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베팬알백] ㉞유희관 ‘101승 전설’의 시작과 2013년 베어스의 도전기

“제 자리가 있을까요?”
“자리가 없지.”
2013년 일본 미야자키. 상무에서 제대해 두산 베어스 1군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유희관은 당시 윤혁 운영팀 차장(현 스카우트팀장)에게 궁금한 듯 넌지시 물었다. ‘자리’란 1군 엔트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개막전 1군 엔트리 자리 하나를 차지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윤 차장은 냉정히 말했다. 야구 선배로서 굳이 후배의 사기를 꺾을 필요는 없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얘기해줄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구속은 몇 ㎞ 던져야 1군에 들어갈 수 있어요?”
“140㎞는 나와야 하지 않을까? 우리 팀에 왼손투수가 없으니까 희망을 가져. 제구력이 좋으니까 136~137㎞까지만 올려봐.”
탁월한 손 감각과 제구력. 여기에 다양한 변화구까지 장착했다. 그러나 아무리 세게 던져도 시속 130㎞ 안팎. 그 시절 유희관은 늘 모자란 ‘구속’ 때문에 1군 엔트리에 포함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처지였다. 상무에서 에이스 노릇을 하며 2군(퓨처스리그) 무대를 평정했지만 1군 무대는 또 다른 차원. 1군 엔트리에 안정적으로 포함되기 위해서는 시속 140㎞가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그러나 유희관은 결국 이 느린 공으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두산이 ‘땜빵 선발’ 유희관의 호투를 앞세워 LG에 설욕전을 펼쳤다. 두산 베어스는 4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13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유희관의 호투와 홍성흔의 쐐기타에 힘입어 6-2로 승리했다.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가 등근육이 뭉쳐 이날 '땜빵 선발'로 나선 유희관은 5⅔이닝 동안 5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를 펼쳐 두산을 승리로 이끌었다. 프로에 데뷔한 2009년 이후 처음으로 선발 등판한 유희관은 프로 데뷔 후 첫 승도 수확했다.』 <뉴시스 2013년 5월 4일자>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2-두산 베어스 시대’ 34번째 주제는 훗날 구단 역사상 최초 좌완 100승 투수가 되는 유희관의 데뷔 첫 선발승 이야기와 2013시즌 두산 베어스의 도전기다.

◆ 유희관 생애 첫 개막 1군 엔트리 입성기
“선발로 키우는 게 좋을까?”
“글쎄, 일단 좌완 불펜이 부족하니 불펜 쪽에서 활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유희관은 2013년 스프링캠프에서 1군 엔트리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를 놓고 걱정하고 있었지만, 사실 두산 김진욱 감독과 정명원 투수코치는 유희관의 1군 보직을 놓고 깊숙하게 얘기를 주고받던 상황이었다. 구속은 느리지만 선발이든 불펜이든 1군 무대에서 어느 정도 경쟁력과 쓰임새가 있을 것이라는 평가였다.
김진욱 감독은 누구보다 유희관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유희관이 2009년 중앙대를 졸업한 뒤 신인드래프트 2차 6라운드 지명을 받고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을 때 2군 투수코치였다. 상무에 가기 전 2010년까지 2군에서 동고동락했다.
“유희관을 처음 본 사람들은 둔하고 느리다는 편견을 가졌어요.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겪어 보니 아니더라고요. 2군 시절에도 공이 느렸지만 장점이 많았어요. 첫째는 자신감이었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둘째는 감각이 굉장히 좋았어요. 야구뿐만 아니라 다른 운동에서도 센스가 남달랐거든요. 머리도 좋아서 처음 하는 동작도 깨우치는 게 엄청 빨랐어요.”
김진욱 전 감독은 2군 시절의 유희관을 그렇게 기억했다.

