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팬이 제게 질문을 주셨습니다.
“야구에서 라이벌 간의 경기에 영국에서 쓰는 표현인 더비를 쓰는 것이 옳다고 보시나요?”
저는 처음에 이렇게 답해드렸습니다.
“슈퍼매치도 쓰는 데 별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걸 계속 사용하는 것이 과연 맞는 건가?’
좀 더 풀어서 말씀드리면
‘영국식 스포츠 영어의 표현을 미국 스포츠인 야구에 ‘공식적‘으로 쓰는 것이 맞는 건가?‘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고백하자면 사실 저는 영어에 그렇게 능통한 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식 영어 위주의 교육을 받았고 토익, 토플 맞춤형 점수 만들기 영어 공부가 제 영어 공부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캐스터 일을 시작하고 또 순수하게 제가 읽고 싶은 마음과 좋은 내용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영어로 된 야구 서적 두 권을 번역했습니다. (괴짜야구경제학, 2011, 볼 포, 2017 두 책 모두 한스미디어) 사실 이 번역도 제 공부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드리는 이야기를 잘난 척으로 받아들여 주시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질문을 받은 김에 저도 공부도 할 겸, 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 지가 궁금하거든요.
시청자분께서 질문 주셨던 더비(Derby, 좀 더 정확히는 더비 매치, Derby match의 준말)는 영국식 영어로 라이벌 간의 대결을 말하고 원래 의미는 같은 지역 라이벌 간의 대결을 의미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EPL의 아스널과 토트넘의 북런던 더비, 에버튼과 리버풀의 머지사이드 더비, 맨유와 리버풀의 노스-웨스트 더비, 런던의 축구팀들 간의 런던 더비 등이 있습니다.
즉, 영국식 영어에서의 더비는 지역과 매우 깅력한 연관이 있는 말입니다.
미국에서도 더비를 씁니다. 야구에서도 씁니다. 딱 떠오르는 야구의 '더비'는 '홈런 더비'죠. 하지만 미국에서 대표적으로 더비라는 단어를 쓰는 분야는 야구보다는 경마입니다.
그래서 미국 최고의 더비는 최대 규모의 상금이 걸려있는 경마 대회, '켄터키 더비'입니다.
그럼 미국은 라이벌 간의 경기를 어떻게 표현할까요? 그냥 단순하게 라이벌리(Rivalry)로 씁니다. 관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경기를 말하기도 합니다. 종목을 통틀어서 대학스포츠 최대 라이벌인 듀크와 노스 캐롤라이나의 대결은 Carolina–Duke rivalry로 표현하고, 대학 미식축구 최대 라이벌인 오하이오 주립대와 미시간의 대결도 Michigan–Ohio State football rivalry로 씁니다.
그럼 야구에서는요? 라이벌리 뒤에 시리즈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아니면 그냥 라이벌리를 빼고 시리즈만 쓰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시리즈가 뉴욕팀들인 메츠와 양키즈의 지하철 시리즈(Subway series)가 있고요. 뉴욕에서 기차로 갈 수 있는 필라델피아와의 기차 노선 이름을 빗댄 양키즈와 필리스의 암트랙 시리즈(Amtrack series), 탬파와 마이애미의 시트러스 시리즈(Citrus series)가 있습니다.
전투를 뜻하는 배틀(battle)도 씁니다. 볼티모어와 워싱턴의 벨트 웨이 배틀, 신시내티와 클리블랜드의 배틀 오브 오하이오 등이 있습니다.
자!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왜 더비가 야구에 쓰이기 시작했을까요? 간단합니다. 우리나라 스포츠팬들 중 인터넷을 주로 사용하는 연령대는 프로야구와 EPL(등의 해외축구)을 모두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사용층의 광장이자 놀이동산인 커뮤니티에서 야구와 축구에서의 용어를 재미로 섞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지역 라이벌을 더비로 표현한 LG와 두산의 ‘잠실 더비’, 롯데와 NC의 ‘낙동강 더비’였습니다.
이런 섞임은 EPL의 영어 표현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라 리가의 대표적인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El Clásico
)'의 KBO판 엘지와 넥센의 엘넥라시코, 엘지와 롯데의 엘롯라시코 등으로 변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더비’나 '엘O라시코' 표현은 이후 헤드라인까지 점령하고 또 방송에 까지 쓰이게 됐습니다. 팬들의 커뮤니티 놀이문화가 주류언론까지 스며들게 된 거죠. 제 경우도 방송을 하면서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다들 쓰니까 몇 번은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특히 최근 야구에서의 ‘더비‘의 본격 활용에는 유튜브 콘텐츠들도 한몫했죠. 각 구단의 유튜브와 야구유튜버들도 '더비'를 별 저항감없이 쓰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그 의미가 확장됐습니다. 트레이드가 발생하면 그 팀들 간의 대결에도 ‘더비’를 붙입니다.
