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현의 당신을 위한 배우수업]
‘자감(自感)’을 통한 관객과의 동기화: 유해진은 촬영장에서 단순한 흉내를 넘어 배우 자신의 심리·신체적 상태를 배역과 일치시키는 ‘자감’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 관객의 숨겨진 기억과 상처를 건드려, 단순 관람을 넘어선 정서적 치유(Catharsis)를 일으킨다.
다정함이 만든 ‘원초적 안전감’: 배우는 수많은 시선이라는 강력한 스트레스 속에서 연기하는데, 유해진은 평소 주변과 쌓아온 다정한 관계를 통해 현장을 심리적으로 안전한 공간으로 바꾼다. 이러한 안전감 덕분에 그는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가장 유약하고 진실한 감정을 카메라 앞에서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
다미주 이론, 연결이 공포를 이기다: '다미주 이론'이 있다. 다정한 분위기는 복측 미주신경을 활성화한다. 그의 연기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긴장을 다정함으로 치환해 주변과 동기화시킨 치열한 훈련의 결과물이다.
엄흥도가 단종의 죽임을 돕던 그날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촬영장에서 엄흥도 역을 맡은 주인공 유해진은 최고의 연기를 위해 특별한 장치를 고안해 놓고 있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중요한 씬을 촬영할 때, 장항준 감독은 비극의 어둠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주 맑은 날을 원했다. 하지만 당일은 그와 스태프들의 강한 바람과는 달리, 강에서 아름다운 윤슬을 볼 수 없는 흐린 날이었다.
이 장면에서 아무도 날씨에 대해 아쉬움을 얘기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 장면의 미장센보다 숨죽여 우는 엄흥도의 유해진 연기가 드러내는 생리적 비장함에 동기화됐기 때문이다. 떠내려가는 단종의 시신을 향한 감정은 잠시 후에, 아니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밀려왔다.
엄흥도가 단종의 죽음을 돕던 장면을 촬영하는 날 아침, 분장실서 울음을 삼키는 유해진 배우를 보고 스태프들은 모른척했다.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 배우가 무심코 인사를 건네는데도, 그는 작은 손짓으로 인사를 흘려보낼 뿐이었다.
유해진은 이미 단종의 죽음을 준비하는 연기적 상황에 완전 몰입된 상태였다. 이를 촬영의 순간까지 팽팽하게 유지하기 위해 연기에 불필요한 자극들을 모두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 장면을 떠올린 한 관객은 몇 해 전 예고 없이 떠난 아이가 떠올랐다고 했다. 영화평 댓글 아래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의 사연이 이어졌다. 연기라는 가상의 상황에서 배우의 '생리적 자감'이 트리거(trigger)가 된 것이다.
연기를 위해 감정에 몰입한 상태를 메소드 연기의 창시자, 스타니슬랍스키는 ‘самочувствие(사마춥스뜨비에)’라고 정의한다. 북한대국어사전에는 ‘자감(自感), 배우가 주어진 상황에서 느끼는 심리적, 신체적 상태’라고 등재되어 있다.
배우의 자감이 관객들의 몸과 마음에 각인된 기억들을 자극했고, 관객들은 기억에 저장되어 있던 감정을 함께 방출했다. 이러한 과정은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강렬하게 감정 에너지를 방출시키는 것이기에, 재경험되는 상처나 트라우마라 하지않고 '치유'라고 부른다.

유해진의 '다정함의 힘'
영화 촬영 현장에서 배우는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한다. 시선은 배우에게 강력한 생리적 반응을 유도하는 자극이다. 수십 명, 많게는 백 명이 넘는 현장의 관계자와 동료 배우들의 주의집중과 시선에 흐트러지지 않은 채, 유해진은 어떻게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자감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올해로 데뷔 29년 차인 유해진은 개봉 작품을 기준으로 총 66편의 영화에 출연한 중견배우다. 평균 1년에 두세 편의 영화 작업을 쉬지 않고 해왔다. 뛰어난 연기력은 물론, 따뜻한 인성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이번 <왕과 사는 남자>에서도 그가 감독 및 스태프들, 그리고 배우들과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으며, 또 이런 관계가 촬영 현장에서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회자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다정한 배우 중 한 명인 유해진의 '다정함의 힘(power)’은 심리학적 그리고 연기예술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유해진은 항상 촬영장에서 모든 이와 편안하고 안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세심하게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촬영장 주변을 산책하거나 뛰어다니면서, 자신의 심장에너지, 안전하고 다정한 에너지를 유감없이 발산하는 스타일이다.