유희관은 2009년과 2010년 1군과 2군을 오르내렸다. 2군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1군에서는 2년간 구원으로만 21경기, 16.2이닝을 던져 11실점(10자책점)으로 평균자책점 5.40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그저 그런 투수였다.
오히려 유희관의 재능이 먼저 빛났던 곳은 마운드가 아니라 회식 자리나 장기자랑 무대. 두려움 없는 무대 체질에 입만 열면 모두가 쓰러졌다. 압도적인 구속 대신 압도적인 입담으로 두산 선수단을 초토화했다. 그래서 ‘유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유희관은 상무에 입단한 뒤 선발투수로 거듭났다. 2011년엔 22경기에서 5승2패, 평균자책점 3.65를 기록했고, 2012년엔 21경기에서 11승2패, 평균자책점 2.40의 호성적을 올리면서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2012년 상무 제대 후 참가한 일본 미야자키 교육리그와 마무리캠프에서 좋은 보고가 올라왔다. 특히 교육리그에서 시속 일본 타자들을 상대로 5~6이닝씩 무실점으로 막아내자 “상무에서 준비를 잘했다”, “경쟁력이 있다”는 자체 평가가 나왔다. 시속 130㎞ 안팎의 공이지만 통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유희관은 2013년 스프링캠프를 마친 뒤 시범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면서 코칭스태프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4경기에 등판해 6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0.00. 유희관은 결국 프로 데뷔 5년 만에 처음으로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 니퍼트 땜빵으로 나선 데뷔 첫 선발등판
“희관아, 너 내일 선발이다.”
“예? 제가 선발요?”
“니퍼트 담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 준비해라.”
2013년 5월 3일 잠실구장. LG와 어린이날 3연전 시리즈 첫 경기를 앞두고 두산 정명원 투수코치가 유희관에게 다음날 선발로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두산은 2013시즌 초반 상위권에 포진해 있었다. 3월 30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개막전에서 KBO 개막전 사상 최초로 만루홈런 2개(오재원, 김현수)를 폭죽처럼 터뜨리며 9-4 승리를 거뒀다. 다음날에도 7-3으로 이겼다. 4월 2일 잠실 SK전에서도 7-3 승리. 삼성과 SK는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한 최강팀이었다는 점에서 두산으로선 기분 좋은 개막 3연승이었다.
두산은 이후 곧바로 3연패에 빠지는 등 다소 부침도 겪었지만 5월 2일까지 14승1무8패(승률 0.636)의 호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1위 넥센에 불과 1.5게임차 뒤진 3위였다.
생애 처음으로 1군 개막 엔트리에 포함된 유희관도 불펜요원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었다. 처음엔 다소 부담이 덜한 상황에서 등판했지만 갈수록 승부처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1군 무대에서 승리나 패전은 물론 홀드와 세이브 기록이 전무했던 무명 투수는 시즌 9번째 등판(4월 25일 목동 넥센전)에서 1이닝 무실점으로 데뷔 첫 세이브를 올렸다. 이어 4월 26일과 28일 창원 NC전에서는 연속 홀드를 맛봤다. 5월 2일까지 시즌 13경기에 구원등판해 1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2.31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두산은 여기서 5월 3일부터 5일까지 잠실 라이벌 LG와 어린이날 시리즈를 펼쳐야 했다. 그런데 첫 경기에서 3-6으로 패했다. 지난 2년 연속 어린이날 시리즈에서 LG에 1승2패로 루징시리즈를 만들었기에 두 번째 경기는 필승 전략으로 나가야 했다.
마침 선발투수는 두산이 자랑하는 에이스 니퍼트가 나올 차례였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니퍼트의 담 증세가 호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앞선 4월 28일 창원 NC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시즌 4승(1패)을 따냈을 때에도 담에 걸린 상태였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역투를 펼치다 담 증세가 악화됐다.
책임감이 남다른 니퍼트는 “LG전에 던질 수 있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김진욱 감독은 만류했다. “시즌 승부처는 여름”이라며 “길게 보고 무리할 필요 없다”고 달랬다.

“유희관으로 가시죠.”
결국 감독과 투수코치가 머리를 맞댄 뒤 니퍼트를 대체할 임시 선발투수에 대해 내린 결론은 ‘유희관’이었다.
김진욱 감독은 당시 5월 4일 LG전에 앞서 취재진에게 “작년에 상무에서 에이스 역할을 했던 투수다. 선발 로테이션을 메우는 투수라 할 수도 있지만 LG가 좌타자가 많은 만큼 LG 맞춤형 투수로도 볼 수 있다”고 유희관을 선발로 결정한 이유를 소개했다.

