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있는 산과 바다 울진의 가을은 깊다 [대한민국의 숨, 울진]

남효선 시인, 언론인 2024. 10. 14.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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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남대천의 '은어아치 보행교'. 울진의 왕피천과 남대천은 은어와 연어가 회귀하는 곳으로 이 보행교는 동해안 최고의 해넘이와 해돋이 명소다.

울진은 한걸음에 달려가면 바다를 만나고 한 걸음을 디디면 산야를 만나고, 한 걸음을 내달으면 자연이 빚은 천연온천을 품은, 전국 유일의 '삼욕三浴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전국 어디에도 울진처럼 자연의 혜택을 온몸으로 받은 곳은 없다.

울진의 가을은 부드럽다. 속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그렇고, 금강소나무를 품은 산야가 그렇다.

15km에 이르는 불영계곡은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칭 답게 깊은 계곡 사이로 기막힌 절경을 군데군데 빚어놓았다. (오른쪽) 불영계곡에서 불영사佛影寺를 빼놓을 수 없다. 홍수라도 지면 거대한 수로로 변할 것 같은 협곡에 절집이 앉아있다. 불영사가 앉은 자리는 실로 절묘하다. 물의 위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둔덕이면서도 깊은 협곡 안이어서 모진 바람의 입김도 미치지 못할 자리다(왼쪽).

노장사상의 흔적 '단하동천丹霞洞天' 품은 울진 불영계곡

'붉은 노을이 걸린 지상의 유토피아'로 여기는 '단하동천丹霞洞天'을 품은 울진 불영계곡佛影溪谷이 푸른 물을 하늘로 퍼트리며 물안개에 싸여 있다. 불영계곡을 끼고 신라 고찰인 불영사로 이어지는 길은 '연하일휘煙霞日輝'의 길이다. 불영계곡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杏谷里에서 서면 하원리下院里 불영사佛影寺에 이르는 15㎞ 규모의 기암절벽과 속살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맑은 광천光川(빛내)을 품고 있는 수려한 계곡이다. 그 품세가 인공으로는 도무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기괴하고 수려해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난 1979년 12월에 명승 제6호로 지정되었고, 이어 1983년 10월에 군립공원으로 각각 지정됐다.

불영계곡은 누천년 제자리를 지키며 바람과 비와 햇살에 제 몸을 맡겨 창옥벽蒼玉壁·의상대義湘臺·산태극山太極·수태극水太極·명경대明鏡臺 등 30여 개의 명소를 사람들에게 선사했다.

자연풍광만 선사한 게 아니다. 불영계곡은 울진지역의 역사와 삶을 오롯이 반영하는 스토리텔링의 보고이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불영계곡을 성역으로 삼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투영해 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의상대사와 구룡九龍의 쟁투'이다.

의상대사가 울진 온정 백암산 기슭에 '백암사白巖寺'를 창건하고 고개를 들어 서쪽을 보니 '석가모니가 수도하던 인도의 천축산을 닮은' 산이 있어 그곳을 향해 지팡이를 던졌다.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사찰을 짓기 위함이었다.

지팡이가 꽂혀 있는 곳에 당도하니 아홉 마리의 용이 길을 가로막았다. 의상대사는 혼신을 다해 구룡과 쟁투를 벌여 여덟 마리의 용을 퇴치하고 마지막 한 마리와 일진일퇴의 사투死鬪를 펼친 끝에 마침내 '주천대酒泉臺(현 근남면 행곡리 구미마을)'에서 용을 물리쳤다.

의상대사는 아홉 마리의 용과 인연을 빌어 사찰을 창건하고 '구룡사九龍寺'라 이름 지었다. 이후 구룡사는 "용이 살던 못에 부처의 설법 형상"이 비치자 오늘날의 '불영사'로 개칭했다.

의상과 구룡이 석 달 열흘을 두고 벌인 사투로 형성된 것이 오늘날의 '감입사행계곡'인 불영계곡이다. 의상에게 패한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주천대'는 또 다른 세계관인 유학儒學의 울진지역 발상지이다.

불영사로 들어서는 초입은 '붉은 노을이 걸린 지상의 낙원'이라는 뜻을 가진 단하동천의 세상이다. 동천洞天은 '천상의 동네'라는 의미로 도가道家사상을 품고 있다.

웅장한 불영계곡을 밟고 계곡이 빚은 순백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비처인 단하동천에서 불영사로 이어지는 길은 가히 천상으로 오르는 절경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부인의 전설 깃든 월송정 해변

동해안 최고의 '일출명소'…울진 남대천 은어銀魚 아치 보행교

은어와 연어 회귀천인 울진 왕피천과 남대천, 말루.현내항을 잇는 '남대천 은어 아치 보행교'는 동해안 최고의 해넘이와 해돋이 명소이다.

