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라이벌' 남진과의 뜨거운 대결
무대 공연중 피습...남진측 사주 오해도
분위기 반전에 최대 히트곡 '고향역' 도움
'고향' 이름 딴 히트곡 잇따라 탄생
한국 가요사에는 라이벌이 많다. 남인수와 현인, 이미자와 패티김, 혜은이와 이은하, 신승훈과 김건모, H.O.T와 젝스키스, 핑클과 S.E.S 등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라이벌은 나훈아와 남진이다. 나훈아를 이야기 하면서 남진을 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1970년대 초․중반에 걸쳐 두 사람이 펼친 ‘용호상박’의 대접전은 ‘숙명의 라이벌’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절묘하다’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모든 게 대조적이었다. 나훈아는 남진과의 라이벌 구도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가 참 황금시대였지요. 경쟁도 했지만 상부상조하기도 했지요. 고향도 호남(목포) 대 영남(부산)이었고, 생긴 것도 한쪽은 아주 잘생겼고 이쪽은 소도둑 같고, 노래하는 스타일도 저쪽은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막 춤추면서 하고. 이쪽은 거의 서서하고…. 그 당시에 또 김영삼 씨와 김대중 씨가 영·호남으로 서로 라이벌이고. 그래서 정치는 누구와 누구, 노래는 누구와 누구, 이랬죠.”
‘울려고 내가 왔나’, ‘가슴 아프게’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면서 이미 톱 가수로 자리매김해 있던 남진이 1968년 돌연 군 입대와 함께 베트남으로 떠나자 국내 가요계는 한동안 나훈아가 평정하게 된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내놓은 곡들이 줄줄이 빅 히트를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1971년 남진이 제대 후 가요계 복귀를 선언하면서 세기의 라이벌전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세간의 화제가 되자 MBC TV 가요프로인 ‘오색의 화원’에서 두 가수를 초대해 ‘노래 바꿔 부르기’로 자웅을 겨루게 했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두 가수의 세기의 라이벌 전은 본격화되었다.

‘나훈아가 판정승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자, 남진은 서울시민회관 리사이틀 무대로 승부를 걸었다. 9월 16일부터 나흘간 펼쳐졌던 ‘남진 귀국 리사이틀’ 공연은 전석 매진이 됐고, 1971년 최다 관객 동원의 기록을 세웠다.
이에 발끈한 나훈아는 바로 응수했다. 10월 2일부터 3일간 ‘나훈아 리사이틀’을 열었다. 나훈아는 의상만 10여 벌을 준비하고 ‘칼춤’에서 ‘고고’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였지만, 관객 동원에서는 남진이 완승을 거뒀다.
이에 나훈아가 다시 선전포고를 한다. 1972년 2월 열린 ‘나훈아의 꿈’ 서울시민회관 공연. 트로트와 팝송, 포크송에다 전통 북치기와 가극 ‘갑돌이와 갑순이’를 순서에 넣는 화려한 버라이어티 쇼로 승부를 걸었다. 남진은 3월에 나훈아와 똑같은 장소인 서울시민회관에서 ‘72 남진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하지만 결과는 5만 명 대 3만 명으로, 이번엔 나훈아의 완승이었다.
팬들의 관심이 후끈 달아오르자 언론들은 두 가수의 신체 조건에서 스캔들까지 시시콜콜 들춰내 비교하면서 라이벌 전을 부추겼다. 그러나 이들의 라이벌 전은 1973년 나훈아가 극비리에 공군에 자원입대하면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공군 입대 이유가 재밌다. 그는 공군에 입대한 이유를 “육군과 해병대에는 이미 많은 연예인들이 다녀왔고 공군에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괴한에 피습, 남진의 사주?
나훈아와 남진의 라이벌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사이다병 피습사건’이다.
1972년 6월 4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 무대에서 나훈아가 공연중 피습을 당했다. ‘쇼 스타 페스티벌’ 이틀째 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쇼가 끝나갈 즈음 나훈아가 세 번째 앙코르곡 ‘찻집의 고독’을 부르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갑자기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라고 횡설수설하며 무대 위로 뛰어든 김 모 씨가 깨진 사이다병을 휘둘러 나훈아의 왼쪽 얼굴에 큰 상처를 입혔다.
