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수효과를 대단한 '경제이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마켓톡톡]

한정연 기자 2024. 9. 1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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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KDI 경기 논쟁 2편
ILO 노동소득분배율 또 하락
상장사들 영업익 역대 최대인데
실질임금 줄고, 투자는 뒷걸음질
기업 호의에 기댄 낙수효과 민낯

# 정부는 수출 증가를 기다려보자고 말해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우리 경제의 근간이자 일자리의 원천인 수출 확대를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말했다.

# 그런데 막상 수출이 11개월 연속 증가하고, 상장사들의 영업이익은 두 배 가까이 늘었는데, 경제는 역성장했다. 실질임금이 2년째 줄면서 구매력이 떨어지자 내수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장해온 낙수효과의 민낯을 알아봤다.

낙수효과는 경제학 이론으로 보기 힘들다. 사진은 강남 테헤란로 빌딩숲. [사진=뉴시스]

우리는 '한은-KDI 경기 논쟁 1편'에서 경제 후퇴의 경로를 알아봤다. 고금리와 고물가의 영향보다는 수출 증가분만큼도 임금과 고용이 늘어나지 않은 영향이 더 컸다. 2편에서는 수출과 내수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 관점➊인색한 기업 =지금 내수의 실종은 기업의 인색함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 4일(현지시간) 발표한 '세계 고용 및 사회 전망 2024년 9월 업데이트'에서 "전체 국민소득에서 임금 근로자가 가져가는 비율인 노동소득분배율이 2019~2022년 0.6%포인트 하락했다"며 "(2004년 기준으로) 2024년에만 노동 소득이 세계적으로 2조4000억 달러 증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기업의 이익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그렇다. 지난 8월 말 발표된 미국의 2분기 GDP 예측치 통계에 따르면 2분기 기업 이익은 전분기보다 1.7% 증가했다. 2분기 미국 비금융 기업들의 이익은 292억 달러 증가했고, 금융회사 이익은 464억 달러 늘어났다. 2023년 이후에도 기업 이익은 우상향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EPI)는 팬데믹 당시 인플레이션의 주범이었던 '탐욕 인플레'가 여전히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EPI는 "제품 가격 상승분에서 기업의 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2분기 94.5%까지 올라갔고, 2023년 이후에도 여전히 30%대로 1979~2019년 평균인 13.0%의 세배 가까이 많다"고 분석했다. 2024년 2분기 미국의 제품 가격 상승분의 33.5%가 기업 이익으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상장사들의 이익도 역대급으로 상승했다. 한국거래소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12월 결산 코스피 상장사 620개의 올해 상반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은 지난해보다 91.4% 증가한 102조9903억원이었다. 개별 기준 709개 상장사의 올해 상반기 총 영업이익도 59조2325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코스피 상장사의 79.4%인 492개 회사가 순이익 기준 흑자기업이었다. 기업의 곳간은 가득 찼다는 얘기다.

■ 관점➋ 호의에 기댄 성장=이렇게 수출과 내수의 끊어진 연결고리에선 낙수효과의 맹점이 드러난다. '대기업 퍼주기'나 '부자 퍼주기'의 진짜 문제는 모든 경제 구성원을 대기업과 재벌 일가, 부유층의 '호의好意'에 기대게 하는 구조에 있다.

낙수효과는 먼저 주고 나중에 받겠다는 얘기다. 언제 어디서 받겠다는 조건 따윈 없다. 그래서 수출 대기업과 부유층은 세금을 감면받거나 보조금을 받고 나서 그만큼 투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적 처벌이나 도덕적 비난을 받지 않는다.

수출과 내수의 단절이 시간차 때문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공허한 주장이다. 최상목 부총리는 지난 8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수출 호조가 내수 쪽에 영향을 주면서 내수나 민생에 온기가 확산해야 하는데 그 확산 속도가 생각보다 조금 더디다"며 "소비가 늘려면 소득이 증가해야 하는데, 하반기에는 아무래도 실질소득과 임금이 좀 더 개선될 걸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임금은 상승이 지체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떼이는 상황이다. 상장사들의 영업이익 총액이 두배 가까이 증가하는 동안 실질임금은 줄었고, 임금 체불 규모는 역대 최대치를 넘어섰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임금 체불 규모는 2022년 1조3472억원이었고 2023년에는 1조7845억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면, 지체된 분배도 마찬가지다.

경제성장이란 중대한 과제는 누군가의 호의로 달성할 수 없다. 애초에 낙수효과(Trickle down)라는 말은 경제용어라기보단 농담에 가까웠다. 미 민주당 지지자들은 공화당의 편파적인 세금 정책을 비하하기 위해서 낙수효과라는 말을 사용했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인프라 투자 위주의 민주당 중산층 주도 성장론을 소비에트식이라고 비하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정치 풍자 글을 주로 쓰던 윌 로저스는 1932년 11월 27일 세인트 피터스버그 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돈은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흘려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맨 꼭대기에 사용됐다. 후버 대통령은 엔지니어여서 물이 흘러내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경제학에서 낙수효과는 이론이 아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는 1954년 집회에서 "소수(부자)에게는 호의를 베풀고, 다수를 위해서는 기도나 합시다"라고 꼬집었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1974년 포드 대통령의 감세안을 비난하며 "경제성장은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들로 흘러내리는 자원의 흐름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의 로버트 인만 금융학과 교수는 이 학교 저널에서 "낙수효과라는 말은 법인세를 대폭 인하해주면 기업은 투자를 늘리고, 이것이 근로자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정부의 바람'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기업의 투자 수익에 세금을 덜 부과하면 더 많은 투자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실제로 물어봐야 하는 것은 그 새로운 투자가 얼마나 많을 것이고, 근로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을 받는지다."

낙수효과라는 말이 처음 쓰인 1930년대 이후 누구도 이 질문에 검증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감세 혜택은 기업이 받고, 혜택 이상의 세금은 근로자들로부터 걷는데, 이게 경제성장이라는 주장을 입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낙수효과가 경제학 이론이 될 수 없었던 이유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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