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the world’... 팝의 거장 퀸시 존스를 추모하며!

[김효진의 팝, 그 빛과 그늘]
팝의 거장, 퀸시 존스를 추모하며...
빈민가 뒷골목 '갱스터'가 미래였던
아이가 우연히 피아노를 마주하고
'팝계의 전설'이 되었다 . 그의 위대함은
가수들을 마이크 앞으로 불러낸 '진정성'

26살즈음 멋진 모습의 퀸시 존스(1959년).

퀸시 존스 (Quncy Jones 1933년 시카고 출신)
- 2900곡 이상을 녹음
- 300개 이상의 앨범을 녹음
- 51개의 영화의 TV음악
- 1000개 이상의 오리지널 작곡
- 79번의 그래미 후보
- 27개의 그래미 수상
- 18명의 E.G.O.T 중 1명(에미, 그래미, 오스카, 토니)
- 'Thriller'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 'We are the world'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세계 최고의 음악 프로듀서

퀸시 존스가 11월 3일 9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듀서라고들 하지만, 어쩌면  대중이 이름을 아는 유일한 프로듀서라고 하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비틀스의 조지 마틴이나 데이비드 포스터, 힙합계의 닥터 드레 정도가 일반에 좀 기억될 수도 있겠지만 마이클 잭슨을 팝의 황제 자리에 올려준  퀸시 존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린 시절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마이클 잭슨(그때의 우리는 모두 그의 팬이지 않았던가!)의 영상에 매번 같이 나오는 퀸시 존스를 보면서 '저 사람은 뭔데 저렇게 설쳐'라고 생각했었다.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난다.

Michael Jackson  'Thriller'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공식 비디오)

전 세계를 휘몰아쳤던 마이클 잭슨의 세 앨범 'Off the Wall', 'Thriller', 'Bad'는 퀸시 존스의 대표작들이기도 하다.

아무리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마이클 잭슨이라 해도 그를 일단 찾아내고 뛰어난 연주자들과의 협업을 원활히, 그것도 주어진 시간과 예산 안에서 완벽히 이루어 준 퀸시 존스가 없었다면 그 성공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뛰어난 흥행 프로듀서는 아티스트의 창의성과 세션들의 기량을 최고치로 끌어낼 줄 알아야 하며, 또한 그 시대 대중의 흐름에 정확히 '반 발자국 앞설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게 바로 퀸시 존스다.

그는 실제로 재즈 연주자였고 작곡과 편곡 실력 또한 대단한 사람이라 아티스트들과 더 깊이 교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00개가 넘는 작곡을 했고 3000개 가까이의 노래와 300개의 앨범을 녹음했다고 한다. 레이 찰스, 프랭크 시나트라, 마일스 데이비스, 듀크 엘링턴, 엘라 핏츠 제랄드, 스티비 원더, 허비 행콕 등등 같이 작업한 아티스트들의 알만한 이름만 나열해도 지면이 모자란다.

예컨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Fly me to the moon'(1964년작)도 퀸시 존스가 기존의 곡을 편곡하여 프랭크 시나트라가 전 세계에서 히트하게끔 만들어준 곡이다.

Frank Sinatra  'Fly me to the moon'

프랭크 시내트라, Fly Me To The Moon(2008 Remastered)

사람을 모으는 힘

뛰어난 음악적 감각과 경영 능력만으로 그가 지금과 같은 대가에 이른 건 아닐 것이다. 퀸시 존스의 가장 놀라운 재능은 '사람을 모으는 힘'이다.

1980년대에 아니, 지금까지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팝 프로젝트인 'We are the world'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아프리카 난민들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기획하여 당대의 톱스타를 빠짐없이 한자리에 모았다. 퀸시 존스가 아니라면 가능했을까. 완벽히 성공했지만 그 결과보다 발상 자체가 놀랍다.

그들을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라는 명성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함께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서게 한 힘이 인류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다큐멘터리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을 통해 그날 밤의 판타지를 확인할 수 있다.)

