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깅노트] 최태원의 언어는 왜 대중에게 닿지 못했나

한국 사회에서 '말'은 신중함의 다른 이름이다. 말이 부족하면 무책임으로 읽히고 지나치면 자기방어로 비친다. 그 안에서도 최태원 회장의 언어는 독특하다. 유난히 정제돼 있으면서도 때로는 의외로 솔직하다. 계산된 정중함과 불쑥 튀어나오는 본심 사이를 오간다.

SK텔레콤 유심 해킹 사태 이후 내놓은 그의 언어도 그랬다. 반응은 엇갈렸다. “진심인가?”라는 물음에서 “위약금이나 면제하라”는 비난까지. 사과는 금세 비난이 됐고 비난은 순식간에 번졌다.

그가 직접 나서야만 했던 이유를 되짚어보게 된다. 이동통신사업은 글로벌 수출업종이 아닌 전형적인 내수 산업이다. 문제 발생 시 글로벌 시장 충격보다는 국내 소비자 불편으로 귀결되는 산업 특성상 위기 발생 시 실무 라인이 대응하는 게 통상적이다. 더군다나 최 회장은 SK텔레콤의 등기임원도 아니다. 총수의 등장은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저 하나의 보안 사고로 치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국가기간통신망을 운영하는 통신사에서 2400만건의 유심 정보가 유출됐다. 초기 인지 실패, 고객 통지 지연, 유심 공급 대란, 서버 마비, 고객센터 붕괴에 이르는 모든 단계가 총체적으로 무너졌다. 유심이 뭔지도 모르는 고령층은 사태를 제대로 안내받지도 못한 채 방치됐다. '통신 역사상 최악의 해킹 사고'라는 불명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정부는 SK텔레콤의 신규 가입자 모집을 전면 중단시켰고 국회는 최 회장의 청문회 출석을 요구했다. 법적 책임은 희미할지언정 SK텔레콤의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이상 리더십 차원의 책임을 피하긴 어려웠다. 들끓는 여론은 그를 대국민 사과회견장으로 이끌었다.

최 회장은 이 사태를 "저를 포함한 경영진 모두가 뼈아프게 반성할 부분", "그룹 전체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주변을 맴도는 여러 타이밍이 더해지며 그의 언어는 사과가 아닌 전략으로 의심받았다. 일각에선 이혼소송 항소심 이후 악화된 여론을 의식한 이미지 관리라는 분석을 내놨다. 청문회 출석을 피하기 위한 면피성 퍼포먼스라는 해석까지 나왔다.

의심은 '위약금 면제'에 대한 답변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는 "이용자 간 형평성과 법적 쟁점 모두를 고려 중이며 SK텔레콤 이사회가 논의 중"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가장 민감한 대목에서 말을 아낀 셈인데 그 신중함은 대중의 분노로 돌아왔다.

물론 이 대목은 다시 짚을 필요가 있다. SK텔레콤 약관상 '회사 귀책 시 위약금 면제' 조항이 있지만 실제 적용은 간단치 않다. 피해 범위, 책임소재, 고객 간 형평 문제 등 단순히 감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맥락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고객 한 명에게 면제하면 다른 고객이 제기할 수 있는 형평성 소송 리스크도 있다. 최 회장이 말한 '형평성'은 단순한 말 돌리기가 아니라 선례 리스크를 감안한 현실적인 고민이자 신중함으로 보는 쪽이 좀 더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그의 신중함을 뒷받침할 제도적 시스템이 없다는 데 있다. SK텔레콤에 그러한 대응 체계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기술적 사고 위에 얹힌 조직적 무능과 대응 실패는 SK그룹 전체 거버넌스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 사태가 보여준 것은 오너 한 명의 언어로는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구조적 결함이다. 말과 실행 사이의 깊은 단절은 그의 사과를 성찰이 아닌 전략으로 읽히게 만들었다. 견고한 조직적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언어는 설득이 아닌 연출로 퇴색된다.

그럼에도 사태의 화살은 최 회장 개인에게 쏟아졌다. 국회 청문회 현장에서는 그를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장면까지 연출됐다. 여론의 공기는 이미 비판을 넘어 희화화까지 기울어 있었다. 사안의 구조를 짚는 대신 개인을 향한 감정적 소비로 무게중심이 기우는 순간 그 비판은 설득력을 잃고 본질에서 멀어진다.

이럴 때일수록 묻고 짚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최 회장을 향한 감정의 재생산이 아니다. 그가 꺼내든 '신중함의 언어'를 실질적 시스템으로 옮기게 만드는 냉정한 압박과 유효한 감시다. 말이 구조로 전환되지 않으면 사과는 퍼포먼스에 그치고 리더십은 연출로 전락한다.

SK는 이번 사태를 그룹 전체 거버넌스, 정보보안, 위기대응 매뉴얼을 근본적으로 재정비하는 분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오너 한 명의 사과만으로 시간을 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말이 구조로 이어질 때 비로소 리더십은 설득력을 갖는다.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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