◆ 데뷔 첫 선발등판에서 데뷔 첫 승까지
2013년 5월 4일은 토요일. 잠실구장엔 2만7000명의 만원관중이 들어찼다. LG 선발투수는 신정락. 2010년 LG 1라운드 지명을 받은 사이드암 투수로 직전 등판인 4월 28일 잠실 롯데전에서 데뷔 4년 만에 첫 승리(선발 5이닝 1볼넷 노히트노런)를 거두며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유희관은 1회초 위기를 만났다. 선두타자 오지환을 중견수 뜬공으로 잡았지만 김용의와 이진영에게 각각 좌전안타와 볼넷을 내주며 1사 1·2루로 몰렸다. 그러나 박용택과 정성훈을 연속 외야 플라이로 처리하며 무실점으로 막았다. 2회초에는 정의윤과 손주인에게 연속 안타를 맞아 무사 1·2루 위기를 만났지만 또 무실점으로 이닝을 넘겼다.
유희관과 신정락의 역투 속에 5회초까지 0-0의 팽팽한 흐름. 5회말 두산이 선취점을 뽑았다. 오재원의 우중간 3루타와 김동주의 중견수 희생플라이로 1-0 리드를 잡았다.
유희관은 6회초 1사 후 박용택에게 우전안타를 맞은 뒤 정성훈을 2루수 땅볼로 유도해 선행주자를 잡아냈다. 여기서 유희관은 사이드암 유망주 루키 변진수(개명 후 변시원)에게 마운드를 물려주고 데뷔 첫 선발등판을 마쳤다.
5.2이닝 동안 투구수 86구로 5안타 2볼넷 1탈삼진 무실점. 두산이 6-2로 승리하면서 유희관은 감격의 데뷔 첫 승까지 기록하게 됐다.

“초구 변화구를 던져 타이밍을 빼앗고, 공이 느린 만큼 상대 타선의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했습니다. 장난삼아 나의 주무기가 느린 직구라고 해요. 구속은 느리지만 제구가 좋다는 믿음으로 자신있게 던지려고 하죠. ‘두산 왼손 투수하면 유희관’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1군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선발이든 중간이든 팀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유희관은 그날 경기가 끝난 뒤 데뷔 후 처음으로 수훈선수로도 뽑혀 단상에 올라가 인터뷰를 했다.
두산은 유희관의 깜짝 데뷔 첫 선발승을 발판 삼아 다음날인 5월 5일 어린이날 경기까지 5-2로 잡고 2013년 어린이날 시리즈를 2승1패 위닝시리즈로 장식했다.

◆ ‘느림의 미학’ 유희관 선발투수로 승승장구
유희관은 불펜으로 돌아갔다. 니퍼트가 부상에서 회복됐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다시 5경기를 구원등판하면서 2구원승과 1홀드를 추가하며 불펜투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뜻밖의 일이 찾아왔다. 그해 새롭게 영입한 외국인투수 개릿 올슨이 선발 3경기 만에 부진과 부상으로 이탈하더니 복귀가 계속 늦어진 것. 2011년 16승을 올리며 토종 에이스로 맹활약했던 김선우는 2012년 6승9패로 부진하더니 2013년에도 무릎 부상 여파로 시즌 초반 극심한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결국 선발 로테이션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자 유희관에게 다시 선발 기회가 주어졌다.
5월 28일 사직 롯데전에서는 5.2이닝 5실점으로 데뷔 첫 패전을 안았지만, 6월 2일 잠실 넥센전에서 7이닝 3실점 승리투수가 됐다. 그 이후 선발투수로서도 승승장구했다. 7이닝, 8이닝을 소화하는 이닝이터로서의 모습도 자랑했다.
유희관은 2013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41경기(선발 18경기)에 등판해 10승(2구원승) 7패, 1세이브, 3홀드, 평균자책점 3.53(145.1이닝 57자책점)을 기록하며 두산 마운드의 축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10승은 1988년 윤석환(13승) 이후 베어스 국내 왼손투수 중 25년 만에 나온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역설적으로 두산은 OB 시절부터 선발과 불펜 가릴 것 없이 좌투수 갈증에 시달려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역대 베어스 좌완 중 2년 연속 10승을 거둔 투수도 없었지만, 유희관은 그 이후 8년 연속 10승을 올리는 꾸준함을 자랑했다.