U.S.A. for Africa  'We are the world'

노래 We are the world for Africa (한국어 번역)

그는 후에 힙합의 시대에서도 의미 있는 행보를 보인다.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1990년대 미국 힙합 신은 동부와 서부로 갈리며 실제 총격이 오갔다. 이때 퀸시 존스는 뉴욕 심포지엄을 열어 그들에게 평화를 호소한다. "제발 멈춰달라. 당신들이 적어도 내 나이까지는 살았으면 좋겠다."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가 가진 자들의 위선적 이벤트였다는 평가도 있으나, 훗날 뉴욕에서의 이 호소로 인해 나는 더더욱 그의 진정성을 믿고 싶어졌다. 사람을 모으는 힘은 여전히 진정성에 기초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백인 중심의 서구사회에서 퀸시 존스, 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스티비 원더 등 영향력 있는 흑인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손을 내미는 광경은 억압과 차별 속에 살아가는 흑인 커뮤니티에 큰 의미를 던져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음악의 문을 열다

퀸시 존스의 연보를 훑다 보면 이게 도대체 한 사람의 인생인가 싶을 정도로 치열하고 빽빽하다. 재즈 연주자에서 작곡자, 편곡자, 그리고 프로듀서로 이어지는 행로에 남겨진 작품들은 그 개수도 완성도도 하나같이 놀랍다.

그는 1960년대 당시 흑인들에게 닫혀 있던 영화음악계의 문을 처음으로 열고 들어간 작곡가이기도 하다. 1965년부터 33개의 주요 영화ost를 작곡했으며 대표작으론  '밤의 열기 속으로',  '보디히트',  '칼라 퍼플' 등이 있다.

칼라 퍼플 사운드 트랙 중에서 'Miss Celie's Blues (Sister)'

Miss Celie's Blues (Sister) (From ""The Color Purple"" Soundtrack")

'칼라 퍼플'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늘 자신과 함께 했던 음악적 파트너 존 윌리엄스와 처음으로 같이 작업하지 않은 작품이다. 흑인인 퀸시 존스야말로 흑인들이 주역인 이 영화 음악을 잘 만들 것이라 여겨 작곡을 맡겼고 결국 큰 호평을 받았다.

어린 시절 TV에서 보았던 미국 드라마 '뿌리'의 음악도 퀸시 존스의 작품이었다. 흑인들 삶의 슬픈 역사를 그려내는 이 영화들에 퀸시 존스를 등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 외의 모든 OST 작업 속에서 그는 클래식, 재즈, 블루스, 펑크, 라틴음악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영화음악계에도 한 획을 긋는다.

음악과의 만남 그리고 동행

그럴만도 한데 그는 부와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성공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며 평화롭게 소통, 연대하고자 평생 노력해왔다. 흑인음악 연구소 설립에 큰 도움을 주었고 행사 수익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과 음악 국립 도서관 설립을 위해 기부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음악을 통해서였다.

퀸시 존스는 대공황 시절 태어나 빈민가 뒷골목에서 그저 갱스터 밖에는 미래가 없어 보였던 흑인 꼬마였다. 그런 그가 전 세계를 감동시킬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고 그것은 아주 작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창고에서 우연히 마주친 피아노, 그리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소리, 바로 음악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다큐멘터리 '퀸시 존스의 음악과 삶'에서 그가 그 순간을 설명할 때 나는 깊이 감동받았다. 여기에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있을 수 없다.

"반짝거리는 작은 무언가가 내 인생에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전에는 갖지 못했던 것.
사는 장소나 아픈 엄마에 대해서는 제어 능력이 제게 없었죠.
화난 백인들도 어쩔 수 없었고요.
그런데 음악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였어요.
자유롭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었어요."


퀸시 존스의 1969년 앨범 중에서 'Love and Peace'

퀸시 존스의 Love And Peace


※ 김효진은 팝 칼럼니스트 입니다. '아직도 안 망했냐'는 말을 4년 가까이 들으며 잠실에서 LP 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시집 한 권과 여기저기 써낸 음악 에세이가 자꾸 늘어가는  무명작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