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월드컵은 ‘폐싸움’이다

배준용 기자 2026. 5. 9.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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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소량 적은 고지대서 1·2차전… 한달 앞둔 대회 최대 변수
브라질 축구 대표팀이 과거 해발 3640m에 달하는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원정 경기를 치르면서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산소 마스크를 착용한 채 후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달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1·2차전을 멕시코 과달라하라(해발 1571m)에서 치르는 한국 대표팀도 고지대 적응이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인스타그램

“여기를 ‘지옥(Hell)’이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7일 열린 LA FC와 톨루카의 2026 북중미 챔피언스컵 준결승 2차전. 0대4로 완패한 마크 도스 산토스 LA FC 감독은 해발 2670m에 위치한 톨루카의 홈구장 네메시오 디에스 스타디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멕시코에서도 손꼽히는 고지대 경기장인 이곳은 ‘원정팀의 지옥’으로 통한다.

이날 손흥민을 비롯한 LA FC 선수들은 고지대 환경이 익숙지 못한 모습이었다. 경기 초반부터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움직임도 눈에 띄게 둔했다. 손흥민은 후반 한 차례 전력 질주를 한 뒤 공을 빼앗기고도 상대 선수를 다시 따라붙지 못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다음 달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은 해발 1571m 고지대인 멕시코 과달라하라의 아크론 스타디움에서 체코, 멕시코와 조별 리그 1·2차전을 치른다. 해발 고도 차이가 1000m만 나도 고지대에 적응한 팀이 그렇지 않은 팀보다 평균 0.5골을 더 넣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로, 고지대 변수는 축구계에서 승부를 가르는 핵심 요소로 꼽힌다. FIFA(국제축구연맹) 역시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2007년 해발 2500m 이상 경기장에 ‘A매치 금지령’을 내렸다가 볼리비아와 에콰도르 등 남미 고지대 국가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1년 만에 조치를 철회하기도 했다.

그래픽=백형선

국제산악의학회 등에 따르면, 해발 1500m에서는 평지보다 공기 밀도가 10% 남짓 낮아진다. 같은 호흡을 하더라도 체내에 들어오는 산소량은 5% 이상 감소한다는 의미다. 신체는 산소 공급이 부족해졌다는 신호를 감지하면 호흡 수를 급격히 늘리고 심장 박동도 빨라진다. 그 결과 운동 능력과 심폐 기능, 근육 회복력이 빠르게 떨어지게 된다. 이번 축구 대표팀에 고지대 적응 훈련을 자문한 박원일 한국스포츠과학원 연구위원은 “고지대에 일상적으로 몸을 맞추는 데는 보통 2주 정도가 걸린다”며 “핵심은 혈액 속 적혈구와 헤모글로빈 수치를 충분히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산소 섭취량이 줄어든 만큼 체내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이 증가해야 낮은 공기 밀도에서도 정상적인 호흡과 운동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홍명보호는 오는 18일부터 해발 1460m의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사전 캠프를 열고 약 20일간 본격적인 고지대 적응 훈련에 돌입한다. 초기에는 강도 높은 훈련 대신 가벼운 스트레칭과 조깅 위주로 몸 상태를 끌어올리고, 휴식 시간에는 수분과 철분이 풍부한 육류 등을 충분히 섭취하며 신체 적응 과정에 집중할 계획이다. 박 위원은 “같은 축구선수라도 고지대 적응 정도는 개인마다 편차가 매우 크다”며 “훈련 과정에서 선수 개개인의 몸 상태와 적응 여부를 세밀하게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훈련 강도는 캠프 5일 차부터 서서히 높인다. 대표팀 관계자는 “고지대 환경에 잘 녹아든다면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상당한 이점을 얻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른바 ‘고지대 도핑’ 효과 때문이다. 고지대 적응 과정에서 증가한 적혈구와 헤모글로빈이 평지로 내려온 뒤에도 일정 기간 유지되면서 근육 곳곳에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운동 능력 향상 효과가 나타난다. 마라톤 선수들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등을 앞두고 고지대에서 훈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한국의 조별리그 1·2차전 경기가 열리는 멕시코 과달라하라 에스타디오 아크론. /FIFA

한국의 첫 상대 체코는 최종 플레이오프를 거쳐 지난달 1일에야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하면서 사전 캠프와 베이스캠프를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FIFA는 체코에 해발 190m의 미국 텍사스주 맨스필드를 베이스캠프로 배정했다. 체코 선수단은 사실상 고지대 대비 없이 아크론 스타디움에 입성하게 되는 셈이어서, 한국이 홈에 가까운 이점을 누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남아공과의 조별 리그 3차전은 해발 540m의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열린다. 남아공은 해발 2200m의 멕시코시티 스타디움에서 1차전을 치르지만, 이후 미국 애틀랜타(해발 300m)에서 2차전을 소화한 뒤 다시 몬테레이로 들어온다. 반면 한국은 1·2차전을 모두 과달라하라에서 치른 뒤 몬테레이로 이동하기 때문에 고지대 환경에 더 오래 머물 수 있고 이동 부담도 상대적으로 적다. 일정상으로도 한국 대표팀이 ‘고지대 도핑’ 효과를 더 누릴 수 있는 구조다.

또 하나의 핵심 과제는 사격의 ‘영점 조절’에 비유되는 감각 보정 작업이다. 박 위원은 “고지대에서는 공기 저항이 줄어 공이 평지보다 더 빠르고 멀리 날아간다”며 “공격수와 미드필더는 슈팅과 패스 강도를 세밀하게 조절해야 하고, 수비수와 골키퍼는 낙구 지점을 정확히 읽어내는 훈련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고지대에서는 공기 저항이 적어 공의 회전이 덜 걸리기 때문에 날아가다 뚝 떨어지는 무회전 슈팅이 효과적이고, 반면 골키퍼 입장에서는 무리하게 잡으려 하기보다 쳐내는 것이 안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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