◆ 오른손 장호연과 왼손 유희관의 데칼콜마니
데칼콜마니(décalcomanie). ‘복사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décalquer(데칼케)와 ‘편집’이라는 뜻의 manie(마니)의 합성어로 ‘전사법’ ‘등사술’의 뜻을 지닌다. 그림물감, 잉크 등을 종이에 칠하거나 떨어뜨리고, 종이를 한 번 접었다가 펼쳐 대칭 무늬가 생기게 하는 미술 기법을 뜻한다.
2013년 혜성처럼 등장한 유희관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OB 베어스 시절의 전설 장호연을 떠올렸다. 오른손과 왼손 버전이라고 보면 베어스 역사상, 아니 KBO 역사상 이런 대칭 무늬의 ‘데칼코마니’가 따로 없다.
프로 투수라고 보기엔 어색한 시속 130㎞ 전후의 느린 공. 그러나 그 느린 공으로도 둘은 베어스 ‘원클럽맨’으로서 전설을 써내려갔다.
'허허실실' 능글능글한 투구가 전매특허였던 장호연이 109승을 올리며 베어스 역사상 최초 100승을 돌파했다면, 개그맨 같은 외모와 입담으로 '유희왕'으로 불린 유희관은 101승을 기록하며 베어스 역대 두 번째이자 좌완 최초 100승 투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둘 다 다양한 구종과 완급조절, 남들보다 정교한 제구력을 앞세워 팔색조 투구를 펼쳐나갔다.
커브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빠르고 짧게 휘는 커브를 구사하는가 하면, 느리고 각도 큰 커브를 던지기도 한다. 때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지지 않고 쭉 밀고 들어오는 실투 같은 커브로도 타자의 시선과 타이밍을 흐트러뜨리기도 한다.
유희관은 2013년 7월 9일 잠실 삼성전에서 진갑용 타석 때 일명 '아리랑볼'로 불리는 시속 79㎞짜리 '이퍼스 피치(eephus pitch)'를 구사하기도 했다. 당시 진갑용이 발끈하며 포수 양의지에게 항의를 했다. 경기 후 유희관은 "단지 타이밍을 뺏는 공이다.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를 두고 팬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일었다. "프로야구에서 타자를 무시하는 공"이라는 의견과 "야구규칙상 문제 없는 공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가끔 볼 수 있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그만큼 유희관은 느린 공으로 살아남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연구한 투수였다. 이는 1980~1990년대 투수로서 실험 정신이 강했던 장호연과 흡사했다.
장호연은 동국대를 졸업한 뒤 OB 베어스에 입단한 1983년 데뷔 첫 선발등판(개막전)에서 MBC 청룡을 상대로 9이닝 무실점 ‘깜짝투’를 펼치며 데뷔 첫 승을 거뒀다. 중앙대 졸업 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한 유희관은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후인 2013년 데뷔 첫 선발등판에서 LG 트윈스를 상대로 5.2이닝 무실점 역투를 펼치며 데뷔 첫 승을 올렸다.
장호연은 순수하게 프로 첫해 첫 경기였고, 유희관은 5년간 불펜요원으로 34경기를 던지다 첫 선발등판한 게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그러나 둘 다 무실점 투구에 선발 데뷔전 상대가 공교롭게도 MBC 청룡과 그 후신 LG 트윈스였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장호연 선배나 유희관이나 공통점이 많은 투수들이었어요.”
두 투수를 곁에서 다 지켜봤던 김진욱 전 감독은 또 다른 흥미로운 공통점 하나를 소개했다.
“둘 다 멀리 던지기를 하면 홈플레이트에서 100m 거리에 있는 펜스를 훌쩍 넘길 정도로 강견입니다. 과학적으로나 수학적으로는 당연히 시속 140㎞ 이상의 공을 던져야 정상이지만 투구를 하면 그런 공이 안 나오는 게 미스터리였죠.”
누구도 1선발로 생각은 안 하지만, 늘 10승이 보장되는 ‘굳은자’ 같은 투수. 유희관은 감독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가장 안정적으로 계산이 서는 투수로 자리 잡았다.

