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닫고 사는 겨울마다 주문 폭발, 130만개 팔린 인생역전 아이디어
탈취제 전문 브랜드 BAS 만든 리체 김달현 대표
테무, 알리익스프레스 등 중국의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열풍이다. 운동화 한 켤레 1만원, 드론 항공 촬영 카메라 3만원 등 파격적인 가격이 한국 소비자의 마음까지 흔들고 있다. 중국 플랫폼 기업을 통한 직구가 늘면서 4년만에 중국발 해상 특송물의 통관 물량은 26배 이상 치솟았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수입·유통업을 하던 국내 중소기업이다. 중국에서 물건을 수입해 팔면, 같은 상품이라도 관세·부가세·안전 인증 등으로 비용이 발생한다. 가격 경쟁이 불가능한 이유다. 2003년 수입·유통사를 설립했던 김달현 리체 대표(48)는 이 위기를 비켜가고 있다. 위기를 기회 삼아 이 참에 ‘BAS’, ‘닥터키’ 등 자체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김 대표를 만나 자체 브랜드 개발기를 들었다.
◇악취 가리는 방향제가 아닌 제거하는 탈취제
BAS는 주방·세탁 등 생활용품을 취급하는 리체의 자체 브랜드다. 대표 상품은 탈취제다. 강한 향으로 악취를 덮는 방향제가 아닌 악취 분자에 달라붙어 중화시키는 방식이다. FTTI 시험연구원에서 암모니아, 트리메틸아민 등 냄새를 유발하는 물질을 90% 이상 제거한다는 시험 성적서를 받았다.
원통형 용기에 들어있는 겔 타입이다. 뚜껑을 열고 실링을 제거한 다음 다시 뚜껑을 닫아 냄새나는 곳에 놓아 두면 된다. 집에서 나는 생활 악취는 물론이고 새집 증후군, 반려동물 냄새, 담배 냄새, 곰팡이 냄새 등 각종 악취를 잡는 데 도움을 준다. 탈취력은 약 2개월간 지속된다.
◇6개월만에 월 매출 1억5000만원
경기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졸업식 3일 뒤 홀로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향적인 성격을 극복해 보고 싶었어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무턱대고 청도대에 입학했죠. 한 번은 친구를 따라 무작정 중국의 공장지대를 돌아 본 적이 있는데요. 이렇게나 넓은 곳에서 이렇게나 많은 공산품이 만들어지고 전 세계로 퍼진다는 게 새삼 신기하더군요. 이날을 계기로 무역, 유통, 수출입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2003년 10월 귀국과 동시에 창업을 결심했다. “마침 대학 동기였던 김진희 대표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함께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어요. 두 사람의 이름을 따 ‘J&D’라는 사명을 지었습니다. 각자 1000만원씩 모아서 용산 전자상가에 사무실을 냈습니다. 전기밥솥, 세탁기,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을 온라인 쇼핑몰에 올려 판매하는 일이었죠.”
처음엔 주문량이 하루 10건 남짓에 불과했다. “주문 하나 들어오면 둘이 신나서 직접 박스로 포장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온라인 쇼핑 붐이 일면서 주문량이 꾸준히 늘었습니다. 새벽 3시까지 쇼핑몰에 제품을 등록했습니다. 판매가 부진하다 싶을 땐 제품 문구를 수정했고 그러면 다음날 주문이 몇백 건씩 쏟아졌죠. 그렇게 6개월 만에 월 매출 1억5000만원을 달성했습니다.”
3~4년이 지나면서 성장세가 꺾였다. G마켓, 티몬, 위메프 등 다양한 이커머스가 한꺼번에 등장하면서 판매량이 급감했다. “동양매직 같은 제조사의 총판(생산자에게 물건을 한꺼번에 받아 도매상에게 판매하는 것) 역할도 하고 있었는데요. 제조사에서 일명 밀어내기를 하면서 수억원어치 재고가 쌓였습니다. 받을 수 있는 대출은 죄다 끌어 쓰고 27평짜리 아파트까지 팔았지만 적자는 메워지질 않더군요.”
소셜네트워크에서 위기 극복의 힌트를 발견했다. “카카오스토리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그 틈을 노려 ‘공동 구매’ 형식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전략을 세웠죠. 요즘으로 따지면 인플루언서가 인스타그램 팔로워들을 상대로 공동 구매 이벤트를 여는 것과 비슷한 방식입니다. 이 새로운 전략 덕분에 연 매출이 13억원에서 이듬해 68억원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수입 유통사에서 자사 브랜드 가진 기업으로의 변신
위기를 겪으며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공동 구매를 이용한 매출 견인도 한계가 있으리라고 봤습니다. 외부 환경이나 조건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자체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죠. 직원들 사이에서는 반대 의견이 많았어요.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력 대비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이유였죠. 하지만 오래 살아남기 위해선 자체 브랜드 개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1. OEM도 다 같은 OEM이 아니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생산 방식부터 도전했다. “OEM은 기존에 생산된 제품에 우리의 로고나 브랜드명을 사용해 제품을 제조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OEM이라고 하면 중국에서 싼값에 들여오는 저품질 상품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OEM도 다 같은 OEM이 아닙니다. 어떤 제품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브랜드 이미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하죠.”
