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산책] 25. 실험적·전위적 불씨로 시작해 한국미의 정수로 귀결한, 강국진

강국진 작 '역사의 빛' 1989년, 캔버스에 아크릴, 181x227cm.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강국진(1939-1992)은 진주에서 태어나 1944년부터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부산 동래고등학교 재학 시절 미술에 소질이 있음을 알아본 미술 교사의 추천으로 당시 경남여고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이던 하인두 화백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965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83년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했다. 강국진은 스승 하 화백과의 인연이 깊었는지, 이후 한성대학교에서 함께 교수 생활을 했다.

강국진의 초기 작업은 실험적 퍼포먼스, 오브제 설치 미술이 중심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재학시절 동문인 김인환, 남영희, 양철모, 정찬승, 최태신, 한영섭 등과 함께 '논꼴 동인'1)을 결성하여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논꼴 동인전>을 3회 열었다. 이후 1967년부터 정강자, 정찬승 등 홍익대 동문들과 '신전 동인'2)을 구성했다. 작가는 신전 동인 구성원들과 함께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 개막 시 최초의 퍼포먼스3)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선보였고, 이듬해 '한강변의 타살'(1968) 등 퍼포먼스를 기획 및 시연하는 등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행위미술을 실험적으로 선보였다. 나아가 당시 새로운 미술 실험으로 일상적 사물인 유리병, 거울, 작가의 사진 등의 오브제4)를 활용한 초기 설치 작업도 시도했다. 작가는 신전 동인전으로 활동하며 당시 엥포르멜5)로 집중되던 기성 미술계에 대해 비판하고 새로운 형식, 자유로운 조형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였다. 즉 강국진은 비미술적 매체인 일상적 오브제 또는 퍼포먼스 등을 실험적으로 선보임으로써 새로운 미술을 제안하며 '생활 속 미술', '환경 속 미술'을 지향하였다.

이후 작업은 한국미술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작품까지로 그 폭이 확장된다. 미술평론가 오광수에 따르면, 작가의 작품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기는 1965년 결성된 논꼴 동인에서 시작하여 이후 신전 동인으로 이어지는 시기로,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초기 행위예술과 매체 실험적 작업을 했다. 2기는 1970년대 전반 오브제(Object)를 활용한 입체 작업이 주를 이룬다. 3기는 1980년대 전반의 선조(線造) 작업 시기로 미세한 필선을 정교하게 반복적으로 쌓아 올리듯 긋는 표현 방식의 '가락' 연작이 있다. 마지막 4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2년까지로, 이전 평면 작업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형상성을 회복해 서사를 탐구하는 시기이며 '역사의 빛' 연작이 있다. 이처럼 강국진은 평생 독자적인 실험적 조형 어법을 탐구하기 위해 회화, 판화,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풍부하게 다뤄내며 현대미술의 한국적 수용 방식을 실험한 작가다.

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 '역사의 빛'(1989)은 작가가 작고하기 3년 전에 그린 회화로 말년기 작품에 해당한다. 작가의 4기에 해당하는 작품 중 '역사의 빛' 연작의 특징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어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작가는 앞선 3기의 선조(線造) 중심의 '가락' 연작에서부터 전통적 우리의 미감을 현대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4기에 이르러 '역사의 빛' 연작을 발표했고, 전통적 도상의 구상과 추상의 이중화면을 통해 우리의 전통적, 근원적 서사를 탐구했다. 앞선 3기 '가락' 연작이 미세하고 정교한 필선을 반복적으로 쌓아 올리듯 긋는 작업 방식이었다면, 4기 '역사의 빛' 연작은 강렬한 원색 바탕 위에 일필휘지로 그은 듯한 굵은 기운생동하는 선으로 전통 미술의 소재를 형상화하여 담은 면과 함께 삼각형, 사각형, 원 등의 기하형태의 조형요소로 나타낸 추상적인 면을 좌우로 병치한 작업이 주요한 특징이다.

