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밥 먹으러 오라"…무릎 꿇은 전두환 손자 품은 광주(종합)
5·18 피해자·유족 만나 "할아버지 대신 사죄"
입던 외투 벗어 희생자 묘비 닦고 참배도
광주 시민들 "큰 용기에 감사" 따뜻한 환영
[광주=이데일리 김범준 기자]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이런 날도 오고….”, “망자의 영들이 오늘을 분명 기억할 겁니다.”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광주 시민들 대화 중)
전씨가 등장하자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유족 및 피해자들과 광주 시민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지난 1980년 5월18일 이후 43년을 기다린 눈길이 그에게 쏟아졌다. 전씨 일가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5·18과 관련해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어 이날이 첫 사죄 행보가 되는 날이었다.
전씨는 이날 마중 나온 원순석 5·18기념재단 이사장과 세 공법단체 황일봉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장, 정성국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회장, 양재혁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장과 잠시 비공개 면담을 나눈 후 만남의 장이 마련된 리셉션홀에 들어섰다. 그는 자리에 나온 유족 및 피해자들과 함께 일어나 잠시 묵념을 한 뒤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는 이어 “5·18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대학살의 현장이고 비극이며, 그 주범은 어느 누구도 아닌 제 할아버지 전두환씨”면서 “군부 독재와 두려움 속에서 용기로 이겨낸 광주시민 여러분들께서 저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가족을 대변해서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이를 지켜보던 5·18 유족과 피해자들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전씨는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과 계기에 대해 “교회 봉사활동을 통한 깨달음과 반성이 있었다”면서 “어머니는 제 선택을 지지하시고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신다”고 밝혔다. 조부친인 전 전 대통령과는 생전에 5·18과 관련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 이날 자리에 앞서 따로 공부를 했다고도 했다.
전씨는 회견을 마치고 5·18 피해자와 유족들 앞에서 거듭 사죄의 뜻을 밝히며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기념관 뒤편에 5·18 희생자들의 성함이 새겨진 팻말이 한데 모인 추모관을 찾아 애도한 뒤, 곧장 광주 북구에 위치한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았다.
이어 전씨는 김범태 관리소장의 안내와 함께 5·18 첫 희생자 김경철 열사, 12세 나이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전재수군 묘와 ‘무명 열사의 묘’들을 차례로 참배했다. 전씨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참배한 묘비와 비석에 새겨진 희생자 사진들을 직접 하나하나 닦고 묵념하며 애도를 이어갔다. 이를 지켜본 한 시민은 “본인 외투로 하지 말고 이 수건으로 하라”며 건네자 전씨는 “괜찮다”며 정중히 사양하기도 했다.
곳곳에 참배를 마치고 나온 전씨는 ‘민주의 문’ 앞에서 “이렇게 와서 보니까 정말 죄송하고 창피한 마음뿐”이라며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곳에 묻힌 5·18 당시 중학생이던 고(故) 문재학 군의 모친 김길자씨는 전씨의 손을 꼭 잡고서 “아직 젊으니까 건강도 잘 챙기시라”고 말하며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전씨는 이곳에서 ‘도청지킴이’를 하고 있는 5·18 유가족 오월어머니회 회원 12명과 만나 한 명씩 손을 잡고 사죄하며 면담을 나눴다. 할머니들은 전씨를 박수와 함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언제든지 밥 먹으러 오라”며 환영의 뜻을 전했다.
전씨는 이날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245를 찾았다. 이 건물은 5·18 당시 군 공수부대의 헬리콥터 사격을 받은 245개의 실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전씨는 “광주에서 너무 언론에 노출되면 진정성이 퇴색돼 보일 수 있어 내일은 비공개 일정으로 소화할 예정”이라며 “조만간 서울에 거처를 마련하고 (마약류 투약 혐의) 경찰 조사도 성실히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떠났다.
김범준 (yol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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