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10살때 실종된 딸 희영이…"어디선가…" 아빠는 울었다

남원(전북)=김미루 기자, 남원(전북)=이강준 기자 2024. 9. 1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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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실종리포트(상)-다섯 가족 이야기]②1994년 당시 10살 서희영양 실종, 아버지 서기원씨
딸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산 아버지, 실종 사건 후 송두리째 달라진 일상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집도, 장학금도 '한명 한명이 우리딸 같다'
[편집자주] 머니투데이 사회부 사건팀은 지난 4개월간 전국 각지에서 실종 가족들을 만났다. '2024 실종리포트-다섯가족 이야기'는 한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실종 가족들에 대한 기록이자 오늘날 가족의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의 이야기다.

전북 남원시의 한 놀이터. 희영이는 하교 후에 놀이터로 달려가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다. 1994년 4월27일 "희영이가 집에 안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고 서기원씨는 가장 먼저 이 놀이터로 달려갔다. /사진=이강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평범한 4월이었다. 31살 젊은 아빠는 골프연습장 공사에 연일 구슬땀을 흘렸다. 큰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공부에 관심 없다는 딸 희영이를 위해서였다. 초교 4학년 희영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시험지엔 비가 내렸다.

'공부 좀 못하면 어때. 운동 뒷바라지를 해줘야겠다.'

아는 문제도 틀려 온 딸 손바닥을 자로 몇 대 때린 일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30년 전 서기원씨(61)는 사업가로서 성공해 딸을 뒷바라지해주는 것만이 딸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1990년대 서기원씨와 딸 서희영양. 통뼈에 힘이 좋은 것은 아버지를 닮았고 남원 그네 타기 대회 1등에 웬만한 남자만큼 달리기가 빨랐던 어머니에겐 뛰어난 운동신경을 물려받았다. /사진=본인 제공


동네에는 희영이를 놀아줄 사람이 많았다. 학교, 집, 외갓집, 놀이터까지 모두 반경 1㎞ 안에 있었다. 하교하면 외갓집에 가서 책가방을 두고 집에 들러 용돈을 챙긴 뒤 놀이터로 갔다. 친구들과 봄볕에 얼굴이 그을릴 때까지 놀았다. 저녁 무렵 친구들과 헤어지면 외갓집으로 향했다. 세 명이나 되는 이모와 또 놀았다.

1994년 4월27일 수요일 오후 5시쯤. 여느 때처럼 공사 중이던 서씨는 희영이 이모에게 전화를 받았다.

"형부, 희영이가 저희 집에 안 왔어요. 희영이 집에 있나요?"

전북 남원시의 한 놀이터. 희영이는 하교 후에 놀이터로 달려가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다. 서기원씨는 희영이 실종 이후 웬만하면 이 놀이터를 지나가지 않는다. /사진=이강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형부, 희영이가 안 왔어요"…젊은 아빠 등줄기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희영이가 다니던 전북 남원시 남원중앙초등학교 운동장. 서씨도 이곳 졸업생이라 희영이에게 "너는 내 딸이고 학교 후배구나"라는 말을 종종 해줬다. 그 말을 들은 희영이는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진=이강준 기자

서씨는 희영이가 신나게 놀다 지쳐 잠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을 잠시 접고 집으로 향했다. 희영이는 집에 없었다. 서랍에 넣어둔 용돈에서 동전이 없었다. '몇백원을 빼다 쓴 모양이군.' 서씨는 횡단보도를 건너 남원시청 뒤 놀이터로 갔다. 아이가 없었다. 처제가 다른 놀이터도 찾아봤지만 없었다고 했다.

구멍가게에 갔다. 주인은 희영이가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고 했다. 다시 시청 앞 도로를 건너 중앙초등학교에 갔다. 희영이는 이곳에서 친구들과 자주 자전거를 탔다. 학교에도 아이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봤지만 "놀다 헤어졌다"고 할 뿐이었다.

오후 7시.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차 핸들을 잡은 손이 계속 미끄러졌다. 남원역(지금은 폐역이 됐다) 앞 역전파출소로 갔다. 서씨의 마음은 급한데 사람들은 속 편한 소리를 했다. "뭐 어디 갔겠어요, 놀고 있겠죠. 사장님 조금만 기다리시죠." 30년전 파출소 직원 말이 아직도 서씨를 괴롭힌다.

실종 당일 신고를 위해 찾아간 남원역 앞 역전파출소. 30년이 흐른 지금은 남원역도, 역전파출소도 모두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 모든 게 사라졌지만 서기원씨는 아직 "놀고 있겠죠. 좀만 기다리시죠" 하던 파출소 직원 말을 기억해 마음이 쓰리다. /사진=이강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뭔가 이상하다니까. 친구들이랑 지금껏 놀면 '아빠 나 좀 놀다 갈게요' 할 애지, 연락도 없이 갈 애가 아니라니까. 바로 좀 찾아줘 봐요. 진짜예요. 사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니까요."

서씨의 호소에도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실종 신고 후 72시간이 지나기 전에 경찰이 초동수사를 벌일 수 없었다.

파출소를 나온 서씨는 병원 응급실과 개인 병원들을 찾았다. 한 줄 한 줄 뜯어봐도 '서희영' 이름 석 자가 없었다. 여자아이는 아예 안 들어왔다는 말만 돌아왔다.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응급실이 아닌 남원의료원 영안실로 갔다. "여자아이 시체 들어온 게 있습니까." 아버지는 몸을 떨며 묻고 또 물었다.

