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난희의 느린 산] 대신 걸어 줄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 줄 수는 있다

남난희 2024. 10. 8. 07: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소년보호처분 아이들과 2박3일 불수사도북 도전

남난희는 1984년 여성 최초로 태백산맥을 겨울에 단독 일시종주했으며, 1986년 여성 세계 최초로 네팔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했다. 1989년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했으며, 74일간의 태백산맥 단독 일시 종주기를 담은 <하얀 능선에 서면(1990년)>을 펴내 등산인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부터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2022년 백두대간을 선구적으로 알린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알베르 마운틴 상을 수상했다.

수락산 능선의 바위에서 경치를 즐기고 있다. 아이들이 산행이 처음인데다 폭염의 날씨까지 더해 만만찮은 도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서울의 산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지리산에 온 후 특별히 어딘가에 있는 다른 산에 가고 싶은 열망이 없어졌다고 해야 할까? 주변의 산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또 언제부터인가 모든 산이 같은 무게,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어떤 산을 가든지 내가 지금 오르는 산이 가장 좋은 산이다. 그 산이 히말라야건 미국 PCTPacific Crest Trail이건 내가 매일 아침 오르는 불일폭포 코스이건 그 느낌, 그 감동은 같다는 것이다.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일부러 다른 곳의 산은 가지 않고 주변의 산들과 잘 지낸다. 그런데 이번에 일이 하나 생겼다. '소년보호처분'을 받은 아이들이 백두대간을 가기 위한 훈련으로 서울의 '불수사도북'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을 이어서 종주하는 42km의 만만찮은 코스이다.

도봉산의 화려한 암봉들.

나야 어느 산을 가도 괜찮지만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몇 년 전 보호관찰 아이와 지리산둘레길을 걸은 적 있었다. 그때 나의 부족함을 봤기 때문인데 또 다시 나의 부족함을 확인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이 8명이고 어른도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어쨌거나 나의 한 걸음, 한 마디가 아이들과 소통이 되기를 기대하며 서울로 향했다.

그날 내가 만난 아이들은 훤칠한 키에 늠름한 몸, 그냥 보면 다 자란 청년 같았지만 아직 얼굴에는 여드름이 있는 앳된 소년들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 모르는 아이들은 우선 바깥 세상에 나온 것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경치가 트인 도봉산의 바위에 오른 청소년들.

31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 산

그렇게 불암산을 시작으로 2박3일 동안 무수히 많은 오르내림을 할 것이다. 아이들은 알까? 사람살이와 산행은 비슷하다는 것을. 산길에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고 평지도 있듯이 우리 인생도 힘들 때도 있고 즐거울 때도 있고 평온할 때도 있다. 또한 인생을 함께 살아 줄 수는 있지만 대신 살아 줄 수 없듯이 산행 또한 그렇다. 산길을 함께 걸을 수는 있지만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스스로 인생을 살아야 하듯이 산행도 스스로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조금 많이 살아본 사람으로 잠시 그들의 동행자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힘들어 할 때 함께 힘들어 하고 용기를 주고받고, 서로에게 위로받고 서로를 치유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불암산을 오르는 소년보호처분 아이들.

수도권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이 내게는 익숙지 않아서인지 딴 세상 같았다. 그동안 내가 산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온통 겹쳐진 산들만의 세상이었다.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많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은 수많은 건물들, 주로 아파트일 텐데 그렇게 사람이 많은가 싶어서 촌놈 티를 팍팍 냈다.

내가 서울을 떠난 지 31년 만에 세상은 무슨 일이 난 것이 분명하다. 촌에는 빈집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곳의 저 많은 집에는 사람이 모두 살고 있는가? 그 와중에 이성계가 도읍지는 끝내주게 잘 잡았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가까이 수락산, 수려한 도봉산, 빼어난 북한산, 갑자기 그리움이 확 몰려왔다.

수락산장에서 본 일출.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의 깨끗한 일출이었다.

한때는 내 집처럼 드나들던 북한산이, 인수봉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우뚝해서일까? 그랬다. 젊은 날 한때 바위에 미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바위가 산의 전부인 줄 알았고 주말에 바위 하러 가기 위해 한 주일을 살았다. 바위와 사랑에 빠져서 그 무엇도 안중에 없었다. 그 딱딱한 바위를 부드러운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다듬고 만지고 안았다.