소장품 '역사의 빛'은 이중 화면으로 캔버스 2개 면이 좌·우로 붙어 하나의 작품이 되는 구조다. 왼쪽 화면에는 붉은 강렬한 원색의 바탕에 우리의 전통적 도상 중 하나인 국보 91호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의 형상이 굵고 힘찬 선으로 늠름하게 그려져 있다. 신라의 대표적 유물, 전통 도상 옆에 함께 병치된 오른쪽 면에는 '역사의 빛' 연작이 대개 그러하듯 삼각형, 사각형, 원 등의 기하 추상의 형상이 대담한 구성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른 연작과 달리 추상적 이미지 사이에 분명히 붉은 삼각형 안에 구상적 형상의 '나무'가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는 왜 우측 화면의 추상 형상 중에서 '나무'만 이토록 구체적인 이미지로 묘사했을까? 방형의 노란 상자 안에 든 '알'의 이미지는 어떤 서사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자 했던 것일까? 강국진이 작품에 담아내고자 한 서사는 신라의 건국 신화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삼국유사> 중 신라 김알지 건국 설화에서 찾을 수 있다.

"붉은 구름(붉은색 삼각형)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뻗치며 구름 한가운데 금빛의 궤짝(노란색 네모난 상자와 같은 형상)이 나무 끝에 걸려 있었으며(붉은 삼각형 안의 나무 이미지), 빛이 황금 궤짝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궤짝을 열어 보니 어린 남자 하나가 누워 있었다. 이는 마치 알(다섯 개의 동그란 알의 형상)에서 태어났던 또 다른 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옛일과 같으므로 알지라 이름을 짓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 씨로 하였다."

<삼국유사>의 설화 내용과 작품이 일치한다. 이처럼 작가는 말년기에 이르러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진지한 탐구에서 시작해 우리의 역사와 전통으로 귀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의 빛' 연작으로 탄생하였으며, 민족 미의식의 본질을 추적하여 현대미술로 새롭게 재해석하고자 노력한 그만의 고유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강국진의 말년 화업은 한국미술의 역사를 탐구했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며, 이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본질, 근원에 대해 사유하게 함으로써 큰 울림을 준다.

/김주현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각주
1) 논꼴 동인은 홍익대학교 동문인 정찬승, 한영섭, 최태신, 김인환 등 5인이 결성한 미술 단체이다. '논꼴'이라는 명칭은 공동 작업실이 있는 홍제원 터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2) 신전 동인은 1967년에 홍익대학교 출신의 김인환, 정찬승, 강국진, 양덕수, 심선희, 정강자가 결성한 미술 단체이다. 3회전을 끝으로 논꼴이 해체한 뒤 결성된 동인이다. 오브제와 설치미술, 해프닝 등과 같은 앵포르멜을 탈피한 실험적 미술을 지향하였다.
3) 퍼포먼스는 회화나 조각 등의 작품에 의하지 않고, 미술가의 육체적 행위로 표현하는 행위미술이다. 시간성, 과정을 기반으로 하여 결과물이 남지 않는 비물질 미술의 특징이 있다.
4) 오브제는 물건, 물체, 사물 등의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다. 미술에서는 주제에 대응하여 일상적, 합리적 의식을 파괴하는 물체 본연의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즉 일상적인 사물의 용도나 기능에서 탈피하여 물성 그 본연의 존재 방식 그 자체를 통해 색다른 미적 체험을 일으키는 것으로, 회화도 조각도 아닌 새로운 조형의 개념이다.
5) 앵포르멜은 프랑스어로 '비정형(非定形)'이란 뜻이며, 기존의 모든 회화 개념 및 소재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에 억눌린 인간 내면의 극한성을 실존주의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했다. 전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전개된 서정적 추상화의 한 경향이며, 이후 국제적 미술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 참고문헌
1. 강국진 역사의 빛: 회화의 장벽을 넘어서, 경남도립미술관, 2007. 6.
2. 황인, '과묵한 판화가 강국진, 청년 땐 한강변서 행위예술 동참, <조선일보>, 2024. 4. 6.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알지 설화(encykorea.aks.ac.kr/Article/E0009727)
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정보(mmca.go.kr/collections/collectionsList.do)
5.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시공사, 2017
6. 월간미술 엮음, <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201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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