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동업자’에서 ‘철천지원수’로 갈라선 고려아연-영풍
75년간 동업을 이어온 고려아연과 영풍이 마침내 그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고려아연 경영권을 놓고 지분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포문은 영풍이 열었다.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MBK)와 손잡고 9월 13일 전격적으로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에 나선 것이다. 26일에는 공개매수 가격을 기존 주당 66만 원에서 75만 원으로 올리는 초강수도 뒀다. 이를 위해 필요한 추가 자금 3000억 원은 영풍이 MBK에 대여했다.
1949년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공동 설립한 영풍그룹의 파국은 고려아연 최대주주인 영풍, 특수관계인 장형진 고문 측이 9월 12일 MBK에 고려아연 지분 절반 이상(자기 지분 절반+1주)을 넘기기로 계약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고려아연 운영을 놓고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어온 것이 원인이 됐다.
장형진 고문과 최윤범 회장 오랜 갈등
MBK는 계약 당일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경영권 확보를 위해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당초 공개매수 가격은 주당 66만 원, 공개매수 대상 지분은 약 6.98∼14.6%(144만5036∼302만4881주), 대금은 최대 약 2조 원에 달했다. 또한 MBK-영풍 연합은 9월 13일 공고를 통해 "공개매수로 고려아연 지분을 추가 취득함으로써 경영권을 공고히 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해 주주가치를 극대화하겠다"고 밝혔다.
고려아연은 즉각 반발했다. 9월 13일 의견표명서를 통해 "당사와 사전 협의나 논의 없이 최대주주인 ㈜영풍이 기업사냥꾼 MBK와 결탁해 일방적으로 공개매수를 진행하고 있다"며 "이번 공개매수 시도는 비철금속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위 경쟁력을 보유한 당사에 대한 적대적·약탈적 M&A(인수합병)"라고 비판했다.
이에 영풍은 9월 23일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에 대한 입장을 다시 내고 "MBK와 진행하는 이번 주식 공개매수는 최윤범 회장 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적대적·약탈적 M&A가 전혀 아닌, 최대주주의 지배권 강화와 경영권 정상화를 위한 것"이라면서 "최윤범 회장에게 책임을 묻기 위함으로 고려아연을 흔들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영풍그룹은 독특한 지분 구조를 가진 기업이다. 외형적으로 고려아연은 최 씨 일가가, 전자 계열사는 장 씨 일가가 맡는 분리 경영을 해왔지만 영풍그룹 계열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곳이 많다. 1974년 설립된 고려아연도 그런 경우다. 최대주주는 장 씨 일가 소유의 영풍(25.4%)이지만 경영은 최 씨 일가 3세 최윤범 회장이 맡고 있다. 영풍이 "(고려아연에 대해) 고작 2.2% 지분을 가진 경영 대리인인 최 회장이 75년 동업자 정신을 훼손하고, 고려아연을 사유화하고자 전횡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특히 영풍은 고려아연이 2022년 8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한화그룹(7.75%)과 LG화학(1.89%), 현대차그룹(5.05%) 등에 잇달아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및 자사주 상호 교환을 진행한 부분에 대해 "최 회장은 16% 상당의 지분가치를 희석해 기존 주주들의 비례적 이익을 침해했다"고 비판했다.
현재 공개매수를 진행 중인 MBK는 최대 14.6%를 확보하면 확실하게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 반면 고려아연은 기관 및 외국인 중 6%가량이 이미 우호 지분이라 6%p만 더하면 MBK 측의 과반 확보를 저지할 수 있다. 문제는 이미 자금을 확보한 MBK와 달리 최 회장은 이제부터 대항 공개매수를 위한 자금 약 1조 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고려아연과 협업 중인 현대차, LG화학, 한화 등 기존 최 회장 측 백기사(우호 지분)는 최 회장의 경영권 유지에 찬성표를 던질 수 있어도 대항 공개매수에 추가 자금을 직접 투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고려아연 기업어음 발행, 대항 공개매수 나설 준비?
일각에서는 최 회장 측이 국내외 투자자로부터 이미 필요 자금 상당 부분을 확보한 상태로, 조만간 대항 공개매수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우군 후보로는 한국투자증권과 함께 일본 소프트뱅크와 고려아연 협력사인 스미토모상사, 미국계 사모펀드 베인캐피털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공개매수 마지막 날인 10월 4일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해외 사모펀드나 금융사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단 고려아연이 꺼낸 카드는 기업어음(CP) 발행이다. 고려아연은 9월 24일 CP를 발행해 2000억 원을 확보했고, 27일 2000억 원 규모의 CP를 추가로 발행한다.
그런 가운데 최근 급등한 고려아연 주가는 양측 모두에 부담이 됐다. MBK가 공개매수에 나서기 전날 55만6000원(이하 종가 기준)이던 주가는 9월 20일 장중 한때 75만3000원까지 치솟았다가 25일 70만4000원을 기록했다. 주가가 공개매수가보다 높아지면서 공개매수 자체가 실패로 끝날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하지만 영풍이 MBK에 3000억 원을 건네면서 다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게 됐다.
고려아연은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으로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다. 전자·반도체·자동차·이차전지 등 첨단산업에 아연·연·동·은 같은 기초 원자재를 만들어 제공하는 핵심 공급망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아연과 영풍은 각종 법적 다툼에도 돌입했다. 먼저 영풍그룹 계열사 영풍정밀(최 회장 우호 지분)은 9월 20일 영풍이 MBK와 맺은 주주 간 계약으로 영풍법인이 손해를 봤다며 장형진 영풍 고문과 MBK를 포함한 5명을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영풍 역시 9월 25일 고려아연의 원아시아파트너스 등 사모펀드에 대한 투자 결정, 해외 자회사인 이그니오홀딩스에 대한 투자 결정 등으로 고려아연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며 최 회장 등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이한경 기자 hklee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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