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반도체·AI 전사로 돌아온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 “韓, 메모리 반도체·스마트폰 영광 잊고 조직 유연해져야”

이은영 기자 2024. 9. 3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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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경희대 지리학, 서강대 언론대학원 석사,현 서강대 초빙교수, 전 MBC 경제부장, 전 국회의원, 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선임 연구원 사진 이은영 기자

“그동안 우리는 메모리 반도체에 너무 취해 있었다. 그사이에 경쟁국은 차세대 반도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인공지능(AI) 산업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 시대에 심취해 정부가 클라우드 도입과 데이터센터 투자를 주저하는 사이, 선진국과 AI 기술 격차는 가속도를 내며 벌어졌다.”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 장관이 ‘반도체·AI 전사(戰士)’로 돌아왔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와 산업계가 기술 발전에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쓴소리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결국 중요한 건 조직 문화”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든 기업이든 조직 문화가 유연해져야 빠르고 정확한 의사 결정이 가능하다”며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했다.

박 전 장관은 30년 전 경제부 기자 시절 “나는 지금 반도체에 미쳐 있다”던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말에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확신했다고 한다. 4선 국회의원과 중기부 장관을 거친 그는 202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반도체와 AI를 연구했다. 2년간의 연구원 생활을 마친 뒤 지금은 서강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엔 청년들이 사회 각계의 리더를 만나 조언을 얻을 수 있도록 서강대와 멘토링센터를 설립했다. 하버드대의 활발한 멘토링 시스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동료들과 십시일반 기금을 모았다.

박 전 장관은 일각에서 제기되는 정계 복귀설에 대해선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기자 시절 산업 현장과 기업가로부터 배운 점(点)이 국회의원과 중기부 장관 시절을 보내며 선(線)으로 연결됐고, 다시 현장을 누비는 지금은 수많은 선으로 짜인 면(面)을 보고 있는 것같이 느낀다”며 “지금이 좋다”고 말했다. 박 전 장관을 9월 4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에 한국이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산업계는 무얼 놓치고 있나.

“우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은 미국이 설계하고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대만은 시스템 반도체를 만들고, 유럽과 일본은 소재·부품·장비를 담당하는 분업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 트렌드가 AI 반도체로 점차 넘어가고 있다. 미국은 이에 맞춰 공급망을 재편하려고 하는데, 그간 한국과 대만에 기회를 많이 줬으니, 앞으로는 더 기회를 주기 곤란하다는 메시지를 보이고 있다. 두 나라의 반도체 산업 의존도가 너무 높아 그 비중을 더 늘리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입장이다. 새 공급망에는 우리나라 대신 일본과 싱가포르가 들어가 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메모리 반도체에 취해 있던 탓이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일본이 다시 포함됐다니 의외다.

“일본 외교의 승리다. 일본은 1985년 미국과 플라자 합의 때문에 반도체 산업이 완전히 쇠락했고, 우리 기업은 그 틈을 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꿰찼다. 지금 일본의 전략은 쉽게 말해 ‘한국과 겹치지 않는 반도체 제조 분야를 하겠다’ ‘잃어버린 30년을 돌려달라’ 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일본이 2027년 2㎚(나노미터·10억분의 1m) 칩 양산을 목표로 미국이 아닌 홋카이도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일본이 목표로 하는 2㎚ 칩은 우리가 못하고 있는 영역이다.

일각에선 지금 28㎚ 칩을 만들고 있는 일본이 2㎚ 칩을 어떻게 만들겠냐고 하지만, 나는 시각이 다르다. 반도체 필수 요건은 사람, 물, 전기다. 일본 산업계에 물어보니 ‘사람(인재)은 해외에서 데려오면 된다. 더 중요한 건 물과 전기’라고 말하더라. 홋카이도는 물과 재생에너지가 풍부하다. 2030년엔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앞설 수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용인시

싱가포르는 어떤 역할을 하나.

“패키징에 주력한다. 패키징은 고대역폭 메모리 반도체(HBM) 고도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싱가포르는 특히 칩렛, 즉 서로 다른 용도의 반도체를 하나의 판으로 만드는 패키징 기술에서 앞서나가고 있다. 또 싱가포르는 패키징 기술 경쟁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미국과 중국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아,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것도 큰 강점이다.”

반도체의 필수 요건(사람·물·전기) 중에 가장 해결이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인재는 많지만, 미국의 짐 켈러(반도체 설계 업체 텐스토렌트 대표. ‘반도체 설계의 전설’로 불린다) 같은 설계자가 없다. 한국에는 산업 전체를 볼 줄 아는 설계자가 필요하다.”

500조원이 투입되는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사업은 어떻게 평가하나.

“정석에서 벗어난 결정이라고 본다. 전력 소비량이 많은 수도권에 반도체 공장까지 짓는다는 건 무리한 결정이다. 용인 클러스터에서 필요로 하는 전력은 연간 10(기가와트)다. 수도권 전력 수요량의 4분의 1에 달한다. 정부는 이 중 3는 신규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를 지어 대응하고, 나머지는 강원도 삼척에 원전을 세운 뒤 초고압 송전선을 깔거나 충남에서 전기를 끌어오겠다고 한다. 2035년이 되면 공업용수가 부족하게 될 거라는 전망도 나왔다. 위치 선정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국민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AI 산업에서 강대국과 격차도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격차의 시작점은 무엇이었나.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을 제때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중기부 장관 시절(2019~2021년)에 보니, 공무원은 보안 문제 때문에 클라우드 접속을 못 하더라. 책상에 컴퓨터를 두 대씩 놓고 일한다. 하나는 내부용, 하나는 외부 접촉용이다. 공무원이 클라우드를 안 쓰니 기업도 같이 제약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클라우드 시대를 놓쳤고, 그 여파가 자연스레 AI로 번졌다. 우리 국민의 생성 AI 활용도는 필리핀보다도 떨어진다고 한다. 정부와 기업은 정신을 차리고 어디에 집중적으로 투자할지 잘 봐야 한다.”

어디에 투자를 집중해야 하나.

“소버린 AI(Sovereign AI·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AI)다. 우리만의 소버린 AI를 잘 디자인해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에 수출할 수 있다면 희망이 있다. 중동과 동남아도 AI 기술이 미국에 종속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리가 대안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소프트웨어 연구개발(R&D) 인력 개발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소프트웨어의 핵심은 유연한 조직 문화, 즉 소통이다. 지금 같은 지시 문화로는 인재가 탄생하기 어렵다. 그런데 조직 문화는 생각보다 바꾸기 쉽다. 리더만 생각을 바꾸면 된다. 일방향 지시가 아닌 토론으로 의사 결정을 하면, 오히려 일에 속도가 붙고 누가 어디서 실수했는지가 금세 파악돼 수정이 쉬워진다. 조직 문화 개선으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반도체·AI 패권 전쟁에서 중소기업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중소기업은 대기업보다 민첩하기 때문에 혁신을 주도할 수 있다. 리벨리온, 퓨리오사 AI 등이 그런 기업이다. 이들은 엔비디아보다 성능 좋은 칩을 개발한다. 그런데 정부는특혜 시비에 걸릴 것을 우려해 이런 기업을 지원하는 데 소극적이다. 유망한 스타트업을 글로벌 테크 기업으로 키워내려면 정부가 먼저 레퍼런스를 만들어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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