내는 환한 웃음, 짐짓 우울해하지만 단박에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건네 올 듯한 친근한 미소. 연기 스펙트럼은 바로 이런 매력을 바탕으로 펼칠 수 있었다.

통제된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한 나라의 공주, 촌스러운 여성에서 세련미 넘치는 여성으로 변신하는 도시 아가씨, 허름한 아파트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성까지. 스크린에 비치는 그의 모습에는 언제나 세련된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할리우드의 역사가 된 대표작

<로마의 휴일>(1953)

1953년 23세의 나이로 첫 주연에 나섰다. 그 작품이 바로 영화 <로마의 휴일>이다. 일탈을 꿈꾸며 자유분방하게 도시를 질주하고 싶은 상류층 여성과 평범한 남자와의 로맨스. <로마의 휴일>은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의 전형이라는 지위를 굳건히 유지하며 오늘날 제작되는 작품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2)

오드리 헵번의 독보적 이미지를 각인 시킨 동시에 현대인의 욕망을 은유하는 무대로 호평받으며 <로마의 휴일>과 함께 ‘고전영화’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실제 보석상의 이름이기도 한 티파니 매장의 쇼윈도 앞에서 한 손에 커피를 들고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검은 드레스 차림의 고혹미는 작품이 가리키는 이미지와 메시지의 한 상징이기도 하다.

<화니 페이스>(1958)

벼락처럼 유명 패션지의 새 모델로 등장한 모델과 사진작가의 로맨틱한 해프닝을 그린 이 영화는 뮤지컬 장르다.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을 통해 연기뿐 아니라 노래에도 재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의 노래 실력은 <티파니에서 아침을> 속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Moon River’를 부르는 모습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샤레이드>(1963), <어두워질 때까지>(1968)

늘 로맨스 또는 화려한 무대의 주인공만을 자처하지 않았다. 테런스 영 감독이 연출한 <어두워질 때까지>에서 오드리 헵번은 자신이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배우임을 입증했다. 마약 밀반입 사건에 휘말린 시각장애인 여성 역할을 맡아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장르의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샤레이드>에서도 남편의 죽음에 얽힌 음모에 얽히는 부인을 연기하며 커리어의 변신을 시도했다.


연기를 향한 열정

오드리 헵번은 영화에 앞서 연극 무대에서 연기의 기본기를 탄탄히 다졌다. 연극 무대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스크린의 주역으로 주목받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1954년 <로마의 휴일>로 제2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스타덤에 올랐는데, 이 영화를 연출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연극 무대에서 그녀의 재능을 발견하고 주연에 전격 캐스팅했다.

실제로 오드리 헵번은 1954년 브로드웨이 연극 <운디네>에 출연해 연극계의 아카데미상인 ‘토니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미 스크린 스타로서 자신의 위상을 굳혀가던 시절,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 무대를 선택해 예술가로서 자존심과 당당한 고집을 드러내며 얻은 성과이기도 했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에서 선보인 스타일은 당대 엄청나게 유행하며 대중을 이끌었다. 트렌드를 이끄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것.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은 검은색 드레스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었다.

패션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작품은 1956년 출연한 로맨틱코미디 영화 <사브리나>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극 중 그가 입은 옷은 ‘사브리나 스타일’이라는 하나의 패션 흐름을 구축했다. <로마의 휴일> 속 공주의 단발 헤어 컷은 ‘헵번 스타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

1950년대부터 전성기를 누린 1960년대 중반까지 오드리 헵번은 연기는 물론 세계적 패션 흐름까지 이끈 주역이었다. 당대 대중문화의 ‘핵심 스타’로서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Episode. 연예인 협찬의 시초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특정 브랜드 의상을 협찬받는 경우가 많다. 그 ‘연예인 협찬’의 시초가 바로 <사브리나>다. <사브리나> 속 오드리 헵번의 의상을 협찬한 브랜드는 명품으로 인지도가 높은 지방시(Givenchy)다. 지방시는 <사브리나>의 흥행으로 얻은 광고효과로 매출이 크게 상승했고, 이후 그가 출연하는 영화 속 의상을 적극 협찬했다.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은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다. 그는 촬영이 끝나면 협찬받은 옷을 모두 브랜드에 반납했다.

화려함에 감춰진 뼈아픈 과거

‘세기의 연인’에게도 아픈 과거는 있다. 오드리 헵번은 1929년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영국 은행가인 아버지와 네덜란드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풍요로운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지만, 부모는 당시 유럽을 휩쓴 파시즘 지지자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가 유럽 대륙을 휩쓸면서 그는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네덜란드로 피신했다.

오드리 헵번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외가가 풍비박산하며 가난을 피하지 못했다. 힘겨운 10대 시절을 보내면서도 외가 어른들을 따라 레지스탕스를 돕는 활동에 나선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0대 시절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를 꿈꿨다. 그러나 가난과 건강 문제, 170cm라는 큰 키는 꿈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발레를 포기하면서 연기로 진로를 바꿨고, 그렇게 오르게 된 연극 무대는 그의 삶에 위안이 되었다.

세계에 희망을 주는 움직임

배우로서 성장기를 지나 화려한 스타덤의 위상을 다진 오드리 헵번은 은퇴 이후인 198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세상에 나섰다. 초청받은 한 자선기금 모금 콘서트에서 자신의 명성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를 자임한 것이다. 기아, 가난, 내전 등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그는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이런 그의 모습을 지켜본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기부와 성금으로 힘을 더했다. 전 세계 구호 활동의 대표 인사로 오드리 헵번의 이름이 여전히 거론되는 이유다.

1992년 11월 암 진단을 받기까지 자신을 괴롭히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오드리 헵번은 구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프리카 소말리아까지 꿋꿋하게 구호 활동 일정을 소화했다. 그것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지구촌 한구석의 아픔과 고통을 전하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ㅣ 덴 매거진 2024년 5월호
글 윤여수(맥스무비 기자)
에디터 정지환(stop@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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