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품의 아우라,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 [Editor’s Review]

조회 3892025. 2. 15.
봄이 되면 종달새는 지저귈 수밖에 없다.
-빈센트 반 고흐-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어른들은 ‘창에는 제라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이라는 설명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십만 프랑짜리 집’을 봤다고 해야 ‘참 멋진 집’이라고 소리친다.”

비슷한 말을 해보고자 한다. “이제까지 조명받지 못했던 고흐의 데생 드로잉 작품을 부각했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및 크뢸러 밀러 미술관과 협력해 시간순으로 고흐의 예술적 여정을 풀어냈다”는 설명보다 “작품 평가액이 1조원이 넘는다”.라는 말이 더 직관적일 수 있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 전시회에는 어떤 작품들이 걸려있을까. 고흐의 작품을 보면 1조원이 넘는 가치가 실감날지 궁금했다. 호기심을 안고 고흐 전시장을 찾았다.

ⓒDen

예술의 전당에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한가람 미술관이 보인다. 2월에도 아직 눈이 내려 풍경이 그림같다. 카라바조, 안나&다니엘 사진전, 미셸 앙리 등 다양한 전시를 열고 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건 단연 반 고흐다.

반 고흐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화가로 손꼽힌다. ‘밤의 카페 테라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를 처음 보는 한국인은 드물다. 화가가 고흐라는 것까지는 몰라도 작품 자체는 익숙할 것이다.

왼쪽부터 ‘밤의 카페 테라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반 고흐의 일생을 다룬 유화 장편 애니메이션 독립 영화 ‘러빙 빈센트(2017)’ 6만 4천 점의 유화를 전부 수작업으로 작업해 고흐의 예술과 삶을 그대로 담아냈다. 한국에서 40만명이라는 높은 관객수를 기록했다.

ⓒ네이버 영화

그런 반 고흐의 원화 작품 76점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에서는 12년 만에 반 고흐의 원화를 가져와 사람들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한파에도 불구하고 개막 50일 여 만에 관람객 30만명 이상이 전시장을 찾았다. 내부 사진 촬영은 불가능하지만 전시회에 걸린 작품이 전부 담긴 도록을 판매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평점이 의외로 낮았는데, 그 이유는 지나친 인파 탓이다. 각오를 단단히 다진 채 전시회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원화를 보는 건 그 자체로 즐겁다. 배경지식이 있으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겠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미술 작품과 시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느끼는 것만으로, 내게 주는 순간적인 감각을 포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전시회 속으로, 입장

매표소에서 티켓을 발권한 뒤, 사람이 없다면 운이 좋은 거다. 바로 전시회로 들어가면 된다. 하지만 대기하는 사람이 많다면, 우선 매표소 옆 태블릿에 핸드폰 번호를 등록하면 된다. 차례가 되면 카카오톡 알람이 오니 그때 입장 대기를 위한 줄을 서면 된다.

전시회 대기 라인에는 나름대로 포토존이 있다. 고흐의 자화상과 함께 전시회 이름을 노란 네온사인으로 적어놨으니, 기다리는 동안 매표소에 있던 리플렛과 함께 사진을 한 장 찍으면 좋다.

ⓒDen

이번 전시는 연대기순으로 진행되며 화가의 기본적인 삶의 족적을 명료하게 요약해 알려준다. 네덜란드, 파리, 아를, 생레미를 지나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고흐가 살아온 발자취를 총 다섯 파트로 나눴으며 관객은 시간순으로 함께 걸어나갈 수 있다.

가장 처음은 사진으로 시작한다. 고흐의 가족들, 고흐가 작품에 담았던 장소들이 나와있다. 사진을 보니 그제야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과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반 고흐에 대해 명화로 먼저 접하다보니 인물의 존재가 막연히 지워졌던 모양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의 남동생, 테오 반 고흐다. 평생 편지를 주고 받으며 형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테오. 그리고 형제들이 주고 받은 편지와 고흐의 미술 작품을 관리했던 테오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쯤 고흐의 작품을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wikipedia
ⓒwikipedia

김영하 작가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백업’이라는 말을 한 적 있다. 작품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를 남기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세기의 역작을 그려냈어도 누군가 관리해주지 않는다면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스러져간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을까. 괜스레 씁쓸한 기분이 든다.

@vangogh_korea

사진을 보고나면 네덜란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고흐의 작품이 걸려있다. 짙은 푸른색 배경은 차분하며, 주홍빛 조명이 작품만을 비춰준다. 온전히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다. 전시장 곳곳에는 의자가 배치되어있어 잠시 쉬어갈 수 있다.

놓치기 아쉬운 작품

보고 난 작품들은 마음에 남아 이리저리 뒤섞인다. 그 중 에디터의 뇌리에 남은 작품을 몇 점 골라봤다.

밀짚모자가 있는 정물화. 1881. 캔버스에 붙인 종이에 유화.

처음에는 위에 유난히 폭신하게 보이는 동그란 부분이 빵이나 케이크인줄 알았는데 제목을 보고 나서야 밀짚모자인 걸 알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흐가 그린 정물화 역시 많았다. 얼굴도, 표정도 없는 물건이 그려진 정물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양한 생각이 든다. 내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의 화가의 몫이라면, 감상은 보는 자의 몫이다.