피습 후 왼쪽 뺨을 72바늘이나 꿰매는 대수술을 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남진을 교사범으로 지목했다. 나훈아와 라이벌인 남진이 범행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남진의 팬들과 나훈아의 팬들이 서로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나훈아의 말을 들어보자.
“공연을 하는데, 누가 올라와요. 전 누가 악수하러 올라온 줄 알았습니다. 멋도 모르고 손을 내미는데 그냥 사이다병 깨진 게 들어오는 겁니다. 그 사람은 노래를 못하게 제 목을 찌르려 했대요. 그때 목을 찔렸으면 죽었지요. 얼른 피해서 뺨 위에 찍힌 겁니다. 그런데도 계속 사이다 병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 무대에서 8분간을 싸웠습니다.
밑에서는 이걸 쇼로 알고 구경을 한 겁니다. 그땐 일명 ‘다찌마와리’라고 무대에서 싸우는 연기를 하고 그랬거든요. 박노식 씨 같은 분이 그런 연기를 잘했죠. 이게 그런 건 줄 알았던 겁니다. 임석 경찰도 그런 걸로 알고 그냥 보고만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치고받고 하다가 보니까 위치가 바뀌어서 내가 피 흘리는 게 보였고, 또 피가 객석으로 팍팍 튀니까 관객들이 막 울고 난리가 났죠. 결국 내가 그 사람 무릎을 꿇렸고, 경찰이 올라와 검거했죠.”
경찰 조사 결과 범인은 “나훈아를 죽이겠다”라며 남진의 집을 찾아갔던 사실이 밝혀졌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여서 남진은 그를 꾸짖어 내보냈다. 그러나 남진 측근 사람들이 데리고 나가면서 안쓰러운 생각에 5만 원을 줬다. 이것이 빌미가 됐다. 남진은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기자들도 ‘혹시 남진 쪽에서 사주한 게 아니냐’라는 뉘앙스의 기사를 썼다. 처음엔 나훈아도 남진의 사주로 의심했다.
알고 보니 범인은 상습 협박범이었다. 이 사건이 지난 2년 후 그는 다시 언론에 등장했다. 이번에도 남진에게 들러붙어 돈을 뜯다가 붙잡혔다. 2년 전 사건이 남진의 사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겠다고 협박했고, 남진 측은 이번엔 8만 원을 줬다. 1976년에는 남진을 무대에서 폭행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남진의 목포 고향집에 불까지 질렀다.

‘고향역’은 이렇게 탄생했다
피습사건 이후 나훈아에게 숨겨놓은 동거녀가 있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다. 이 때문에 은퇴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바로 그해에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곡이 등장했다. 바로 ‘고향역’이다. 그는 이 곡으로 논란을 딛고 다시 정상에 올라선다.
이 노래의 탄생 배경이 재미있다. 당시 무명 작곡가인 임종수는 많은 곡들을 만들었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 전북 순창에서 서울에 올라와 힘들게 고생하는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빗대어 ‘차창에 어린 모습’을 만들었다.
그는 성공하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도 성공하는 방법은 유명 가수에게 곡을 줘서 히트하는 것뿐이었다. 당시 남자 인기가수는 남진, 나훈아, 박일남, 남상규, 안다성, 남일해, 오기택, 최희준 등이 있었다. 이들 가수들 중에서 이 노래를 나훈아가 부르면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훈아가 전속해 있는 청계천 8가 평화시장 건너편 오아시스레코드사를 무작정 찾아간다.
그러나 사무실 사람들은 임종수를 힐끗 쳐다보고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아시스레코드사를 매일 방문해 사무실을 지켰다. 그러기를 석 달이 지났다. 어느 날 나훈아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임종수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절박감에 벌떡 일어났다. 나훈아의 어깨를 잡았다. “와, 왜?” 나훈아의 첫 반응이었다. 그는 준비한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저는 무명 작곡가 임종수라고 합니다. 나훈아 님을 만나려고 3개월 동안 기다렸습니다. 나훈아 님에게 정말 주고 싶은 곡이 있습니다. 5분이면 충분합니다. 딱 5분만 저에게 시간을 내주십시오.”