수입할 제품을 찾기 위한 기준을 세웠다. “수요가 있는지, 안전한지, 가격 대비 가치가 있는지 등 3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제품만 수입했습니다. 항상 해외 출장을 위한 짐을 싸 뒀어요. 생산 공장을 보기 위해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요. 수입할 제품을 정했다면 생산 공장과 거래·계약을 체결합니다. 원산지·관세 관련 조사와 수입 허가 인증 등 절차를 밟고 난 다음 운송을 준비해요. 이후엔 관세 신고와 통관, 검역, 품질 검사 등의 단계가 기다리고 있죠. 단순히 싸게 떼다 파는 걸 상상한다면 OEM에 뛰어들 생각은 접는 게 좋습니다.”
2. 내 목소리를 담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ODM
제품에 로고나 브랜드명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디자인·제조 과정 등에 관여하는 방식을 OD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이라고 한다. “자체 브랜드 BAS의 탈취제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국 백악관에서도 사용한다고 알려진 제품을 찾아 원료를 수입했어요. 국내화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국내 제조 업체와 공장을 수소문했습니다.”
마니아를 만드는 것보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중요했다. “한국인에게 호불호가 없을 만한 향을 입히기로 했습니다. 향수나 방향제, 섬유유연제 등에서 보편적으로 쓰는 베이비파우더 향을 택했죠. 2014년 수입 원료에 향을 더해 국내화한 제품을 정식으로 출시했습니다. 물론 출시 직후 반응은 뜨뜻미지근 했죠.”
3. 마케팅 전략은 수시로 바뀌는 게 당연하다.
초기엔 광고비를 많이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최소 비용 최대 효과를 낼 전략이 필요했다. “TV, 라디오 등 전형적인 광고 매체를 벗어나서, 가입자가 많은 인터넷 카페나 방문자 수가 높은 블로그에 눈을 돌렸습니다. BAS 탈취제를 일단 한 번 사용하면 그 다음부터는 꾸준히 찾게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거든요. 이렇게 누적 사용자를 차츰 늘려갔습니다.”
새롭게 도전한 광고 시장엔 ‘유튜브’도 있다. “6년 전부터 구독자 수 130만명의 유명 유튜브 채널에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사장되기 마련입니다. 트렌드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마케팅 전략을 세워야 해요. 홈쇼핑 방송 한 번만 타면 하루에 몇천만원씩 매출을 올리던 시절이 있었죠. 매체가 다양해진 만큼 다양한 접근 방식이 필요합니다.”
4. 돈 벌어다 주는 건 결국 ‘사람’이다.
상주 직원은 총 23명이다. 사무실에서 16명, 공장엔 7명이 근무한다. “돈 벌어다 주는 건 결국 다 사람입니다. 뻔한 말이라 진부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10년 전 회사에 위기가 왔을 때 많은 직원들이 그만뒀는데요. 끝까지 남아서 아이디어를 짜고 새로운 상품 기획에 앞장섰던 직원이 6명 있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뿐입니다. 6년 전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때 그 직원들에게 새 차를 뽑아줬습니다. 그제야 제 맘이 좀 편해지더군요.”
직원들의 사기 진작과 동기 부여는 CEO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다. “대표로서 당근과 채찍 중 하나만 써야 한다면 전 ‘당근’을 택할 겁니다. 작년 봄 사이판으로 3박5일 워크숍을 다녀왔어요. 제 왼쪽 약지엔 결혼반지 대신 리체의 첫 브랜드인 ‘BAS’를 새긴 금반지가 있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맞춰 꼈죠. 이런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 때 의욕이 샘솟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삶을 소중히 여기자
BAS 탈취제 출시 5년째 되던 해인 2019년, 연간 판매량 20만개를 달성했다. 10년째인 올해는 10개월만에 판매량 130만개를 돌파했다. 자사 브랜드 BAS는 탈취제를 등에 업고 입지를 공고히 했다. “10년 전 위기를 겪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자체 브랜드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해 봤어요. 눈앞이 아찔해지더군요. 자체 브랜드 개발은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수입·유통 전문 회사로 출발했던 J&D는 2014년부터 ‘리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삶을 소중히 여기자(Life is Cherished)는 뜻이에요. 삶의 질 향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상품을 만들겠다는 의미죠. 수입으로 시작했지만 최근엔 역으로 수출길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브랜드가 알려지면서 호주, 미국 등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어요. 앞으로도 소비자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제품을 계속해서 만들 겁니다.”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