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후기
모녀 사이를 무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무조건적 내리사랑을 주는 엄마와 이를 받기만 하는 딸은 너무 진부한 규정일 거 같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지만 친구 같고, 같은 성(性)의 특별함, 그 이상이지 싶다. 세상 모녀가 다 그런 건 아닐 거다. 어떠한 이유로 차라리 남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 않을까. 앞서 말한 '규정'이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엄마와 딸이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엄청난 영화를 보고 기분이 묘했다. 자매만 있는 집에서 자라 옷을 공유하긴 해도 내밀한 속옷까지는 각자 입었다. 그런데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고, 그럼에도 엄마와 딸 사이는 심하게 벌어져 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말도 안 하는데 왜 속옷은 같이 입는 걸까. 두 여성의 사연이 몹시 궁금해졌다.
투 마음 원 사이즈

엄마 수경(양말복)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마가 아니다. 불같은 다혈질에 자기 멋대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자신을 규정하는 색은 ‘레드’다. 머리색부터 속옷 , 자동차까지 깔맞춤이다. 가장 눈에 띄는 빨간색으로 치장하며 화려하게 주목받고 싶은 사람이다.

반면, 딸 이정(임지효)은 그런 엄마 그늘에 잿빛이 되어갔다. 소극적이고 말주변 없는 성격은 엄마 배에서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정반대다. 이런 이유로 엄마는 시시콜콜 잔소리와 멸시를 반복한다. 분에 안 풀리면 주변에 아무거나 잡고 때리는 건 일도 아니다. 자기 자식이지만 마음에 다는 게 요만큼도 없다며 폭언을 일삼는다.
독립을 오랫동안 꿈꾸었지만 ‘네까짓 게 어딜 나갈 수 있겠냐’는 말로 굳어졌다. 돈도 없고 용기도 없는 이정은 우연히 회사 동료 소희(정보람)의 집에 머물면서 조금씩 변화를 맞는다. 그 발단은 마트에서부터였다.

장 보러 가면서부터 티격태격, 결국 싸움으로 이어졌다. 차에서 내려 엄마를 노려보는 이정을 못내 분에 겨워하는 수경의 처절함이 이어진다. “죽여 버릴 거야”를 연발하던 수경은 악셀을 밟고 이정을 덮쳤고, 결국 재판까지 이어진다. 이정은 평소 엄마의 폭력성을 고발하며 악에 받친다. 과연 수경의 주장대로 오래된 차의 급발진인 걸까, 이정의 주장대로 오래된 엄마의 살인미수인 걸까?
가족 보다 이해받길 원한 개인

영화는 표면적으로 물건(속옷)을 공유하며 생기는 감정과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 이면에는 가족의 역사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연대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섬세한 아이러니함을 담고 있다.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애증, 같이 살지만 철저히 외로운 인간, 그리고 여성이란 존재다. 가족은 서로 분리되기 힘든 끈끈함을 강조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심하게 곪아 있기도 하다. 사회가 주입한 공동체만이 가족의 정답이 아닌 것처럼, 실체를 탐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런 가족도 있고 이런 사이도 있다고 말이다. 톨 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말한 첫 문장이 떠오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모습이지만, 불행한 가족은 모두 제각자의 불행을 안고 있다
그래서, 가족이란 묶음, 모녀라는 세트가 아니라, 여성이란 1인분을 강조한다. 'The Apartment with Two Women'란 영어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다. 있는 대로 사랑해 주지 않는 엄마가 미운 딸, 나 자체로 인정받고 싶은 엄마의 갈등은 내내 불편함을 유발한다. 화만 낼 뿐 제대로 욕구를 충복 받지도, 해소하지도 못해 무섭도록 할퀴기만 한다. 그러다 이내 ‘외로움’으로 모인다. 가족의 큰 틀 안에서 개별적 존재임을 인정할 때야 관계도 진전되고 성장도 가능하다는 주제가 이제서야 이해된다.
이제는 대세 키워드 ‘아줌마’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5관왕,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우디네 극동영화제 초청까지 연인 유수 영화제의 부름을 받으며 타이틀 도장 깨기 했던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궁금증이 있을 것 같다. 시나리오와 연출을 겸한 김세인 감독의 자전적 서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인터뷰를 통해 감독은 실제 경험한 자전적 영화는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 엄마와 속옷을 공유했었다고 말했다.
또한, 중년 여성에게 큰 영감을 받았다며 차기작도 그 연장선이라고 밝혔다. 탐구하고 싶은 매력적인 중년 여성이 바로 ‘수경’이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여자이면서 확실한 주종 관계를 원하는 엄마로 해석된다. 대체로 한국에서는 이 두 역할이 같지 않을 때 상충한다. 영화는 그 지점을 현미경으로 보듯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불안한 스릴까지 유발해 괴물 같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로 중년 여성이 주인공인 한국 영화를 좀 더 보고 싶다면 <윤시내가 사라졌다>, <경아의 딸>, <정순>, <오마주>를 강력 추천한다. 최근 정형화되지 않은 한국 아줌마 캐릭터가 큰 인기리에 약진하고 있다. 시대가 변해 누구의 아내, 엄마, 고모, 이모였던 아줌마가 주축이 되어 자기 이야기를 펼쳐낸다. 앞으로 더 많은 영화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싶다.
평점:★★★★★
- 감독
- 김세인
- 출연
- 임지호, 양말복, 정보람, 양흥주, 권정은
- 평점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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