일상에서도 일관되게 자신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의식적인 행위일 수도, 혹은 무의식적인 행위일 수도 있지만, 꾸준히 그러한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게 핵심이다.
다정함에 '충만한' 분위기 형성은 이번 영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크게 미쳤다. 장항준 감독은 스태프의 리더로서, 유해진은 배우들의 리더로서 창의적이면서 안전한 분위기를 함께 형성했다. 장 감독 역시 최고로 다정한 감독 중 한 명이다.
단종 이홍위 역할의 박지훈 배우가 촬영 중간에 물가에서 장난치는 모습을 애잔한 장면으로 포착해 영화에 넣자고 한 것은 유해진의 아이디어였다. 대본이라는 정해진 서사를 뛰어넘는 '직관'이라 할 것이다.

서사는 비었는데, 감정은 농밀했다
<왕과 사는 남자>는 대본을 따라 대본의 서사 순으로 촬영한 영화다. 제작 및 연출진의 치밀한 계획이 없다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서사에 따라 배우들은 순차적으로 영화 속 캐릭터의 삶과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엄흥도의 아들 역할을 했던 김민 배우와 단종 이홍위 역의 박지훈 배우는 실제로 유해진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촬열장 일상에서 구축한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는 영화 속에서도 밀도를 더하며 빛을 발했다.
영화의 한정된 러닝타임 안에 다 담을 수 없었던 엄흥도와 단종의 서사적 공백도 이 밀도 높은 관계가 채워나갔다.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들은 이 서사적 공백으로 느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채운 밀도 높은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주목하지 못했다.
유해진은 그 비운의 날, 자신이 처한 생생한 상황이 연기임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다. 또 주변사람들이 자신의 진실한 동료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랬기에 내밀한 감정 표현으로 유약해져 있는 자신이지만, 누구도 윽박지르거나 위협하거나 연기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원초적 '안전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운의 장면은 그렇게 카메라에 담아졌다.
트라우마 치료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스티븐 포지스 박사는 '다미주 이론(多迷走이론, Polyvagal Theory)'으로도 이를 설명한다. 그는 원초적 안전감을 "가장 나중에 진화된 부교감신경인 배쪽 미주신경이 활성화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 상태에 들어갔을 때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강하게 연결되거나 동기화되며, 모두가 함께 그 시간과 장소를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한다. 때문에 유해진의 이 생리적 안전감(Sense of safety)이라는 감각은 삶과 촬영현장에서 치열하게 획득하려 노력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렌즈에 잡히지 않는 관계의 다정함
영화는 관객과 대중에게 완벽한 서사가 아니라 잠시 삶에서 벗어나 또 다른 삶의 무대와 사건을 경험하게 하는 마술이다. 한 관객이 남긴 댓글, “관객으로 들어갔다가 백성으로 나왔다”는 한 줄 평은 이를 정확히 설명한다.
유해진 배우의 ‘다정함’은 단순한 성격이나 유머러스함이 아니다. 가장 큰 스트레스와 긴장을 경험하는 촬영 현장에서 감정의 균형을 잡기 위해, 때로는 반대로 비극적이며 잔혹한 서사를 온몸으로 만끽하기 위해, 평생에 걸쳐 단련한 그의 심리적 안전감과 연결되어 있는 감각이다. 다정함만이 긴장이라는 두려움을 상쇄할 수 있다. 영화의 압도적인 흥행이 이를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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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우현은 러시아의 모스크바 슈킨연극대를 졸업하고, 귀국 후 상담심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이란 통합적 연기방법론과 상담심리를 융합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마약사범을 위한 중독회복, 예술가의 무대공포증 대처, 교사들을 위한 트라우마 대처, 그리고 일반대중을 위한 안전한 감정만끽 등 다양한 주제의 구조화된 프로그램들을 교육하고 있다. 연기예술이 몸과 마음을 이해하고 균형 있게 사용하는 매우 실용적 방법임을 확인하며, 모두를 위한 연기예술 프로그램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