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강변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시간
연천 호로고루

겨울이 되면 풍경은 단순해집니다. 나무는 잎을 내려놓고, 강은 색을 덜 어내며, 오래된 흔적만 또렷하게 남습니다. 연천 호로고루가 가장 잘 보이는 계절이 바로 이때입니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임진강을 굽어보는 현무암 절벽 위에 자리한 호로고루는 고구려가 남긴 국경의 흔적입니다. 화려한 복원이나 과장된 설명 없이, 성벽과 절벽, 그리고 강물이 만들어낸 풍경만으로도 이곳은 충분히 묵직합니다. 그래서, 계절이 정리된 겨울에 이 성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강을 지키던 성, 호로고루의 자리

호로고루는 개성과 한강 유역을 잇는 길목에 놓인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원당리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와, 그 위로 솟은 현무암 단애는 자연 자체가 방어선이 되었고, 고구려는 그 위에 성을 쌓았습니다.
이 성은 경기도 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 평지성 가운데 당포성, 은대리성과 함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성벽 전체 둘레는 약 401m로 크지 않지만, 약 28m 높이의 현무암 절벽 위에 자리한 입지는 결코 작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겨울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왜 이 자리가 선택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강은 깊고, 절벽은 날카롭고, 성은 그 위에서 조용히 모든 방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겨울에 더 또렷해지는 성벽의 윤곽

호로고루의 동쪽 성벽은 이곳의 핵심입니다. 현무암 대지의 끝을 막아 쌓은 이 성벽은 가장 높은 지점이 약 10m에 이르며, 성 위에 서면 임진강의 흐름과 맞닿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에는 시야를 가리는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성벽의 축성 방식, 흙을 다져 올린 뒤 돌로 높인 구조, 석성과 토성이 결합된 고구려식 축성술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2000년부터 진행된 발굴조사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특징이 확인되었습니다.
눈이 살짝 내려앉은 날이라면, 검은 현무암과 흰 눈의 대비가 성의 윤곽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계절의 호로고루는 사진보다 직접 걷고 바라볼 때 더 깊게 남습니다.
걷는 시간은 짧지만, 여운은 길게

호로고루는 오래 머물러야 하는 여행지가 아닙니다. 성 내부를 한 바퀴 도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벽 위에 잠시 서서 강을 바라보고, 바람 소리를 듣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겨울의 임진강은 조용합니다. 물소리도, 사람 소리도 줄어든 대신, 공간이 가진 역사와 구조가 전면에 드러납니다. 화려한 설명 없이도 고구려가 이곳에서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지, 그 긴장과 결이 자연스럽게 전해집니다.
기본 정보

위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문의: 연천군청 문화체육과 031-839-2565
홈페이지: https://tour.yeoncheon.go.kr
이용시간: 상시 개방
홍보관 이용시간:
하절기(3~11월) : 오전 10시 ~ 오후 5시
동절기(12~2월) : 오전 10시 ~ 오후 4시
휴일: 연중무휴
주차: 가능
지정현황: 사적 연천 호로고루(2006.01.02 지정)
입장료: 무료

연천 호로고루는 ‘볼거리 많은 여행지’라기보다는‘생각이 남는 장소’에 가깝습니다. 겨울의 단정한 풍경 속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성벽 위에 서 있으면 시간이 천천히 겹쳐지는 느낌이 듭니다.
화려하지 않아 더 오래 기억되는 곳. 연천에서 만나는 고구려의 시간은, 지금 같은 계절에 가장 조용하고 또렷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