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스파이 드라마 감독이 되기까지

임지영 기자 2024. 5. 9.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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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이 드라마로 돌아왔다. 미국 HBO 오리지널 시리즈 〈동조자〉다. 미국으로 망명한 베트남 혼혈 청년이 두 개의 문명, 두 개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겪는 고군분투를 그린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이 미국 HBO 오리지널 시리즈 <동조자>의 공동 쇼러너이자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쿠팡플레이 제공

사춘기 시절 박찬욱 감독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고 반했다. 이 책은 1963년 영국의 첩보 소설가 존 르 카레가 쓴 소설로 냉전시대 이중 스파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거대한 거짓말’을 창조하고, 그 거짓말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하는 스파이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는 가운데, 거기 어딘가에서 톱니바퀴로 종사하던 한 개인이 비극적으로 파멸한다는 이야기에 깊숙이 빠졌다.

왜 그렇게 빠져들었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지금 와서 보니 스파이 소설을 좋아하는 성향과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이끈 성향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르 카레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스터(스파이)’가 있는데 제작과 각본을 겸하는 감독이 하는 일과 상당히 유사하다. 거대한 거짓말이 있고 그것을 ‘적국의 기관’이 진짜라고 믿도록 만들기 위해 필요한 예산을 짜고 집행할 팀을 꾸린다. 전면에 나서서 상대방을 속이는 일을 할 배우(스파이)를 훈련시킨다.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사소한 디테일 하나하나를 설계한다.”

박찬욱 감독이 드라마로 돌아왔다. 미국 HBO 오리지널 시리즈 〈동조자〉다. 2018년 연출한 BBC 〈리틀 드러머 걸〉에 이어 이번에도 스파이를 소재로 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제75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뒤 선보이는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박찬욱 감독이 공동 쇼러너이자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베트남계 미국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품은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으로 망명한 베트남 혼혈 청년이 두 개의 문명, 두 개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겪는 고군분투를 그린’ 작품이다. 원작의 시작은 이렇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 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드라마는 이런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두 가지 피, 두 가지 언어, 나는 모순의 결합체다.’ 시작부터 이중간첩이자 혼혈인으로서 겪는 혼돈이 느껴진다. 원작 소설 작가 본인이 1971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경험이 있다. 드라마 1화에서 묘사하는 사이공 함락과 미국으로 탈출하는 장면은 실감나는 동시에 작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유머러스하며 풍자적인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되 속도감을 더했다.

4월18일 메가박스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동조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박찬욱 감독.

글로벌 OTT 순위 집계 사이트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동조자〉는 4월22일 기준 불가리아·덴마크·핀란드·네덜란드·스페인 등 20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HBO TV쇼 부문 글로벌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미국 연예 매체에서도 “올해 HBO의 최고 작품(〈인버스(Inverse)〉)” “단연코, 〈동조자〉는 클래식이 될 것이다(〈콜리더(Collider)〉)” 같은 호평이 잇따랐다. 국내에서는 4월15일부터 매주 한 편씩 OTT 플랫폼 쿠팡플레이에 공개되고 있다. 1회를 선보인 직후 기자들과 만난 박찬욱 감독은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하느라 자꾸 그다음 질문을 까먹었다. 질문이 뭐였는지 몇 차례 되묻다 말했다. “기자들이 질문을 꼭 두 개씩 하시네요.”

〈리틀 드러머 걸〉에 이은 두 번째 시리즈물이자 ‘글로벌 프로젝트’다. 국내에서 작품을 만들 때와 근본적으로 제작 환경의 차이가 없다고 박 감독은 말한다. “통역이 필요하기 때문에 불편은 있지만 통역사가 오래 함께한 사람이라 그 문제를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어디에서나 같고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비슷하다. 배우들은 배우들대로 다른 종족이지만 (영화판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비슷해 용어 몇 개만 알면 오해 없이 소통할 수 있다.”

‘박찬욱이 영화 어떻게 찍나 보려고 왔다’

가장 큰 어려움은 캐스팅이었다. 다수의 베트남계 배우를 캐스팅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인공 대위 역을 맡은 배우는 작품의 설정상 유창한 베트남어와 영어 실력은 기본이고, 혼혈인을 연기해야 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8개월간 오디션을 본 끝에 베트남계 오스트레일리아 배우 호아 쉬안데가 최종 캐스팅되었다. 조연과 단역을 모집하기 위해 미국·영국·유럽·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의 베트남 커뮤니티에 공고를 냈다. 지원자 수천 명이 보내온 영상을 봤다. 최종적으로 캐스팅된 연기자 중 배우가 아닌 사람도 있다. 배우 지망생이지만 작품을 처음 해보는 사람, 단편영화에만 참여해본 배우, 동네 커뮤니티에서 연극을 해본 아마추어까지 다양했다. 디즈니사 웹디자이너 출신도 있고 베트남 출신 영화감독도 배역을 따냈다. ‘박찬욱이 영화를 어떻게 찍나 한번 보려고’ 오디션을 본 경우였다.

초반에는 초보 연기자에게 아주 기본적인 걸 가르쳤다. 카메라가 어느 위치에 있을 때 몸을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지, 한 화면 안에서 사람을 가리면 안 되니 어떻게 몸을 써야 하는지 설명했다. 다행히 금세 적응했고 촬영이 거듭될수록 연기력이 성장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만 그들을 믿는 것도 참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오디션 시간은 짧고, 굉장히 긴 여정 동안 다양한 연기를 해야 하는데 괜찮을까 (걱정했다), 심지어 프로 배우가 아닌 경우 촬영하다 힘들다고 도망가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까지 해가며 집중해서 판단을 해야 했다.”