◆ 운명의 최종전 LG에 패배…정규시즌 4위로 2년 연속 준PO 진출
두산은 2012년 자체적으로 ‘투고타저’ 현상을 보였다. 마운드가 안정된 반면 타선의 파괴력이 떨어졌다.
2013시즌은 정반대였다. 롯데에서 FA(프리에이전트)로 풀린 홍성흔을 4년 만에 베어스에 복귀시키고, 유격수 김재호와 외야수 민병헌이 새로운 동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공격력이 크게 개선됐다. 팀타율(0.289), 팀도루(172개), 팀장타율(0.420) 등 홈런을 제외한 공격 대부분의 지표에서 1위에 올랐다.
그러나 마운드는 다소 허약해졌다. 팀평균자책점 4.57로 9개 구단(NC 다이노스가 처음 KBO리그에 진입) 중 7위. 오현택과 윤명준 등 신진세력이 불펜에 가세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2013년 두산 마운드의 새로운 발견은 ‘느림의 미학’ 유희관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6월초부터 7월초까지 6위로 고정돼 있던 두산은 승부처로 여긴 여름에 선전하면서 4위와 3위를 오가며 반등에 성공했다.
10월 5일 정규시즌 최종전. 전날까지 넥센(72승2무53패)이 2위, LG(73승54패)가 3위, 두산(71승3무53패)이 4위에 포진해 있었지만 세 팀은 불과 반게임차 사이에 촘촘히 자리 잡고 있었다. 시즌 최종전 결과에 따라 포스트시즌 시작점이 달라지게 됐다.
대전에서 최하위 한화가 넥센을 2-1로 꺾었다는 소식이 먼저 들려왔다. 넥센은 여기서 이겼다면 자력으로 2위를 만들 수 있었지만 3위로 떨어져 준플레이오프부터 준비해야만 했다.
잠실에서 두산과 LG가 시즌 최종전 파트너로 만나 경기 후반 힘겨루기를 이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이젠 잠실에서 이기는 팀이 2위를 차지하고, 지는 팀이 4위로 떨어지는 운명의 시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두산은 이날 경기에서 홍성흔과 이원석이 2회초 LG 선발 류제국을 상대로 백투백 홈런(연속타자 홈런)을 때리면서 2-0으로 기선을 잡았다. 그러나 6회말 4점을 한꺼번에 내주면서 역전을 당하더니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2-5로 패하고 말았다.
김기태 감독이 이끈 LG는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10년의 암흑기를 걷어내고 플레이오프 직행티켓을 거머쥐었다. 김진욱 감독 부임 이후 두산은 2년 연속 준플레이오프에서 시작하게 됐다.

◆ 느려도 1등 하는 세상! ‘희망의 모닥불러’ 유희관
필자는 2015년 9월 스포츠동아 기자 시절 [이재국의 야구여행]을 통해 ‘느려도 1등 하는 세상! 희망의 모닥불러 유희관’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당시 시즌 말미에 다승왕에 도전해 가던 시점이었다. 유희관의 특징과 캐릭터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칼럼 원문을 싣는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올라프를 닮았다고 해서 ‘유라프’, 엉덩이가 아줌마처럼 펑퍼짐하다고 해서 ‘유줌마’,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를 ‘파이어볼러’라 부르는 데서 착안해 공이 느린 그를 두고 ‘모닥불러’라 부르기도 한다.
어느새 두산의 에이스로 우뚝 선 유희관(29)의 별명들이다. 주로 외모와 몸매, 느린 공에 빗댄 것들이다. 당사자 입장에선 민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쾌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는 즐겁게 받아친다.
“무플보다는 악플이 나아요. 무미건조한 것보다는 개성이 있는 게 좋잖아요. 팬들이, 특히 어린이들이 친근감 있게 다가올 수 있는 별명들인 것 같아요. 혹시 ‘바나나우유’라는 별명도 있는데, 그건 못 들어보셨어요?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전 요즘 바나나우유를 즐겨먹죠.”
그러고 보니 앞뒤로 불룩한 배와 엉덩이가 눈에 들어온다. 웃기만 하는 기자에게 기왕 별명 얘기가 나왔으니 할 말 다 해야겠다는 듯 거침없이 말을 이어간다.
“물론 ‘느림의 미학’이라는 좋은 별명도 있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유희왕’이라는 별명이 참 좋았어요. 한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는 무명 시절에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거든요. 왕은 1등이잖아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낙천적이다. 유쾌하다. 느린공을 만만하게 보고 타석에 들어갔다가 삼진으로 쓰러지는 타자들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기자들도 무심코 인터뷰에 들어갔다가 그의 압도적 입심에 그만 배꼽을 잡고 쓰러지곤 한다.
압도적.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하는 것. 세상에는 그런 게 있다. ‘전설의 국보투수’ 선동열은 마운드에 오르기 전부터 압도적이었다. 몸만 풀고 있어도 상대 선수와 팬들은 지레 겁을 먹고 보따리를 쌀 준비를 했다. ‘전설의 코미디 황제’ 이주일은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압도적이었다. 그의 얼굴만 보고도 사람들은 미리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을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마운드에 선 유희관은 어디에도 압도적 느낌은 없다. 모두가 만만하게 보고 덤벼든다. 아무리 세게 던져봤자 시속 130km를 겨우 넘는 구속. 그런 유희관이 ‘2015 타이어뱅크 KBO리그’를 압도하고 있다. 9월 3일까지 16승4패, 승률 0.800을 기록 중이다. 다승 공동 1위, 승률 단독 1위. 2개 부문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한때 프로야구를 주름잡았던 왕년의 명포수 박경완은 은퇴를 앞둔 2012년 퓨처스리그 경기에서 처음 만난 상무 시절의 유희관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처음엔 ‘에이, 130km도 안 되는 공으로 무슨 투수를 하고 있나’라고 생각하면서 타석에 들어갔죠. 그런데 당했어요. 옆(덕아웃)에서 보는 공하고 안(타석)에서 보는 공하고 완전히 다른 거예요. 속으로 ‘이것 봐라, 웃긴 녀석이네’라고 생각했죠. 두 번째는 익숙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또 당했어요. 저도 모르게 ‘이 공, 아무나 쉽게 못 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느리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너무 생소하더라고요. 최대한 공을 앞까지 끌고 나와 던지는데, 공 궤적이 그렇게 낮게 깔려 들어오는 건 처음 봤어요.”

