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 사용량 0, 현관엔 퇴거 요청서···‘또’ 모녀가 사각지대에서 스러졌다

윤기은·이유진 기자 2022. 11. 2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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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함께 숨진 채 발견된 모녀가 살던 다세대주택의 25일 모습. 보일러 작동판에 ‘03’이란 숫자가 표기됐다. 윤기은 기자

25일 오후 2시57분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의 한 다세대 주택. 망치로 바닥을 치는 소리가 5층짜리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4층에 있는 원룸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16.5㎡(약 5평) 남짓한 이 원룸에서는 이틀 전인 지난 23일 60대와 30대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날 오전까지 현관에 설치됐던 경찰통제선은 치워진 상태였고, 현관문에 붙어있던 전기요금 5개월 미납을 알리는 연체 고지서도 경찰이 거둬 간 뒤였다.

망치 소리는 유품 정리 업체에서 이 집을 방문해 현장을 정리하면서 낸 소리였다. 업체의 철거작업으로 바닥 장판과 벽지는 벌써 절반 이상이 벗겨져 시멘트가 드러난 모습이었다. 그래도 집 안 곳곳에는 고달팠을 고인들의 생전 삶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벽면에 붙은 난방 온도조절기에는 ‘03’이란 숫자가 표시됐다. 가스 공급이 차단될 경우 나타나는 ‘에러코드’였다. 바깥은 늦가을치고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는데 이 집은 냉골이었다.

집 안 벽지를 뜯어내고 있던 유품 정리 업체 사장 A씨는 ‘점검’에 불이 들어온 온도조절기를 가리키며 “가스가 끊겨 있었다”고 했다. 가스 검침원도 “계량기를 보면 그 집은 가스를 안 썼다. 가스레인지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화장실 안 하수구엔 고인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다. 화장실과 연결된 보일러실 바닥엔 파리 사체 10여개가 보였고, 바닥과 벽이 맞닿은 공간엔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A씨는 “집 안이 오염이 돼 집주인이 공사를 요청했다”며 “화장실은 깨끗했다. 대신 현관 바닥과 책상 위에 고지서가 수북했다. 각종 공과금과 월세 계약서가 함께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업체에서 수거한 유품은 폐기물업체로 보내져 소각될 예정이라고 했다. 가구는 원룸 바닥에 놓여있던 매트리스 2개와 책상 하나, 소형 냉장고가 전부였다고 했다.

지난 23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함께 숨진 채 발견된 모녀가 살던 다세대주택의 25일 모습. 현관 우편함에 각종 고지서들이 꽂혀있다. 윤기은 기자

서울 광진구에 살던 모녀는 지난해 11월 서대문구에 있는 이 집을 보증금 500만원·월세 45만원에 계약했다. 경찰에 따르면 엄마 B씨(65)와 딸 C씨(36) 모두 특별한 직업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B씨는 남편과 18년째 별거 중이었으며, 모녀는 줄곧 둘이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됐다.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은 모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일대에는 인근 대학교 학생들과 외국인 유학생들이 많이 주거하고 있는데, 모녀와 이웃 간 왕래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옆 건물에 사는 류모씨(70)는 “그제 아침 8시쯤인가 구급차 3대가 와 있고 무슨 사고가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모녀를 본 기억도 없다”라고 말했다.

모녀의 죽음은 지난 23일 오전 “세입자가 사망한 것 같다”는 집주인의 신고를 받고 경찰과 소방이 출동하고서야 알려졌다. 숨진 뒤 얼마나 이 집에 오래 있었는지 아직은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부검을 거쳐 정확한 사망 시각과 원인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현장에서 범죄 혐의점 및 유서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유품 정리 업체 A씨는 “방 상태를 보고 냄새 맡았을 때 시신이 오래 방치된 걸로 보였다”고 했다.

이들이 숨진 채 발견된 다음날인 24일 보건복지부는 ‘복지 사각지대 발굴 및 지원체계 개선대책’을 발표했다. 발견 당시 집 현관문에는 공과금 연체 고지서와 함께 월세 연체로 퇴거를 요청하는 집주인의 편지가 붙어 있었다. 월세는 6개월치가 밀린 것으로 알려졌으며, 편지는 “월세가 많이 연체돼 계약이 해지됐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방을 비워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23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함께 숨진 채 발견된 모녀가 살던 월세방은 25일 오후 장판과 벽지를 뜯어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윤기은 기자

모녀는 복지부의 ‘복지 사각지대 발굴’ 대상자에 포함된 상태였다. 복지부는 지난 7월 모녀가 동시에 건강보험료·통신비 등을 연체한 사실을 확인하고 복지 사각지대 발굴 대상자로 지정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발굴 시점 기준 건강보험료는 14개월째 미납 상태였고, 통신비 연체와 금융 연체도 각각 6개월, 7개월 지속됐다.

하지만 이들은 실거주지인 서대문구로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전 거주지를 관할하는 광진구청은 지난 8월 두 차례 이들의 주민등록 주소지를 찾았지만, 모녀는 이사를 떠난 뒤여서 필요한 최소한의 지원이 이뤄지지 못했다. 서대문구청은 주소지가 이전 거주지로 등록돼 있어 서대문구로 모녀에 대해 통보가 온 것은 없었다고 했다.

건보료와 통신비 등을 장기연체하긴 했지만 금전적인 문제가 사망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에 따르면 모친 B씨는 교육공무원을 퇴직한 뒤 공무원 연금을 매달 수령하고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복지부는 이날 “서대문구 모녀 사망 사건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전날 발표한 대책에도 (서대문구 사건과 유사한) 사례 재발 방지를 위한 방안이 포함돼 있다. 차질없이 이행하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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