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망하고 벼랑끝 시작한 수박 농사, 나를 억대 농으로 키운 건

흑피수박 생산자 남강농산 강주홍 농부
함안에서 수박을 키우는 강주홍 농부. /더비비드

흑수박이라고도 불리는 흑피수박의 외양은 일반적인 수박과 좀 다르다. 익숙한 호피무늬 대신 표면 전체가 어두운 색을 띤다. 얼핏 보면 굴곡없는 호박 같기도 하다.

하지만 속을 쪼개면 과즙 가득한 빨간 속살이 펼쳐진다. 우리가 아는 그 수박이 맞는데, 맛이 좀 특별하다. 과육은 쫀쫀하고 당도가 높다. 함안에서 남강농산을 운영하는 강주홍 농부(63)는 흑피수박을 닮았다. 오랜 농사 생활에 얼굴은 까맣게 탔지만 내면은 수박에 대한 다홍빛 사랑으로 가득하다. 강 농부를 만나 수박 농사로 인생 2막을 맞이한 사연을 들었다.

◇봄에 더 맛있는 수박의 정체

흑피수박의 속살. /더비비드

경상남도 함안군은 우리나라 최초로 하우스 수박을 재배하기 시작한 수박 주산지다. 남강과 낙동강을 따라 펼쳐진 평야지대로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 차이가 커서 고당도의 수박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다. 작년 함안군에서 3만5000t의 수박을 생산했다.

함안군조합공동사업법인 유통센터 전경. /함안조공

‘함안군조합공동사업법인’(함안조공)은 함안군내 대표적인 수박 생산 지역인 가야, 삼칠, 대산, 군북 4개 농협이 출자해서 만든 농산물 전문 유통회사다. 주요 작물인 수박을 필두로 단감, 멜론, 포도 등의 농산물을 취급한다. 성과를 인정받아 2021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실시하는 전국산지유통조직종합평가에서 전국 1위를 했다. 2023년 310억원의 매출을 냈다.

요즘 주력하는 작물은 껍질이 짙은 녹색을 띠는 흑피수박이다. 수박은 한여름이 제철이라는 편견을 깨고, 봄에서 초여름까지가 가장 맛있다. 일반 수박보다 당도가 2브릭스(brix) 이상 더 높고, 식감이 아삭하다. 한 입 베어물면 익숙한 듯 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다.

◇IMF때 부도, 농사를 택해야 했던 가장

강 농부는 IMF때 부도를 맞고, 생존을 위해서 농사를 택했다. /더비비드

인천에서 직장을 다니다 나고 자란 의령의 옆 동네 함안에서 사업을 했다. 안온하고 행복한 삶이었다. 30대 후반, 외환금융위기 직격탄을 맞기 전 까지는 말이다. 건축 경기가 불황이 되면서 운영하던 톱밥 공장이 부도를 맞았다. 거래처들도 줄도산 했다. 연일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 힘들었겠어요.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스스로 세상을 하직했다는 무서운 뉴스가 일상이었죠. 차마 그럴 순 없지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92년생, 94년생 두 딸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아직은 젊으니까 일어서야겠다는 마음으로 농사를 시작했죠. 그전까지는 제가 농사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빌린 땅에서 농사를 시작한 강 농부는 현재 억대농이 됐다. /더비비드

- 어떻게 시작했나요.
“2000년대 초반에, 4628m2(1400평) 부지를 빌려서 하우스 7동 규모의 농장을 꾸렸습니다. 수박농사를 시작했죠. 이 품종을 정한 거창한 이유도 없었어요. 이 지역이 수박 주산지고, 수박농사에 종사하는 지인이 있어서 뛰어든 거죠. 처음엔 모든 게 생소하고 어려웠어요. 궁금한 건 이웃 농가 선배들에게 물어보고, 조언도 구하면서 차근차근 해나갔습니다.”

◇그를 억대농으로 만들어준 고마운 작물

흑수박의 탐스러운 모습. /더비비드

청년기에 겪은 좌절에 대한 보상인지, 수박농사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강 농부의 농장은 1만4876m2(4500평), 하우스 15동 규모로 커졌다. 2023년 기준 연매출은 2억원으로, 이 중 비용 30%를 제하면 1억4000만원의 순익이 남는다.

그를 억대농으로 만든 일등공신은 흑피수박이다. 2017년 이 품종을 처음 도입한 이후 차츰차츰 비중을 늘렸왔다. 현재 전체 수박 재배량 중 흑피수박이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달한다. 1년 생산량을 무게로 환산하면 일반 수박 15t, 흑피수박은 60t이다.

- 흑피수박을 도입할 계기가 궁금합니다.
“흑피수박은 일반 수박보다 맛이 좋고 당도도 높아서 값이 비싼 편입니다. 처음엔 소득을 올릴 겸 호기심 반으로 재배를 해봤는데요. 제가 흑피수박을 유독 잘 키웠나봅니다. 저희 농장에서 재배한 흑피수박들이 호응을 얻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점점 비중을 늘려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수박 농장을 둘러보고 있는 강 농부. /더비비드

- 재배과정을 알고 싶어요.
“매년 두 차례에 걸쳐 키웁니다. 1기작 기준으로 12월 중순에 모종을 밭에 옮겨 심는 정식(定植) 작업을 합니다. 4달간 키운 후 4월부터 출하하죠. 2기작은 3월에 정식해서 6월 중순부터 출하해요. 1기작 대비 2기작이 짧습니다. 겨울엔 일조량이 적고 주변 온도가 낮아서 과실이 천천히 자라는 반면 기온이 높아지면서 빨리 자라거든요. 그래서 1기작 과실이 더 맛있습니다. 긴 시간 천천히 자라면서 보다 많은 양분을 흡수하거든요. 육질이 아삭하고 단단하죠.”

