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필사의 힘

박윤미 수필가 2025. 9. 3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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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내가 원하는 곳에 다다르는 길은 마치 하나의 도로를 따라가는 것과 같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한 줄기로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왜 이렇게 자주 목표한 곳에 이르지 못하는 걸까.

오늘도 그랬다. 창작도 아니고 단순한 필사(筆寫)였는데, 한 문단을 다 쓰기도 전에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수많은 훼방꾼이 방문했다. 나는 '아주 친절하게도' 그 모두에게 응답한다. 물 한 잔 마실까? 이왕이면 둥굴레차를 끓여 마실까? 딸에게도 한 잔 줄까? 그렇게 차 한 잔 들고 자리에 앉으니 그사이 고양이가 내 노트 위에 앉아있다. 나는 녀석의 눈빛에도 화답한다. 이마와 목덜미, 그리고 앞발이 닿기 어려운 등까지 고루 긁어준다. 녀석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손길에 몸을 맡긴다. 나는 세면대로 가서 하얀 털이 묻은 손을 씻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다행히 녀석은 자리를 떴다. 지금 내게 꼭 맞는 문장을 발견했다.

"창작은 고독을 요한다. 방해 없는 집중을."
– 메리 올리버, <긴 호흡> 중

이 시인도 방해자가 결국 자기 자신인 경우가 많다고 고백한다. 나는 이국의 시인 앞에 바짝 다가가 또다시 필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또 궁금한 것이 떠오른다. 마치 시인처럼. 내일 날씨는 어떨까? 비가 온다고 했는데 일기 예보가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사소한 생각들이 계속 내 머릿속을 스친다. '한 페이지 쓰는 동안 깊이 몰두해 보기'가 내게는 큰 목표다.

중간에 다른 생각으로 빠지지 않기.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찾아와도 한 페이지 쓰는 동안은 집중하기. 언젠가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 보기. 내가 원하는 때에는 언제든 몰입의 세계로 떠날 수 있도록, 내 속에 엉성하게 나 있던 도로를 매끈하게 닦는 과정이다.

필사는 나와 나를 이어줄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수도 있다. 우리 학교에서는 교사 학습공동체 활동으로 모두 필사한다. 좋은 문장을 읽어주고, 그 이유를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근황과 고민, 성취와 기쁨이 자연스레 오간다. 교장 선생님도, 막내 교사도 모두 같은 자리에서 마음을 나눈다. 작은 학교라 가능했던 일이겠지만, 무엇보다 모두가 필사를 매개로 말할 용기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독(讀)자생존이라는 말이 있다. 또 '적자생존'이라는 말도 있다. 읽는 힘과 기록하는 힘, 이 두 가지가 개인의 성장과 공감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필사가 나의 생존력을 크게 확장시켜 주는 셈이다. 종이 위에 힘주어 좋은 문장을 옮겨 적는 동안 마음은 차분해지고 따뜻해진다. 과거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책 한 권을 늘리려면 직접 베껴 써야 했다. 오늘날의 필사는 책을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수련과 내적 성장을 위한 길이 되고 있다.

오늘도 나는 읽고 좋은 문장을 골라 한 줄 한 줄을 정성껏 쓴다.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고 손끝으로 글자를 내보낸다. 그리고 종이에 새겨진 글을 또다시 읽으니, 네 번 읽기다. 어제보다 집중력이 조금 더 생겼을 것이다. 게다가 작가의 문장에 화답하는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도 하니, 이건 너무도 기꺼운 선물이다.

깊은 밤, 풀벌레 소리가 단조로운 음을 반복하고 있다. 아침저녁 찬 공기에 과실이 야물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읽고 쓰기 좋은 계절이다. 읽다가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이 나오면, 꾹꾹 눌러 써보자. 용기 내어 내 속에 스며든 마음을 다른 이와 나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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