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저금리·외국인에 땅값 뛰는 일본[글로벌 현장]
일본의 땅값이 크게 오르고 있다. 잇따른 재개발, 저금리 환경에 더해 일본을 찾는 외국인 관광 수요가 땅값을 밀어 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방일 외국인 관광객은 일본 백화점 등 유통주 주가까지 올리고 있다.
도쿄·오사카·나고야 일제 상승
일본 국토교통성이 발표한 2024년 기준지가에 따르면 주택지와 상업지 등 전체 용도의 전국 평균은 전년 대비 1.4% 상승했다. 3년 연속 플러스를 기록했다. 올해 상승률은 일본의 ‘거품 경제’가 꺼지기 시작한 1991년 3.1%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용도별로 보면 주택지는 0.9% 상승했고 상업지는 2.4% 올랐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3대 대도시권에서 땅값 상승이 두드러졌다. 도쿄권이 4.6%, 오사카권과 나고야권은 각각 2.9% 올랐다. 일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은 19년 연속 도쿄 긴자에 있는 ‘메이지야 긴자 빌딩’이 차지했다. 이곳의 기준지가는 평당 4210만 엔으로 전년 대비 5.0% 상승했다.
3대 대도시권은 잇따른 재개발이 땅값을 끌어올렸다. 도쿄 시부야역 인근 한 지역은 상승률이 지난해 4.8%에서 올해 18.1%로 크게 높아졌다. 오사카에서도 대규모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오사카역 북쪽에는 9월 ‘그랑 그린 오사카’ 복합빌딩과 공원 등이 먼저 개장했다.
일본은행이 지난 7월 기준금리를 연 0.25%로 인상했지만 미국, 유럽 등에 비해선 여전히 완화적 금융환경이 지속되고 있다. 글로벌 부동산 서비스 기업 JLL에 따르면 일본의 부동산 투자 규모는 올해 상반기 약 2조6000억 엔으로 전년 동기 대비 1.2배 확대됐다.
저금리에 따른 주택 수요도 크게 작용했다. 도쿄 이다바시역과 가까운 신주쿠구 한 지역은 17.1%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도심부를 중심으로 주택 수요가 견조한데 고소득 맞벌이를 지칭하는 ‘파워 커플’이 이를 이끌고 있다. 도쿄 23구의 신축 맨션 평균 가격은 지난해 처음으로 1억 엔을 넘어섰다.
외국인 관광객에 지방도 들썩
주목할 점은 일본 지방 땅값도 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방 4대 도시로 꼽히는 삿포로, 센다이, 히로시마, 후쿠오카를 제외하고도 평균 땅값이 전년 대비 0.2% 상승했다. 지방 4대 도시를 제외한 기타 지역의 땅값이 오른 것은 1992년 이후 32년 만에 처음이다.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을 중심으로 관광 수요가 증가한 것이 큰 이유다. 반도체 공장 신설도 한몫했다.
성장하던 지역뿐 아니라 주변 지역으로 땅값 상승세가 확산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나가노현 북부의 유명한 스노 리조트인 하쿠바무라 펜션이 밀집한 지역은 30.2% 상승해 전국 상업지 중 4위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관광객 증가로 호텔 개발이 진행되는 동시에 이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의 주택 수요가 인근 오마치시 등으로 파급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홋카이도 스키 명소인 니세코초 지역의 상승효과는 인근 마카리무라로 파급돼 이곳의 주택지도 전년 대비 18.2% 올랐다.
세계 최대 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의 진출로 들뜬 구마모토현도 눈에 띈다. TSMC 1공장이 위치한 기쿠요마치는 16.9% 상승해 전국 기초지자체 중 상승률 6위를 차지했다. 기쿠요마치 동쪽에 있는 오쓰초는 19.4%로 1위를 기록했다. 공장 근로자와 가족의 유입이 잡화, 가구, 의류매장 출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 내 모든 지역의 땅값이 오른 것은 아니다. 노토반도 등 지진과 폭우 피해지역은 하락세가 두드러졌다. 주택지 중 하락폭이 컸던 전국 10개 지역을 보면 모두 노토반도가 속한 이시카와현이었다. 땅값이 가장 많이 하락한 이시카와현 와지마시 중심 지역은 전년 대비 14.8% 떨어졌다.
엔저 즐기는 미국인이 소비 주도
일본정부관광국(JNTO)이 발표한 방일 외국인 통계를 보면 8월 일본을 찾은 외국인은 293만3000명으로 작년 같은 달보다 36.0% 증가했다. 8월 기준으로 역대 최대치다.
국가별로 보면 한국이 1년 전보다 7.6% 증가한 61만2100명으로 중국(74만5800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한동안 방일 외국인 중 한국인이 최다였으나 올해 7월부터 중국인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8월에 일본을 방문한 중국인은 작년 8월 대비 거의 두 배로 늘었는데 중국의 여행 규제 완화와 항공노선 증편 등에 따른 것이다.
올해 1~8월 누계로 보면 한국인이 581만1900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중국인(459만5200명), 대만인(411만5200명), 홍콩인(180만1800명), 미국인(176만8100명) 순이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르면 내년부터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국내 공항에서 일본 입국 심사를 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일본이 주목하는 것은 미국인이다. 한국인, 중국인보다 체류 기간이 길어 씀씀이가 크기 때문이다. 작년 기준 관광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한 미국인의 평균 숙박 일수는 11일로 전체 평균(6.9일)보다 4일가량 길었다. 중국인(7.5일), 한국인(3.6일)과 비교해 미국인 관광객은 더 오래 머물며 돈을 쓰고 있다.
일본 미쓰이스미토모카드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올해 1~6월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의 결제액은 코로나19 전인 2019년 상반기 대비 40% 증가했다. 결제액 상승을 견인한 것은 미국인 관광객이다. 결제액이 3.2배 늘었다. 일본 방문 상위 5개 국가 관광객 중 가장 높은 성장세다. ‘엔저’를 즐기려는 미국인이 크게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일본인 국내 소비가 경제 관건
외국인 관광객은 일본 땅값만 끌어올린 것이 아니다. 백화점 등 일본 유통주 주가도 오르고 있다. 일본 최대 백화점인 이세탄 신주쿠 본점 등을 운영하는 미쓰코시이세탄홀딩스가 대표적이다. 관광 수요 확대에 따른 기대감으로 매수세가 강한 종목이다. 미쓰코시이세탄의 주가는 올해 들어 9월 24일까지 42%가량 상승했다.
일본 정부는 올해 관광객 소비지출이 8조 엔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직전 최대였던 작년 5조3000억 엔의 1.5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일본 정부는 2030년까지 외국인 관광객 소비 규모를 15조 엔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도 세웠다.
일본이 걱정하는 것은 일본인의 국내 소비다.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개인소비가 늘어야 일본 경제가 살아나는 구조다. 그동안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임금 인상을 독려한 이유다. 이를 통해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겠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최근 들어 개인소비가 조금씩 살아날 움직임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최근 일본 주요 기업 사장 14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71.7%가 경기 상황에 대해 ‘확대’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실질임금이 플러스로 돌아서며 개인소비가 회복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6월 실질임금은 2년 3개월 만에 전년 동월을 웃돌았다.
새 일본 총리의 과제도 임금과 물가의 선순환을 통한 디플레이션 탈출이다. 모타니 고스케 일본종합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소비를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은 청년 임금 인상, 여성의 취업과 경영 참여 촉진, 외국인 관광객의 증가뿐이라고 주장했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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