물론 위의 작품에 대해 해설을 듣는다면, 1981년에 헤이그에서 유명한 풍경화가이자 농민 풍속화의 대가인 안톤 마우베에게 그림을 배우며 적은 물감으로 세밀하게 정물화를 그리는 연습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그림에서 느껴지는 단상들이 있으니 처음보는 그림을 모른다고 주저할 필요는 없다.

양파가 담긴 접시 정물. 1889. 캔버스에 유화.

그림에서는 온화함과 산뜻함이 느껴진다.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물건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접시 위의 양파가 귀엽게 느껴질 거라고는, 그림을 보기 전까지 생각도 해본 적 없다. 일상의 사물을 더 다정하게 바라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작품이 그려진 1989년 1월 초는 아를 시기로, 남프랑스의 작은 고시에 머물던 때다. 이때 고흐는 주로 인물화와 풍경화에 집중했다. 고흐가 악화된 상태로 발작을 겪으며, 한동안 밤에는 병원에서 머물며 그려낸 그림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고흐는 삶을 끝내기 직전까지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석고상이 있는 정물. 1887. 캔버스에 유화.

피크닉이라도 간 것 처럼 노란 천 위에눈 두권의 책과 아직 피어나지 않은 장미 꽃봉오리가 올려져 있다.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포근한 색감이 매력적이다. 에디터만 좋다고 생각했던 건 아닌지, 마지막 전시 아트샵에 이 작품을 이용한 다양한 굿즈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일본풍 자포니즘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시도’이며, 얀 홀스커가 오브제들의 조합을 ‘수수께끼 같고, 심지어 초현실적’이라고 평가한 사실까지는 몰라도 괜찮다. 고흐가 자주 다룬 주제인 장미가 다소 서투른 방식으로 그려져 있으며, 자연을 보고 그린 게 아니라 기억을 바탕으로 그렸기 때문이란 사실 역시.

자화상. 1887. 카드보드에 유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 ‘자화상’일 것이다. 누군가 노래방에서 내가 아는 노래를 부르면 반가운 것처럼, 눈에 익은 작품을 마주치는 건 그 자체로 반갑다. 그 작품에 대해 거창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원화를 마주하면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다. 그림 속 고흐는 혼란스럽고, 고집이 느껴지고, 슬퍼보인다. 고흐는 파리 시절 총 25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 자화상은 상대적으로 차분한 색을 가졌다. 표정 역시 차분하지만, 눈에서는 불안과 우울이 읽힌다고 한다. 얼굴의 붓질에서는 기술적인 숙련도를 읽을 수 있고, 배경의 빠른 붓질은 깊이감과 생동감을 더해준다.

들꽃과 장미가 있는 정물. 1886-1887. 캔버스에 유화.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강렬한 색채가 인상적이다. 처음 본 순간 어딘지 모르게 오싹하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붉은 장미가 피처럼 느껴졌고, 바닥을 나뒹구는 잘린 꽃들은 시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강렬하고 섬뜩한 아름다움에 빠져 한동안 그림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데생으로 읽어낸 고흐

@vangogh_korea

우리가 고흐에 대해 알고 있는 작품은 주로 유화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데생 작품들에 주목했다. 다른 유화 작품들은 짙은 푸른색의 벽에서 대비되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황색 빛의 조명을 받으며 자태를 뽐냈지만, 데생만은 연한 민트색의 벽이 배경이 되어 은은하게 작품을 보조했다.

고흐의 전시회에서 만난 게 아니라면, 작품 설명에 고흐라고 적혀있지 않았다면 누구의 데생인지 몰랐을 것이다. 고흐에 대해서는 대표적인 유화 몇 작품 정도를 알고 있는게 전부였으나, 전시회를 보며 새로운 작품들을 많이 알게 됐다.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유리잔을 든 노인. 1882. 푸른 자주색 직조지에 연필, 사각자국

고집스럽게 앙다문 입과, 어디를 보는지 모를 시선, 손가락 두어개로 들고 있는 유리잔은 그 사람을 궁금하게 만든다. 어떤 사연을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거칠고 투박한 선의 묘사도 제법 매력적이다. 모델은 ‘아드리아누스 야코부스 주이더란드’이며 고흐는 ‘멋진 대머리와 큰 귀, 하얀 수염을 가진 사람’이라 묘사한 바 있다.

전시회를 나오며

ⓒDen

재입장은 불가능하다. 전시회의 마지막에는 전시 아트샵에서 고흐의 작품으로 낸 굿즈를 구경할 수 있다. 가격은 비싼 편이지만 전시용으로 좋은 엽서, 우표, 패브릭 포스터부터 실용적인 우산, 스카프, 틴 케이스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전시회를 나오자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흐의 원화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어쩐지 아쉬운 기분을 뒤로한 채 훌훌 털고 나와본다. 세상은 넓고 전시회는 많다. 다양한 전시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는 3월 16일까지 진행된다. 고흐의 원화를 한국에서 보는 감동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Info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1층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700번지
전화번호 : 02-585-8988
인스타그램 : @vangogh_korea
홈페이지 : http://www.sac.or.kr/

전시 기간 : 2024.11.29 - 2025.03.16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 오전10시~오후 7시 (관람종료 40분전 입장마감)
가격 : 성인 2만 4천원, 청소년/어린이 1만8천원

ㅣ 덴 매거진 Online 2025년
에디터 안우빈 (been_1124@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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