나훈아는 그를 따라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임종수는 “먼저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등 뒤에 서있던 나훈아가 앞으로 와 그의 얼굴을 쓱 쳐다보았다. “임 선생님, 지보다 더 노래를 잘하시네예. 한 번만 더 해주이소.” 임종수는 나훈아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단 한번 정을 준 그 사람을 홀로 두고서
혼자만 몸을 실은 열차는 외로워
눈감아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
임종수는 다시 1절을 불렀다. 그러자 나훈아는 “한 번만 더 해주이소”라고 말했다. 노래를 세 번 듣고 난 나훈아는 “제가 한번 따라해 보겠심니더”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악보에 사인을 했다. 녹음하겠다는 뜻이었다.

계속되는 불운, 결국 행운이 되다
1971년 3월 9일. 나훈아가 이 노래를 녹음했다. 임종수가 그 다음날 레코드사를 찾아갔다. ‘차창에 어린 모습’이 타이틀곡으로 편집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무실 직원들이 축하한다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막상 5월에 음반이 나왔을 때 이 곡은 타이틀곡이 아닌 세 번째 곡으로 밀려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일’이 일어났다. 가사가 처량해서 정부가 주도하는 의식개혁운동에 맞지 않는다고 방송 불가 판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노래는 방송 한 번 타지 못하고 사라지는 비운의 신세가 됐다.
임종수는 여전히 무명 작곡가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1971년 12월 말, 임종수는 오아시스레코드사에 들렀다가 우연히 다시 나훈아를 만난다. 그런데 나훈아가 뜻밖의 제안을 하게 된다.
“임 선생님, ‘차창에 어린 모습’이 너무 아깝심니더. 어차피 방송도 안나갔으니 슬픈 가사를 떼고 건전한 가사로 고쳐 주이소. 리듬도 트로트에서 고고로 바꿔주시고예. 고고로 바꾸면 경쾌하게 들리지 않겠어예.”
집에 돌아온 임종수는 노랫말 수정을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 순간 이리(지금의 익산) 남성중학교 다닐 때 황등역에서 이리역까지 통학했던 기억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당시 그는 익산군 삼기면 형님 집에서 몇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 황등역으로 가 통학 열차를 타야했다. 기찻길 옆에 핀 코스모스를 보면서 고향의 어머니가 생각나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났다. 일단 제목을 ‘고향역’으로 정하고 노랫말을 쓰고 곡을 다듬었다.
1972년 2월 8일. 나훈아는 새롭게 고친 ‘고향역’을 취입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타이틀곡이 아니어서 또다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실망하던 임종수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나훈아가 전속사를 지구레코드사로 옮긴 것이다.
지구레코드사에서 ‘녹슬은 기찻길’을 발매하자, 위기를 느낀 오아시스레코드사는 맞불을 놓기 위해 묘수를 짜낸다. 나훈아의 앨범 중 타이틀곡을 제외하고 알려지지 않은 노래 ‘베스트 10’ 음반을 내놓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고향역’이 타이틀곡이었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유튜브= 나훈아의 '고향역'
음반이 출시되자 전국에서 ‘코스모스 피어있는~’ 노래가 울려퍼져 나갔다. ‘고향역’은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동한 출향인들의 마음을 뒤흔들며 빅히트를 기록했다.
나훈아의 ‘고향 시리즈’ 노래로는 ‘고향역’ 외에 ‘물레방아 도는데’, ‘꿈속의 고향’, ‘고향으로 가는 배’, ‘고향 나루터’, ‘고향의 그 사람’, ‘머나먼 고향’, ‘너와 나의 고향’, ‘꿈에 본 어머니’, ‘고향의 어머님’ 등이 있다.
‘고향역’의 작곡 및 작사가인 임종수는 오랫동안 KBS ‘전국노래자랑’의 딩동댕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고향역’ 외에도 이후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태진아의 ‘옥경이’,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 등 히트곡을 작곡했다. ③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