바다와 강이 맞닿은 곳에 조성된 은어 아치 보행교를 배경으로 동해의 부상扶桑을 박차고 떠오르는 일출은 그야말로 '장엄'이다. 때문에 사철 전국 사진 마니아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최근에 울진군은 은어 아치 보행교와 이마를 맞댄 염전해변에 오토캠프장을 조성했다. 염전해변은 1960년대까지 왕성하게 생산되던 전통 천일염인 '울진 토염土塩, 炙塩' 생산 현장이다. 이곳 울진 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은 '울진 십이령 바지게길'을 통해 영주, 봉화, 안동 등 영남내륙으로 유통되었다. 염전해변과 맞닿은 곳은 우리나라 '친환경생태농업'의 발상지인 '왕피천 공원'이다.

작은 동물원과 아쿠아리움, 곤충박물관, 왕피천케이블카, 안전체험관, 놀이공원 등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즐길거리가 수두룩하다.

또 인근에는 '울진의 젖줄'인 왕피천을 끼고 발달한 망양정해수욕장과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을 만날 수 있다.

평해사구습지 생태공원

평해사구습지 생태공원

평해사구습지 생태공원은 구산해수욕장, 월송정 등과 이어진 빼어난 해안선과 배후습지를 활용한 생태공원이다. 이곳은 훼손되지 않은 해안사구와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자연을 느끼고 호흡할 수 있어 다른 생태공원과 차별화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습지 위에 만들어진 데크길을 걸으면서 습지 환경과 조류관찰까지 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있는 곳이다.

원래의 망양정이 있던 울진 기성 망양해변.
겸재 정선의 '망양정도'.

신라 수로부인 연정의 현장… 기성 조도잔鳥道棧

코발트빛 바다와 붉은 장엄이 연출하는 빛깔은 가히 자연만이 가져다주는 '황홀'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선생이 일찍이 울진 망양정을 찾아 직접 확인한 '천근天根(하늘뿌리, 수평선)'이 '푸른빛과 붉은빛이 어우러진' 형용할 수 없는 빛깔을 선사한다.

망양정이 본래 기성면 망양리에서 근남면 산포리로 이전되기 전 송강 정철 선생이 밟은 망양정은 바다와 맞닿은 해안 절벽 위에 자리를 틀고 있었다. 이는 조선조 최고의 진경 화가인 겸재 정선의 '망양정도望洋亭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의 '망양정도'는 그야말로 해안 기암절벽에 단아한 모습으로 푸른 동해를 조망하는 당시의 망양정을 실사實寫처럼 보여 준다. 파도가 햇볕에 흰 포말을 유리알처럼 부수며 해안 절벽을 오르는 모습은 상상 속에서도 황홀 그 자체이다.

망양정에는 사뭇 가슴을 치는 수로부인의 연정이 오롯이 녹아 있다. 남편인 강릉 태수를 만나기 위해 당시 신라 수도인 동경(현 경주)을 떠나 험한 파도 넘실대는 바닷길을 따라 먼 여정에 나선 수로부인이 울진 땅 기성에 도착해 '열정의 스캔들'에 빠진다.

삼국유사는 수로부인이 얽힌 소중한 사랑의 노래 두 편을 남겼다. 하나는 '헌화가獻花歌'이며 또 하나는 '해가海歌'이다.

관동제일루로 불리던 망양정 옛터.

일설의 주장대로 영덕 굴곡포가 '헌화가의 발상지'일 경우 울진군 월송정과 기성 망양정 일원은 삼국유사의 '해가'의 발상지인 '임해정臨海亭'이 유력해지며 이와 반대로 삼척시의 주장대로 삼척 새천년도로 일원이 '해가의 발상지'이면 울진은 '헌화가의 발상지'로 추정된다.

최근 일부 사학자들과 울진지역 향토사학가들은 "울진 기성 옛 망양정 부근이 수로부인 관련 배경지"임을 비정한 바 있다.

실제, 조선 숙종·영조 대의 뛰어난 문인인 옥소玉所 권섭權燮(1671~1795)의 '옥소고玉所稿' '유행록遊行錄' 2권에 "임의(해?)대臨猗(海?)臺는 망양정 아래에 있다"는 기록에 미루어 옛 망양정 부근이 임해대(정)로 확인될 경우, 울진 망양정 부근이 '수로부인 관련 역사문화적 배경지'로 새롭게 조명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옥소 권섭 선생의 '기성팔경' 등 옛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기성 망양리의 해안 절벽을 잇는 옛길인 '조도잔鳥道棧'의 잔존으로 미루어 기성 망양 해안이 '수로부인의 해가의 현장'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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