가장 최근 미야자키 구춘 대회에서 있었던 두산과 롯데의 대결은 정철원-김민석의 트레이드로 인해서 ‘트레이드 더비’로 불렸고, 이 경기에서 두산 김민석의 활약이 도드라지면서 베어스 티비는 이 경기를 ‘김민석 더비’로 칭했습니다.
저는 이게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잘못 쓸 때 잘못 쓰더라도 이 정도는 알고는 있자’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왜냐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저도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고, 저도 알고도 잘 못쓰고, 모르고도 잘 못쓰는 판에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할 처지는 아니라서요.
그래서 저는 티빙의 자체제작 중계방송의 명칭인 ‘티빙 슈퍼매치’에도 관대한 편입니다.
제 한 동료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축구에서 쓰는 단어인 Match를 야구에서 쓰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라고요.
이 생각도 물론 존중합니다.
축구, 럭비, 크리켓 등의 경기를 영국에서는 매치 'Match'로 표기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방송사인 BBC에서 제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의 명칭이 'Match of the day'가 되는 겁니다.
반면에 미국에서 경기는 게임 'Game'을 주로 씁니다. 그래서 야구 경기나 농구 경기는 게임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 됩니다. 큰 경기에 강한 투수를 부를 때 '빅 매치 피쳐'보다 '빅 게임 피쳐'가 자연스러운 이유와 MLB.com의 실시간 문자 중계가 'Match day'가 아닌 'Game day'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슈퍼 매치'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왜 이 단어가 익숙해졌을까를 생각을 해봤습니다.
국내에서 슈퍼 매치의 원조는 카드 업체, 현대카드의 홍보 이벤트 경기였습니다. 프리미엄 카드 홍보의 일환으로 시작한 슈퍼 콘서트가 스포츠 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슈퍼 매치가 됐고, 페더러와 나달, 조코비치와 로딕 등의 테니스 위주의 초청 경기와 코로나 시대에 엄청난 관심과 함께 열렸던 당시 LPGA 전, 현 세계 랭킹 1위 맞대결, 박성현 대 고진영의 경기를 ‘현대카드 슈퍼 매치‘라는 이름으로 성사시켰습니다.
이 덕에 ’슈퍼 매치‘는 국내 스포츠 팬들에게 마치 ‘이벤트 경기의 대명사’처럼 각인이 됐습니다.
성공의 케이스를 따라가는 것은 홍보나 마케팅에 기본입니다. 게다가 원조였던 현대카드는 더 이상 슈퍼매치를 개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타 회사의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이 부분도 티빙이 자체 제작 경기에 ‘슈퍼매치‘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합니다.
이 글을 쓰기 전 티빙 관계자에게 올시즌 자체제작 중계방송의 명칭 사용 계획을 물었습니다.
“'매치'가 야구 용어가 아니라 '게임'으로 바꿔보려 했으나, 이미 한 시즌 써서 굳어져 버려서 올해도 동일한 네이밍으로 진행될 예정“
이라고 답했습니다.
‘티빙 슈퍼매치’는 지난 시즌에 주심캠을 필두로 우리 나라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던 중계 화면을 표출했고, 시청자들과 중계진이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신선함을 준 바 있으니 올해도 새로운 시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서 슈퍼 매치가 언젠가 국내 야구에서도 이벤트 경기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슈퍼 게임'하면 저는 90년대에 진행됐던 KBO와 NPB의 최초의 교류전 '한일 슈퍼 게임'이 생각나거든요. 그래서 '슈퍼 게임'만큼은 뭔가 더 거대한 이벤트 경기를 위해서 좀 남겨 놨으면 좋겠어요.
다만 제 동료처럼 엄격한 원칙주의자들에게는 불만이 될 수도 있는 사항이라는 것만큼은 알아주면 좋겠고요.
영국식 용어인 더비나 매치가 주류에서 쓰이게 된 과정을 분석하고 또 나름의 생각도 덧붙여봤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스포츠팬들이 다양한 종목을 함께 즐기다 보니 야구팬이 EPL의 팬이기도 하고 EPL의 팬이 야구팬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융합이 되는 케이스들이 생기는데 더비나 매치의 경우는 그 사례에 해당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주류 언론에 까지 튀어나오지 않았다면 물론 더 좋았을 수도 있죠. 그래도 네티즌들의 놀이 문화에 주류 언론이 반응하고 큰 거부감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용어 자체에 큰 힘이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언어는 살아있다. 우리는 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Language is a living thing. We can feel it changing.'
고전주의자 길버트 하이트의 통찰은 대단합니다. 그는 마치 지금의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했던 이야기를 단 두 문장으로 요약했으니까요.
언어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변화하고, 만들어지고 심지어 사라집니다.
국내에 들어온 해외의 스포츠 용어들 역시 마찬가지인 겁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