쿠팡플레이에서 공개된 <동조자>는 미국으로 망명한 베트남 혼혈인이 두 국가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그린다. ⓒ쿠팡플레이 제공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자이기도 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1인 4역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CIA 요원, 교수, 국회의원, 영화감독 역으로 조연이지만 분량을 합치면 주연급이다. 넷 다 극 중 미국인이기도 하다. 이 아이디어에 대해 박 감독은 “동료들이 미친 사람 취급을 할까 봐 오래 고민하다 얘기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의외였다”라고 회상했다. 원작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네 명이 한 장소에서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 장면이 있었다. 어떻게 각색할지 논의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백인 남성이고 미국 시스템, 미국 자본주의를 보여주는 4가지 얼굴이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하나의 존재라는 걸 느꼈다.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가장 효과적인 건 한 배우가 연기하는 거라 생각했고, 그 부분이 HBO에 이 기획을 설득할 때 좋게 작용한 것 같다.”

훌륭한 배우는 많지만 각각의 역할이 다 구별되도록 개성 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가 TV 시리즈에 출연한 적은 없던 터라 큰 기대는 안 했다. 그래도 생략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캐스팅을 제안했는데 금세 답변이 와서 신나게 작품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계 캐나다 배우이자 2019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샌드라 오도 주인공의 파트너로 출연한다.

박찬욱 감독이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건 처음이 아니다. 영화 〈아가씨〉는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모티프로 했고, 그가 사춘기 시절 즐겨 읽었다는 존 르 카레의 〈리틀 드러머 걸〉도 그의 손으로 드라마가 되었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올드보이〉는 개봉 21년 만에 미국에서 TV 시리즈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원작이 있어도 각본을 쓰는 건 또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소설에는 등장인물의 마음속 생각이 많이 들어간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풍부함을 행동과 대사로만 이루어진 각본으로 옮기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번 작품에는 주인공 대위가 어딘가에 갇혀 강압에 의해 진술서를 쓴다는 기본 세팅이 있고, 그에 대해 심문하는 시간이 있다. 이걸 내러티브 장치로 설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갖고 있는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유머를 사용했다. 박 감독이 배우들에게 가장 강조한 부분도 아이러니, 패러독스(역설)다. 폭소하며 웃는 편은 아니지만 말이 안 되는 기이한 상황이 빚어내는 씁쓸한 유머가 있다. 블랙코미디 색채가 짙다.

<동조자>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CIA 요원, 교수, 국회의원, 영화감독 역할로 1인 4역을 맡았다. ⓒ쿠팡플레이 제공

이날 기자간담회 자리에는 다른 나라의 현대사를 다루는 데 따른 부담과 어려움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박 감독은 창작을 하는 데 자격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작가가 어떤 소재를 취할 때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다. 만일 독일 감독이 한국의 역사를 다룬다고 하면 독일인이 본 한국 사회는 어떨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른 관점은 무엇일지 궁금할 것 같다.” 오히려 베트남인도, 미국인도 아닌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거리감이 창작자로서 강점일 수 있다. 박 감독으로서는 미국과 베트남 모두 잘 알지도, 그렇다고 아주 모르지도 않는 나라다. “쇼로 크리에이트하기에 적당한 수준의 거리감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중요한 건 소재가 되는 사건이나 역사를 얼마나 진지하게 공부하느냐인데, 무엇보다 원작이 있었다.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갖고 영화적 표현을 구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SF 시리즈 〈삼체〉에 이어 아시아 국가의 역사와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나 영화들이 과거보다 눈에 띄게 많이 제작되고 있다. 박 감독이 보기에 이민진 작가 원작의 애플TV 시리즈 〈파친코〉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도 영향을 끼쳤다. “반대로 시대가 그런 작품의 성공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삼체〉 같은 작품에 거대 자본이 투자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대의 영향이 있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인데 그동안 일부 특정 인종의 목소리만 들렸다. 대중문화 안에서 그런 반성이 늦었지만 분명히 생기고 있고 소수집단이 힘을 가지게 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통로를 찾는 것 같다.”

박찬욱이 말하는 TV 시리즈의 매력

베트남 문화나 언어를 재현하는 과정에서도 ‘대충’ 했다가는 쇼가 망가질 거라는 위기의식이 강했다. 작품을 제작한 HBO도 그걸 각별히 인식하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 박 감독보다 더 민감했다. 거기에 드는 돈은 아끼려고 하지 않았다. “PC주의(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창작의 측면에서 항상 좋지만은 않을 수 있다. 이번 작업을 하며 느낀 것은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이런 기획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1억5000만 달러 규모의 쇼에 처음 보는 베트남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고 절반 이상이 베트남어로 말한다. “이런 일이 가능해졌다. 어찌 보면 놀랍고 어찌 보면 너무 늦었다.”

<동조자>의 한 장면. 각본과 제작을 겸한 박찬욱 감독은 에피소드 7개 중 1~3화만 연출했다. ⓒ쿠팡플레이 제공

박찬욱 감독은 에피소드 7개 중 1~3화만 연출했다. 나머지는 각본을 마무리하고 후반 작업을 하는 데 집중했다. TV 시리즈의 매력이라면 한 회가 끝날 때라고 그가 말했다. “끝날 때 마무리를 확실히 안 짓고 감질나게 하면서 절정의 순간에 가차 없이 끊어버린다. 싸구려 트릭이라고 취급당하지만 나는 그게 좋다. TV는 그 맛에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조자〉도 마찬가지다. 매회 그 끝에 다다를 무렵, ‘거대한 거짓말’을 진짜로 만드는 박찬욱 감독의 다음 ‘설계’가 궁금해진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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