- 각별히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요.

“수박은 일교차가 크고, 토지가 비옥하며, 물이 풍부한 환경에서 잘 자랍니다. 가장 중요한 건 농부의 노력과 땀입니다. 수박의 대부분이 수분이라 물을 마냥 많이 주면 된다고들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생육 상태를 봐가면서 음수량을 조절해야 합니다. 예컨대, 비가 많이 온 다음 날 잎에 활기가 없고 무겁게 처져 있어요. 그러면 물 주는 걸 하루 건너뜁니다. 반대로 잎이 바싹 말라 있으면 충분한 물을 줍니다. 수박들의 상태를 아주 꼼꼼히 관찰해야 하죠. 온도도 중요합니다. 평균 30도의 온도를 유지해야 해요. 대낮엔 너무 더워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야 작업할 수 있습니다. 모자와 수건은 필수죠.”

강 농부는 여러 지원을 받은 덕에 농사에 집중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더비비드

- 이렇게 노력해도 뜻대로 안되는 날도 있겠지요.
“농사의 90%는 하늘이 짓는다는 말이 있어요. 농부가 노력을 해도 폭우나 일조량 부족 같은 기후 문제는 맞설 방법이 없어요. 인간의 코로나처럼 식물 바이러스나 외래충의 등장도 늘 도사리고 있는 위협이죠. 올해는 일조량이 부족해서 기형과가 많았습니다. 5kg는 돼야 유통할 수 있는데 3kg 안팎의 작은 과실이 많았어요. 전반적으로 상품성이 떨어져 유통량이 줄고, 소득도 감소했죠. 평년 대비 소득이 30%는 쪼그라든 것 같아요.”

- 부침이 크겠어요.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정부와 지자체와 함안조공이 연계해서 농가에 여러가지 지원을 해줍니다. 수확운송비, 공동선별비, 상품화 비용, 물류 운송비 등을 보전 받았어요. 당도가 기준치보다 높으면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고당도 생산비도 지원받았습니다. 이런 정책은 농가에 큰 동기부여가 됩니다.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함안군의 농부들은 농사에 전념하며 고당도의 수박을 많이 생산할 수 있었어요. 비용을 절감한 만큼 소득을 올릴 수 있고요. 저 역시 많은 노하우를 쌓았어요.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지만 개인적인 고생과 지원책이 맞물려 저만의 재배 기술을 완성했죠.”

◇수박, 함안 사람들은 이렇게 먹어요

함안조공 선별센터의 모습. /함안조공

강 농부는 땀으로 키운 수박을 전량 함안조공에 출하한다. 입고된 수박은 당도와 크기를 기준으로 공동 선별한다. 당도 기준은 11브릭스, 크기 기준은 5kg이다. 올해부터는 13브릭스 이상의 수박으로 프리미엄급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추가했다. 작업이 완료된 수박은 함안군 농산물공동브랜드 ‘e-아라리’ 이름을 붙여서 유통된다. 브랜드는 품질 보증 수표 역할을 한다. 하나로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의 오프라인 마트 뿐만 아니라 온라인몰에서 흑피수박을 구매할 수 있다.

- 언제 가장 큰 보람을 느끼나요.
“2021년 흑피수박으로 하우스 한 동당 1000만원의 소득을 올려서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라 한 매체에도 소개됐죠. 그 이후에도 꾸준히 높은 소득을 창출했어요. 흑피수박을 도입한 후 소득이 평균 50% 이상 뛰었어요.”

두드렸을 때 맑은 장구소리가 나는 수박이 맛있다. /함안조공

- 쉽지 않은 여정이었겠네요.
“많이 힘들었죠. 처음엔 제 땅도 없이 빌린 땅에서 농사를 했어요. 땅을 하나하나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죠. 게다가 수박 하우스는 일종의 일회용 하우스입니다. 작기가 지나면 철거했다가 때가 오면 다시 설치하는 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닙니다. 비용도 그만큼 들고요. 고온의 하우스에서 쭈구려 앉아서 작업해야 하니 육체적 부침도 크고요. 두 딸에겐 이 일을 권하고 싶지 않아요.”

- 앞으로의 계획은요.
“귀농인을 대상으로 후계자 교육을 하고 싶은데 그런 사람이 적어서 안타깝습니다. 농촌 지역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선배 농부들 상당수가 은퇴하거나 돌아가셨어요. 그만큼 종사자와 재배 면적도 줄어들었죠. 제 계획은 단순해요. 계속 농사를 하고, 노하우를 전파하고. 수박은 제 삶의 활력소입니다. 많은 분들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맛있는 수박을 먹어봤다’는 말을 들었어요. 뿌듯했죠. 이제 도시의 삶에 미련은 없어요. 75살까지는 이 일을 하고 싶어요.”

흑피수박을 먹고 있는 강 농부와 함안조공 관계자. /더비비드

- 맛있는 수박 고르는 팁 알려주세요.
“수박이 잘 익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톡톡 때려보세요. 맑은 장구소리가 나면 잘 익었다는 뜻입니다. 외관상으로는 꼭지 부분이 안으로 함몰된 과실이 당도가 높습니다. 수박을 먹을 때 깍두기처럼 칼로 잘라서 먹는 것 대신 최대한 크게 썰어서 숟가락으로 퍼서 먹는 것을 추천합니다. 고유의 향과 식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습니다. 함안 사람들은 다 그렇게 먹어요.”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