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십 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내려놓은 남편은 정년퇴직을 한 직후부터 매일 오전 열한 시만 되면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집에서 편히 쉬라고 말을 건네도 남편은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매일같이 밖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느지막한 오후에나 돌아왔다.
어느 날 통장에 연동된 카드 결제 알림을 확인하던 나는 남편의 수상한 점심 식사 내역을 발견하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매달 남편이 가져다주는 적은 봉급으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단칸방에서 악착같이 가계를 꾸려왔다.
남편은 회사가 어렵다는 핑계로 상여금이나 수당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며 항상 내게 미안한 표정만 지었다.
가족을 위해 내 옷 한 벌 사 입지 않고 아껴 살았는데 남편이 수억 원의 딴주머니를 차고 있었다니 억장이 무너졌다.

충격을 받은 나는 퇴직 축하 파티를 준비하려던 상을 엎고 비밀 통장을 내던지며 남편에게 이유를 따져 물었다.
남편은 사색이 되어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낡은 통장 첫 장을 넘겨 가만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내 이름으로 된 연금과 아픈 친정 어머니의 병원비 명목으로 매달 꾸준히 입금된 기록이 적혀 있었다.

알고 보니 사업에 실패하고 돈을 요구하던 자신의 친가 형제들로부터 우리 생활비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었다.
남편은 자신이 벌어온 돈을 그대로 공개하면 형제들의 원망을 거절하지 못해 우리 가정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내 명의로 차곡차곡 쌓인 적금은 내가 늙어서 고생하지 않도록 남편이 청춘을 바쳐 숨겨둔 가장 확실한 사랑의 증표였다.

지난 30년 동안 나를 속였다는 원망은 남편이 혼자 짊어졌을 거친 세월의 무게와 미안함에 대한 먹먹함으로 바뀌었다.
나는 붉어진 눈시울로 남편의 투박하고 거친 손을 꼭 잡으며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나직하게 첫 인사를 건넸다.
거실 창가로 들어오는 따뜻한 노을빛 아래에서 우리 부부는 마침내 서로를 온전히 안아주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