내게도 그런 세월이 있었다. 불암산과 수락산에는 자주 오지 않았지만 바위의 감촉은 같아서 그리움이 샘솟았다. 손에 쫙 달라붙는 것 같은 그 화강암의 감촉! '아! 바위 하고 싶다.' 잠시 맹렬하게 바위를 밝히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한국산악회에서 리모델링 중인 수락산장에서 하룻밤 묵었다.

우리 일행이 많기도 했지만 산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의 걸음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도봉산 뒤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헤드랜턴을 꺼낸다. 첫째 날 숙박지는 수락산장이다.

수락산장은 1970년대 산장건립 사업 일환으로 생겼으며, 현재 수도권 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산장이다. 1980년대까지 무인산장이나 군부대 숙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 후 개인이 인수해서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사)한국산악회에서 회원의 모금으로 2023년 4월 인수해서 6개월간 내·외부를 리모델링해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아직 손 볼 곳이 많이 있고 여전히 공사는 진행 중이다. 그들의 노고가 곳곳에 보인다. 산장 바로 아래 샘물이 있고 주변에 테이블이 있어서 등산객이 쉬어가기가 그만이다. 아이들은 산장 밖에 텐트를 쳤고 나는 산장 안에 침상이 있어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불암산 초입에서 전체적인 산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이들 없이 혼자 걸은 북한산

둘째 날, 수락산장에서 일출을 보며 출발해서 도봉산으로 향한다. 도봉산도 내게는 추억이 많은 곳이다. 1970년대 후반, 아직 본격적인 클라이머가 되기 전이었는데 그때는 매주 도봉산으로 갔다. 망월사로 올라가서 포대능선을 타고 우이동으로 내려오고는 했는데 그 당시 포대능선에는 쇠줄을 설치하기 전이었다.

맨몸으로 그 바위들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렸는데 지금 보니 아찔하기만 하다. 그때 도봉산 능선을 지나다가 선인봉이나 우이암에서 바위 하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부러워하고는 했던 기억도 난다. 어떤 때는 한나절을 그러기도 했다. 손에 땀이 나도록 꼭 쥐고서 등반자의 손과 발을 따라 오르기를 무수히 했다.

날씨는 이틀째 너무 맑아서 서울 시내 전체와 한강, 저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보였다. 펼쳐진 산들은 한남정맥이나 한북정맥의 산들일 것이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동동 떠다니고, 우뚝한 바위들은 서로의 위용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각자 멋진 포스를 내뿜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을 부러워할 만하다. 전철 한 번으로 이렇게 멋진 산들을 올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 몸 상태로 북한산을 오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도봉산까지만 산행하고, 해단했다. 아쉬움에 홀로 북한산에 올랐다. 아이들과 조만간 백두대간을 종주해야 하는데 걱정보다는, 당장은 그리웠던 북한산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패산은 생략하고 왔지만 아이들 중 몇 명이 힘들어 한다. 왜 아니겠는가? 생전 처음 무거운 짐을 메고 뙤약볕에 긴 산길을 올라가고 또 내려와야 하니 말이다. 왜 물은 마셔도 마셔도 갈증만 더 심해지는지, 왜 길은 끝이 없는지, 왜 오르막만 계속 되는지. 왜 바위길만 있는지 불만이 쏟아진다.

하지만 오늘 가야 할 길이 있으니 어르고 달래며 길을 재촉한다. 살결이 여린 아이들이 사타구니가 쓸려서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어떤 아이는 바윗길에서 손을 내밀고 스틱을 잡아 주기도 하고 물을 나눠 주기도 한다. 기특하고 고맙다. 사람살이는 어디나 비슷한 것이다.

둘째 날 저녁도 헤드랜턴을 꺼내야 했다. 아이들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험한 길을 너무 길게 잡은 탓이다. 순천향대학병원 임훈 교수님께 긴급 SOS를 요청했고, 한걸음에 달려와 주셨다. 교수님은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치료해 주고 갔다.

다음날, 아이들 몸 상태가 북한산은 무리라고 판단해 해단하고 백두대간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짧은 날이었지만 아이들이 직접 땀을 흘리며 걷고, 함께 밥을 해먹고, 함께 힘겨워하고, 함께 웃으며 보낸 시간의 소중함이 남겨지기를 기대한다.

그냥 가기 아쉬워서 그 다음날 나는 북한산으로 향했다. 역시 북한산은 내 그리움이다. 바위 감촉을 손끝으로, 온 몸으로 느끼며 산행을 마무리 했다. 아이들 덕분에 서울의 산들을 두루 만나고 왔다. 감사한 시간, 감사한 만남이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