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가포르 당국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동성 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형법 377A 조항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동성애 금지법'이었던 이 조항이 폐지되면서 싱가포르의 동성애자들은 범법자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수년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독립기념일을 맞아 국영 TV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에 대해 싱가포르의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들은 "인류를 위한 승리"라며 환호했다.
싱가포르는 보수적인 사회 가치로 잘 알려져 있으나, 최근 몇 년간 영국 식민지 시절 제정된 377A 조항을 폐지하라는 주장이 커졌다.
아시아에선 인도, 대만, 태국에 이어 성소수자 인권에 관해 가장 최근 일어난 변화다.
당초 싱가포르 정부는 양측 여론을 모두 달래기 위해 377A를 폐지하지 않겠다면서도 실제 집행하진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리셴룽 총리는 21일 저녁 "이것이 옳은 일이며 싱가포르 국민 대부분이 받아들일 사항"이라고 본다면서 폐지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사회가) 동성애자들을 더 잘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377A 조항을 폐지함으로써 국법이 "현대 사회의 관습과 더 일치하게 될 것이며, 싱가포르의 동성애자들이 이를 통해 안도감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LGBT 운동가인 존슨 옹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마침내 해냈다. 이 차별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법 조항이 마침내 폐지될 것이라는 소식에 기쁨을 감출 수 없다"면서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언젠간 일어날 변화였다. 오늘 우리는 무척이나 기쁘다"고 전했다.
LGBT 인권단체 연합은 이번 폐지 소식에 대해 "어렵게 얻어낸 승리이자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 사례"라면서 완전한 평등을 향한 첫걸음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총리의 연설 중 일부 내용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리 총리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결혼에 대한 정의를 법적으로 더 탄탄히 수호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거의 봉쇄했다.
또한 리 총리는 싱가포르는 여전히 가족과 사회 규범을 성실히 지켜나가는 전통사회라는 점을 강조했다.
LGBT 운동가들은 바로 이 점이 "실망스럽다"면서 사회의 차별을 더욱 고착화하는 결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LGBT를 향한 지지 여론 증가
싱가포르는 1965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식민지 시절 제정된 형법 377A를 폐지하지 않고 유지했다.
엄밀히 따지면 동성 간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하는 조항이나, 사실상 동성애 자체를 금지하는 법으로 여겨졌다.
최근 몇 년간 이 조항이 적극적으로 집행되지 않으면서, 게이 클럽이 생기는 등 성소수자들이 수면 위로 점점 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LGBT 운동가들은 377A 조항이 동성애자에게 영구적인 사회적 낙인을 찍으며, 차별을 금지하는 싱가포르 헌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측면에도 결국 영향을 끼친다며 오랫동안 폐지를 주장해왔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여겨지는 콘텐츠는 싱가포르에서 방영이 금지될 수 있으며, 과거엔 TV 프로그램과 영화를 검열하기도 했다.
또한 이 조항이 개방적이고 다양한 글로벌 금융 중심지라는 싱가포르의 이미지와 상충하며, 싱가포르에 본사를 다국적 기업들의 인재 유치를 방해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377A 조항 유지를 지지하는 싱가포르 국민의 비율도 여전히 높지만, 최근 몇 년간 LGBT 권리 증진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졌다는 여론 조사가 있을 정도로, 법 조항 폐지를 외치는 목소리도 더욱 커졌다.
한편 LGBT 활동가와 종교 단체 출신이 많은 보수주의자 모두 여러 활동을 벌여왔다.
시위와 정치 집회가 엄격히 규제된 싱가포르이지만, LGBT 활동가들이 개최하는 '핑크 닷' 집회에는 매년 수만 명이 몰려든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민 사회 주도 집회이기도 하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가치를 수호하자는 취지의 SNS 캠페인과 이벤트를 조직했으며, 몇몇 교회는 논란이 많았던 동성애 전환 치료 프로그램을 홍보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리 총리는 21일 "모든 진영이 각자 자제해야 한다. 그것만이 함께 국가로서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면서 양측 진영의 양해를 구했다.

식민 통치의 잔재
사실 377A 조항을 유지한 국가는 싱가포르뿐만이 아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많은 지역에 유사한 법이 계속 남아있다.
19세기 인도의 영국 식민지 정부가 처음 도입한 이 법은 "남녀 및 동물의 자연 질서에 반하는 성교"를 금지한다.
영국이 이러한 인도 형법을 기반으로 다른 식민지 지역에서 형법을 마련하면서 이 조항도 인도 밖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따라 케냐, 말레이시아, 미얀마와 같은 옛 영국 식민지 국가에선 유사한 조항이 여전히 남아있다.
2018년 인도 대법원이 이 조항을 폐지한다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리면서 인권 운동가들은 다른 이전 식민지 국가들도 그 뒤를 따를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다른 아시아 지역에선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9년에 대만에서 처음으로 동성결혼이 합법화됐으며, 올 6월 태국은 동성결혼 허용 법안의 초안을 승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