스트라이크존 모서리에서 꺾이고, 가라앉고, 휘어지고, 솟구치는 변화무쌍한 ‘핀포인트 컨트롤’과 ‘팔색 변화구’. “왜 유희관의 공을 못 치냐”고 타자들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 박경완과 비슷한 얘기를 한다.
초등학교 시절 무작정 야구가 좋아 전단지 한 장 보고 달려가 시작한 야구지만, 어릴 때는 키가 작아서, 커서는 공이 느려서 괄시를 받았다. 발이 느려서 못 달리는데 열심히 달리지 않는다는 억울한 오해까지 사기도 했다. 장충고 졸업반 때는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고, 대학 졸업 후 2차지명에서도 후순위인 6라운드에 호명돼 2009년 가까스로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 입단 후 방출 소문도 들리고, 군복무로 잊혀진 시간도 있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유쾌하게, 열정적으로 도전했다.
가장 느린 공으로 가장 빠르게 승수를 쌓아나가고 있는 유희관은 어찌 보면 이 시대의 별종 투수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수많은 가능성과 다른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느림으로 빠름을 제압하고, 공간(컨트롤)으로 시간(스피드)을 꺾는다. 가진 자를 부러워하거나, 가지지 못한 것을 탓하기보다, 부족하나마 가진 것을 극대화하면 누구든 세상을 압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금 증명하고 있다.
“공이 느린 건 투수들의 가장 큰 고민이죠. 그런데 공이 느린 고등학생선수들 중에 요즘 저를 롤모델로 거론한다는 선수들이 생기더라고요. 스카우트들도 공 느린 투수라도 경기운영능력은 있는지 더 살펴본다고도 하고. 한편으론 뿌듯하고, 한편으론 제가 책임감을 가지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열정은 즐기는 자에게서 나오는 에너지다. 풍랑을 겪어본 자만이 순항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왕’자가 들어간다고 ‘유희왕’이라는 별명이 가장 좋다는 그는 이제 진정한 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불사조’ 박철순 이후 사라졌던 베어스의 토종투수 다승왕을 향해!』
덧붙이기) 유희관은 그해 생애 최다승인 18승을 거뒀지만 NC 다이노스 외국인투수 에릭 해커가 19승을 올리는 바람에 아쉽게 다승 2위에 그쳤다. 그러나 2013년부터 2020년까지 8년 연속 10승을 거두는 등 은퇴할 때까지 베어스 좌완 최다승인 개인통산 101승의 성적을 남겼다. 은퇴 후 해설위원으로 변신한 유희관은 "1군 엔트리에 드는 것이 목표였던 투수가 100승을 넘겼으니 나는 성공한 야구선수"라면서도 "나중엔 베어스 최다승인 장호연 선배의 109승을 목표로 뛰었는데 그걸 깨지 못하고 은퇴한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다"고 말했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