밤이 돼도 희영이는 집에 오지 않았다. 친구들과 차 몇 대를 나눠 타고 희영이를 찾았다. 광한루, 절, 하천가. 아이는 없었다. 동이 튼 아침에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서기원씨와 희영이 외갓집이 있던 전북 남원시 향교동 골목. 희영이는 하교하면 외갓집에 가서 책가방을 두고 집에 들러 용돈을 챙긴 뒤 놀이터로 갔다. 친구들과 봄볕에 얼굴이 그을릴 때까지 놀다가 저녁 무렵 친구들과 헤어지면 외갓집으로 향했다. /사진=이강준 기자


사고가 아니라면 사건이었다. 유괴 후 살해됐을 것이라는 데 상상이 미쳤다. 동네에서 소문이 안 좋다는 남자들을 찾아다녔다. 사체라도 발견할까 등산로가 아닌 지리산 산기슭을 뛰어다녔다. 아이가 없었다. 실종 후 약 10시간 뒤 희영 외가, 친가 식구들이 그의 집으로 모였다. 가족들은 울었지만 아버지는 울지 못했다.

동네 광고상에 전단과 현수막 제작을 맡겼다. 수천장을 인쇄해 전북 남원 인근 도시인 장수, 곡성, 순천에 붙였다. 방송국에도 보도를 부탁했고 저녁 뉴스에 희영이 실종 소식을 전했다. "부산에서 본 것 같아요" 제보가 오면 부산으로, "곡성에서 봤어요" 하면 곡성으로 갔다.

실종 72시간이 지난 뒤 경찰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탐문 수사를 벌였다. 이게 그때 그 시절 매뉴얼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서씨는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에 갔다. "실종 수사 제일 잘하는 사람 연결해주십시오." 서씨 말에 돌아온 답은 "초동수사에서 놓쳤는데 여기서 어떻게 찾습니까" 였다.

30년 전 젊은 사업가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서기원씨. 희영이 실종 이후엔 희영이 찾기가 서씨의 삶이 됐고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제보가 들어오면 차를 몰고 안 가본 곳이 없다. 가족들 앞에서 절대 울지 않은 그는 차 안에서 비로소 혼자가 됐을 때 눈물을 흘렸다. /사진=이강준 기자


서울에서 남원으로 돌아가는 길, 그때서야 눈물이 났다. 가족들 마음이 약해질까 보일 수 없었던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차도 안 막히는 귀갓길이 8시간이나 걸렸다.

동네에 의심되는 남자 집 앞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 불법 행위인 줄 알면서도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윤락가를 뒤졌다. 국문학을 전공한 희영의 이모가 절절한 편지 3000장을 손으로 써 보육시설, 장애인시설에 보냈다.

"우리 시설에 그런 아이는 없습니다."

단 2곳에서만 답장을 받았다.

실종 후 30년, 누구보다 열심히 산 아버지…'희영이도 어디선가'
희영이를 만난다면 "이제는 헤어지지 말자"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아버지로서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겠다는 마음이다. 31살 젊은 아빠였던 그는 아이를 찾으며 60대 아버지가 됐다. 자신이 늙으면 누가 희영이를 찾아줄 수 있을지 걱정이다. 30년 전 전북 남원시 남원관광단지 꼭대기에 올라가 도로 하나하나를 눈으로 훑으며 희영이를 찾았다. /사진=이강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희영이가 사라졌다. 사라진 지 30년이 된 지금 희영이가 면식범에 의해 살해됐거나 해외로 입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서씨는 생각한다. 사체나 유골 등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생존 가능성은 50% 정도. 그 확률에 서씨는 남은 인생을 쓰고 있다.

'희영이도 어디선가 혼자 지내지 않을까.'

서씨는 1994년부터 10년간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나섰다. 그 아이들은 겨울에도 불을 못 때 이불을 높게 쌓아 잠을 잤다. 폐차 안에 자며 밖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서씨는 자기 집 1층을 내주고 비디오를 틀어줬다. 자기 돈으로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그때는 한 명 한 명이 희영이 같았다고 한다.

희영이를 찾는 일은 서씨의 삶이 됐고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 실종 가족이 겪는 어려움이 서씨에게도 찾아왔다. 서씨 부부는 아픈 이별을 경험했다. 서씨가 벌어둔 재산도 점점 줄었다. 집도, 사업장 8개도 모두 팔았다. 1990년대 동네 몇 대 없던 외제차들도 팔았다. 이제는 중고차를 몬다.

그는 아이가 사라진 뒤 이듬해 '전국 실종자 가족들의 모임' NGO 단체를 결성했다. 2008년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를 맡은 뒤 매년 자기돈 2억원을 운영에 썼다.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서기원씨가 연못 근처를 걷고 있다. 달나라를 볼 수 있다는 광한루 '완월정' 앞에서 희영이는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광한루에서 진행하는 그네 타기 대회에서 엄마가 1등을 해 상품을 타올 때마다 같이 따라온 희영이는 신이 났다. /사진=이강준 기자


2005년이 돼서야 제정된 실종아동법에는 서씨의 땀과 눈물이 섞였다. 실종 신고 후 경찰이 사흘을 기다려야 했던 매뉴얼은 사라졌다. 현재는 경찰이 신고와 동시에 현장에 출동해 범죄인지 단순 가출인지 판단한다. 서씨는 회원들과 함께 50여개의 법 개정에 노력했다. 경찰청 산하에도 실종전담부서 182 신고센터가 생겼다.

이번 추석에 그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낼 것이라고 했다. 집에선 그도 막내다. 한 때 명절에 형의 집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어느 날부터 발길을 끊었다. "저는 가족들에게 불편한 존재예요. 희영이 생각을 가족들이 할 수밖에 없어서… 웃을 일이 있어도 제가 있으면 잘 웃기 어려운 거예요." 서씨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픽=윤선정 디자인 기자

남원(전북)=김미루 기자 miroo@mt.co.kr 남원(전북)=이강준 기자 Gjlee101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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