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기호일보 2025. 12. 2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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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용 한국외국어대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
서안시 임동구(臨潼區) 여산(驍山) 북쪽 기슭에 있는 진릉지궁(秦陵地宮). 만리장성과 함께 진시황제의 능을 조성하느라 많은 백성이 희생됐던 자취가 서려 있다. <사진=문승용 제공>
문승용 한국외국어대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
진나라와 시황제를 다루면서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칠 수는 없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만리는 약 4천km가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매우 길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2012년 중국 정부는 만리장성의 길이를 2만1천196.18km라고 공식 발표했다. 고구려 때 축조한 만주지역 장성까지 다 보태어 가능할 만큼 늘이고 늘인 결과인 듯싶다. 이것 역시 '동북공정' 사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성이 시황제 때 쌓은 것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시황제가 황제의 자리에 있던 기간이 약 10년 정도인 것을 감안할 때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만리장성은 진의 중국 통일 훨씬 전부터 북쪽에 있던 각 나라들이 국경 밖 이민족 침범을 막기 위해 제각각 쌓아오던 것이었다.

분열됐던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일해 이민족의 침임에 대한 책임이 이제는 진나라에 있게 되자 그 전부터 있던 성들을 본격적으로 보수해 잇고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작업은 대체로 몽골족의 원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 때를 제외하고 거의 2천 년 동안 이어졌던 것인데, 현재 남아 있는 장성의 주요 성곽들은 대부분 명나라 때 쌓은 것이다.

진나라 때 만리장성을 넘어 쳐들어온 이민족은 흉노(匈奴)다.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과 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민족인 이들은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이 지역에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우고 대단한 위세를 떨쳤었다.

흔히 맑은 가을 하늘을 보며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는 흉노족이 매년 가을철 만리장성을 넘어 쳐들어와 곡식을 약탈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흉노와 같은 유목민족은 본디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그들도 사람이다 보니 곡식을 전혀 먹지 않을 수는 없었다. 흉노와 같은 유목민족들은 싸움에 워낙 뛰어나다 보니 교역 대신 으레 중국으로 쳐들어와서 손쉽게 약탈해 가곤 했다.

중국에서 가을걷이가 끝나고 '하늘이 높아지는(天高)' 이때 흉노족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양식을 말들에게 죄다 먹여서 '마비(馬肥)' 즉 말들을 살찌게 해 전쟁 준비를 하다 보니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이 되면 중국으로 쳐들어갈 전쟁 준비에 돌입한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풍요로운 가을을 읊는 낭만적인 의미보다는 가을철 전쟁 준비에 돌입하는 것을 일컫는 비장한 뜻이 담겨있다.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한창 쌓던 비슷한 시기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 각 점령지를 연결하고 군대와 물자를 빠르게 운송하기 위한 군사 도로를 건설해 도시가 발달하면서 로마문화가 유럽에 두루 전파됐다. 그리해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 것이다.

반면 유목민족에 대한 방어의 목적으로 쌓은 중국의 만리장성은 결과적으로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가져왔다. 노신(魯迅)은 「장성(長城)」이라는 글에서 "언제쯤이나 만리장성에 새로운 벽돌을 보태지 않는 날이 올까? 위대한 장성이여!…위대하고도 저주스러운 장성이여!"라며 몽골족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세웠고, 만주족 역시 장성을 넘어와 청나라를 세웠던 것처럼 예로부터 많은 백성이 만리장성을 쌓느라 지쳐서 죽어갔을 뿐, 정작 만리장성이 오랑캐의 침략을 막아본 적이 언제 있었느냐고 한탄했다. 그래서 훗날 만리장성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일컫기도 했다.

오늘날 만리장성의 대표적인 명소인 팔달령(八達嶺)에 가면 '만리장성에 와보지 않으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 非好漢)'라는 글귀가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모택동이 직접 썼다고 한다. 하지만 진나라 이전부터 2천여 년 동안 만리장성을 쌓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를 생각한다면 머리 숙여 이들의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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